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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후문앞 넘어지면 배꼽 닿는 공연장

내가 사는 아파트는 성수동에 있다. 우리 아파트 후문을 나와 넘어지면, 배꼽 닿는 곳에 성수아트홀이 있다. 성수아트홀은 겨우 200명 규모의 작은 공연장이다. 하지만 작품의 질이란 규모와는 상관없다. 성수아트홀은 짧은 기간 동안 실험적이거나, 친근하거나, 이웃들에게 가까운 공연들을 꽤 진행해 왔다.

2016년 10월 7일(금) 저녁 8시에, 나는 맥주 사러 동네 슈퍼 가는 기분으로 성수아트홀에 갔다. 함께 하는 이웃들과 함께, 편안하게. 그러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공연을 보게 되었다. 그 감동을 나누고자, 글을 적었다.

환상노정기는 판소리고, 일부는 마당극이고, 어찌 들으면 국악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OST다. 전위적 미술전시 공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살아있는 한 편의 연극이다.
▲ 2016 그림 The林 음악극 <환상노정기> 환상노정기는 판소리고, 일부는 마당극이고, 어찌 들으면 국악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OST다. 전위적 미술전시 공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살아있는 한 편의 연극이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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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고 마당극이고 전위 미디어 전시같은 공연

환상노정기를 보고 '악!' 소리가 났다. 물론 악(樂)소리는 이 노래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 것이었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는 기립해 박수를 쳤다. 나만 그런가 하고 뒤를 살피니, 저 뒤의 한 남자도 보인다. 성수아트홀 공연장을 꽉 채운 우리 관객들의 박수는 오래 이어졌다.
 
환상노정기는, 김홍도와 그의 그림이야기다. 그가 본 금강산과 그 안의 호랑이 이야기다. 그의 그림 하나하나가 무대 전체를 통해 펼쳐진다. 경포대와 낙산사, 장안사와 묘길상, 금강산 굽이굽이가 흘러나올 때, 북, 장고, 나팔, 가야금들이 아침 햇살처럼 펼쳐진다. 그러니까 이건 여러 국악인들(관악 정진우, 거문고 윤희연, 가야금 박다솜, 타악 장경희)이 영화음악을 맡은 한 편의 영화다.
 
판소리를 하는 이는 김봉영. 그는 일인십역을 해내는데, 어린 함경도 사내아이 만덕이에서부터 노련한 포수까지, 나라 임금에서 산중호걸 호랑이까지 넘나든다. 그의 표정은 풍부하다. 앞에서 느닷없이 질러대오는 어린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장난치고 포용한다. 소리는 금강산의 바람 소리 같고, 어떤 때는 폭포수처럼 들린다. 이건 판소리고, 동시에 마당극이다.


김홍도는 100첩의 금강산을 그렸다(고 전한다. 우리에게 남은 그림은 현재 60여 첩). 동시에 맹호도를 그렸다. 사이사이 당시 살던 수많은 일하는 대중들의 모습도 그렸다. 그의 그림을 연극 안에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 노래극 환상노정은 그 일을 해냈다. 환상노정은 동양미술의 미디어 전시고, 화면을 벗어나 움직이는 설치미술이기도 하다.   

금강산과 호랑이에게서 위로받다, 아들 잃은 아버지 마음

때는 1788년이다. 정조 시절. 그 당시에 인간들은 둘로 구분이 되었단다. 금강산을 가본 이는 각설이패라도 '인생을 아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못 가본 이들은 '무지렁이들'. 그 무지렁이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임금이다. 지엄한 신분이라, '자유여행'이 불가능하기에. 겨우 그는 김홍도에 명할 뿐이다. "금강산을 그려오라. 금강산 호랑이도…."
 
화가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어진 화가. 그러나 김홍도가 그 정점에 서 있을 때, 그는 아들 여래를 잃는다. 폐병을 앓다 죽은 것. 그는 그림을 얻었지만, 아들을 잃었다. 한껏 트인 금강산에서 김홍도는 자꾸자꾸 아들을 앓는다. 그러다 만나는 소년이 있으니, 호랑이에게 물려 피를 흘리는 소년 만덕이다. 특별한 인연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야무지다. 이건 훌륭한 스토리고, 연극이다.
 
현란한 조명과 정교한 영상들, 폭발하는 것 같으면서도 조화로운 음악들이 <환상노정> 안에 있었다. 우리의 판소리가 주는 쇳소리와 울음소리, 해학과 기지 넘치는 '작창'을 들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이 모든 것을 이들 안에서 만들어냈다니, 놀라웠다. 의정부음악극축제 음악극어워드 대상 수상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창단한 지 15년 되었다는 그림(The 林뜻) 패거리들은 이곳 성수아트홀의 상주공연단체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뒤편에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 <파이 스토리> 혹은 <빅 피쉬>와 비슷하다. <환상노정>, 환상의 여행길이 무슨 뜻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인생은 환상이다. 환상이 인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의 큰 일들, 자연의 진경에 비하면, 아버지의 마음 속 풍경은 작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그리움이 나를 떨리게 한 것 같다. 나를 일으켜 세운 힘은 아마도 그 모든 것들이었을 테지만….


태그:#환상노정기, #성수아트홀, #성수동, #그림, #김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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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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