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린 딸을 키우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 한 번은 그녀의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하는 행사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딸은 선생님에게 당시 인기를 끌던 로봇 만화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러자 돌아온 선생님의 반응. '어? 그런데 그 만화에 여자 로봇은 없는데? 다른 걸 해야겠다.' 왜 여자 아이가 남성 캐릭터 분장을 해서는 안되는지, 그리고 애초에 로봇에 성별이 있긴 한건지 의아했지만 아무튼 그녀의 딸은 결국 다른 캐릭터를 택해야 했다. 그리고 행사 내내 풀이 죽어있었다고 한다.

소녀 팬 만난 크리스틴 위그 리메이크된 할리우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린 후, 주연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위그가 '고스트 버스터' 코스프레를 한 소녀 팬을 만나 인사하는 장면을 AP통신이 포착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AP 사진을 인용하여 지난 7월 11일 보도했다. 사진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누리집 갈무리.

▲ 소녀 팬 만난 크리스틴 위그 리메이크된 할리우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린 후, 주연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위그가 '고스트 버스터' 코스프레를 한 소녀 팬을 만나 인사하는 장면을 AP통신이 포착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AP 사진을 인용하여 지난 7월 11일 보도했다. 사진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누리집 갈무리. ⓒ EW/AP


새로운 '고스트 버스터즈'들이 만든 변화들

아무튼 오래 전에 들었던 이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전 새로운 <고스트 버스터즈>의 시사회장 사진을 본 후였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새롭게 시리즈를 시작하며 제작진은 주인공인 귀신 사냥꾼들을 모두 여성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이 같은 결정은 많은 남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이들은 새로 만들어진 고스트 버스터즈가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망쳐버렸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어떻게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것이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망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이 영화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에 영향을 주긴 줬다. 바로 자라나는 여성들이다. 이날 시사회장에는 고스트 버스터즈 의상을 입은 소녀들이 등장했다. 이 소녀들은 영화의 상징이라 할 소방관 수트를 입고, 등에는 귀신 잡는 무기인 프로톤 팩을 멨다. 이 날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이들이 주연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와 마주쳤을 때였다. 그녀는 이들과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고 소녀들의 눈에는 기쁨과 동경이 가득했다.

새로운 고스트 버스터즈의 등장이 단지 시사회장의 소녀들에게만 영향을 미쳤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실제로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버즈피드에선 고스트 버스터즈에 관한 재미있는 트윗들을 공개했는데, ESPN의 선임작가 미나 카임즈는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트윗하며 '여성 고스트 버스터즈들은 최고다, 이는 소녀들이 더 이상 (이전 고스트 버스터즈에 등장했던) 비서 의상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사진 속 어린 그녀는 비서 의상을 입은 채, 고스트 버스터즈 코스튬을 입은 소년들 사이에서 찌푸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나 카임즈가 트위터에 공개한 어린 시절 그녀의 사진

미나 카임즈가 트위터에 공개한 어린 시절 그녀의 사진 ⓒ 트위터 캡쳐


여성 '롤모델 캐릭터'가 필요한 이유

이 같은 상황은 단지 소녀들이 입을 수 있는 할로윈 의상이 추가되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어린 여성들이 동경하고 이입하며 귀감으로 삼을 캐릭터가 늘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롤모델이 늘어난 셈이다. 그리고 이 롤모델들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다. 이 영화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이 영화에는 대학교수, 엔지니어, 학자 등 다양한 직업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들은 지적이며 누구도 시도하지 않던 일에 뛰어들 만큼 도전적이고, 거기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유령을 사냥하러 다닐 정도로 용감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영화의 이야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만큼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다.

현재 미국 문화계에는 이러한 새로운 롤모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가령 스타워즈의 새로운 시리즈에는 주인공으로 강인한 여성 캐릭터 '레이'가 등장한다.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도 역시나 남성들의 지배를 전복하는 강한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이 캐릭터들 외에도 기성의 영화 속 여성들과는 다른, 보다 진취적이고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여성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이는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코믹스로 넘어가자면 비백인이나 성소수자 슈퍼 히어로의 등장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이러한 새로운 롤모델들이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성장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중매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단지 개인의 삶이 달라지는 수준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일례로 미국에는 <헝거 게임>의 등장 이후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의 영향을 받은 'K세대'가 등장했다. 마치 캐피톨의 부당한 통치에 대항하고 혁명의 선봉에 서게되는 주인공 캣니스처럼, 이들은 기성체제에 맞서 문제를 제기하고 테러나 기후 변화와 같은 정치적인 이슈에 목소리를 낸다. 문화적 영향력이 막강한 단 한 명의 캐릭터가 일구어낸 일이다.

 새로운 캐스트로 돌아온 <고스트 버스터즈>. 남성 캐릭터가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것 이상의 의의를 갖는다.

새로운 캐스트로 돌아온 <고스트 버스터즈>. 남성 캐릭터가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것 이상의 의의를 갖는다. ⓒ UPIK


소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롤모델

사실 급변하는 미국 문화계를 보고 있자면 부러운 마음이 큰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롤모델로 삼을 만한 대중문화 속 여성 캐릭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비밀은 없다>나 <아가씨>와 같이 여성 인물이 극을 주도하는 작품이 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영화들에 흥미롭고 가치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캐릭터들이 롤모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특히나 성인이 아닌 경우, 이 작품을 감상조차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때문에 나는 대중 문화, 특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에 보다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를 희망한다. 단지 수만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들이 귀신도 잡고 혁명도 이끌며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에게 감화하고 이들을 롤모델로 삼는 여성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언제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되고 싶은 소녀에게 '그 캐릭터는 여자가 아닌데?'와 같은 말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소녀에게 필요한 것은 왕자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그녀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긍정적인 영감을 줄 선배 여성들이다.

고스트 버스터즈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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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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