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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번째다. '미련 곰탱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당사자인 아내에게 말을 안 했기에 망정이지 평소처럼 떠벌렸다면 무슨 창피인가. 허나 주위 가까운 몇 사람은 알고 있지 않나. 나 나름대로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 생각해 소수라고 해도 몇 지인들에게 발설한 게 후회된다.

올해는 우리 부부가 가정을 꾸린 지 25년이 되는 해다. 즉 은혼식(銀婚式)의 해다. 농촌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우리 부부는 개인적 여유를 별로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 없는 살림이 큰 이유였겠지만, 아내도 나도 개인은 공동체에 종속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25년이라는 숫자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사반세기! 만나서 살다가 헤어지는 쌍이 적지 않다는데, 우리는 용케도 잘 버티고 여기까지 왔다. 결혼한 뒤 25란 숫자 안에는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담겨 있다. 오순도순과 알콩달콩의 삶이었다.

고생한 아내를 위해 대마도 여행을 준비하다

1남2녀 아이들도 다 대학생이 됐다. 부모 슬하를 떠나 각자도생(各自圖生) 모두 도회지에 나가 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학 공부를 마치고 직업을 찾기까지 안심할 수 없다지만 아이들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아내의 공이 컸음은 물론이다.

가정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고마운 아내에게 선물을 겸해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몰래 이벤트성 행사를 하나 추진하고 있었다. 이른바 1박 2일 부부 대마도 여행이 그것. 대마도는 과거 우리 땅이었고, 최익현 순국비를 비롯해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 등 우리와 관련 있는 유적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거기에다 대마도 여행을 계획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저렴한 경비'였다. 국내를 돌아보고 오는데 드는 비용과 비슷하다고 하니, 명색이 외국 여행인데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부부 2인의 개별 여행보단 패키지가 훨씬 저렴하고도 편하다고 전문가들이 조언해줬다.

대마도 관광지도.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대마도 여행을 가지 위해 꼼꼼이 준비했다.
 대마도 관광지도.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대마도 여행을 가지 위해 꼼꼼이 준비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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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경비는 1인당 20만 원, 총 40만 원이면 다 해결되는 조건이었다. 예정에 두고 있는 돈에도 딱 맞았다. 아내를 놀라게 해줘야지, 이틀 시간 내기 좋은 때가 언제인가 몇 번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지만 아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5년 전에 있었던 실수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정말이다. 아주 치밀하게 체크해야겠다. 아마 5년 전쯤일 것이다.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고 적립해 놓은 돈이 30여만 원이 됐다. 그것으로 뭘할까 생각하다가 아내에게 옷 한 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돈이면 좋은 것은 아니더라도 입을 만한 것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어느날, 아내에게 나들이 차비를 하라고 일렀다. 난생처음 아내에게 선물다운 선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몹시 기뻤다. 은행에 들려 돈을 찾아야겠다는 말에 아내가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의 빈약한 경제 흐름을 훤히 꿰고 있는 아내인데.

잔뜩 기대를 갖고 은행 현금지급기와 마주 섰다. 현금 지급기가 그렇게 친근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동반자 정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문사에서 송금한 돈이 몇 분 전에 다른 용도로 몽땅 빠지고 없었다. 갑자기 어깨가 축 늘어졌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탓하며 아내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했다. 그럴 수도 있다며 이해하고 되레 용기를 북돋워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이젠 이런 걸로 쉬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5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결혼 25주년의 해가 됐다.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봉하마을에 다녀오자는 제안

지난 5월 22일이었다. 아내가 뜬금없이 내게 제안을 하나 해왔다. 내 짐을 한결 가볍게 만드는 제안이었다.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갈 데가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7주기가 열리는 봉하 마을에 다녀오면 좋겠다고 했다. 이런 데엔 내가 적극적이고 아내는 그 반대였다. 그런데 이런 제안을 해오다니. 평범한 아줌마의 의식이 넓혀진 것 같아 기뻤다.

아내는 노무현 7주기에 봉하 마을을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대신하자고 했지만...
 아내는 노무현 7주기에 봉하 마을을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대신하자고 했지만...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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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5월 23일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이것으로 결혼기념일과 관련한 나의 임무는 완수한 것이 된다. 아내도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고료로 축적돼 있는 돈도 우리 부부가 1박 2일로 대마도 다녀올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액수였다.

나는 신문사에 원고료를 청구하며 통장번호를 보냈다.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살핀다면 지난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반복되지 않으리라. 원고료가 나오는 그 이튿날은 무조건 우리 부부 여행 가는 날이라면서 벼르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대마도에 대한 여행 정보 수집에도 열심이었다.

원고료 입금만 눈 빠지게 기다리다

원고료가 바로 입금되지는 않지만 며칠내로 들어오는 게 그동안의 상례였다. 송금자를 그 신문사로 해서 말이다. 그런데 답답한 것이, 통장을 찍어 봐도, 전화로 확인해 봐도, 신문사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나를 휩쌌다. 하지만 어떡하랴!

그렇다고 신문사에 연락해 원고료 송금 여부를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글쟁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속 타는 건 나였다. 애써 잡은 의미 있는 계획인 만큼 꼭 성사되기를 바랐다. 둘 만의 오붓한 여행, 얼마나 감미로운 착상인가!

그럭저럭 이순(二旬) 지났다. 혹시 사무착오가 생길 수 있다는 걱정까지 끼어들었다. 글을 쓰고 대가를 지불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사정하는 조로 신문사에 확인 전화를 넣었다. 담당자는 이름과 거래 은행을 묻더니 송금을 했다는 것이다.

반복된 패착에 할 말을 잃다

죄수가 형량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듯 죄송하다고 말하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급히 통장을 꺼내어 꼼꼼히 확인해봤다. 신문사 이름은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구한 날 훨씬 전 것까지 훑어보았지만 찾는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원고료가 신문사 이름이 아닌 필자 이름으로 입금되는 바람에 또 다른 용도로 이미 돈이 빠져나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의 대마도 여행은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원고료가 신문사 이름이 아닌 필자 이름으로 입금되는 바람에 또 다른 용도로 이미 돈이 빠져나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내와의 대마도 여행은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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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있나. 분명 보냈다는데 받지 못하는 경우…. 고도 과학의 맹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다시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요구했다. 같은 건의 비슷한 내용인데도 담당자는 친절하게 응해줬다. 모년 모월 모일 '선생님 이름'으로 40만1030원이 입금됐을 것이라며 재차 확인해보라고 했다.

신문사 이름으로 송금하지 않고 지금은 필자 이름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이름으로 자기 통장에 돈을 입금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세금 등의 문제 때문에 그런 걸까? 원고료에서 기타 소득세 4.4%를 제하고 지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청구한 이틀 뒤의 날짜에 입금된 것으로 돼 있었다. 신문사가 아닌 나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음날 그 돈은 카드 대금으로 몽땅 빠져나간 것으로 돼 있었다. 좀 허탈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지만 같은 일로 두 번을 당하다니!

물거품... 원고료로 더 이상 궁상 떨지 않겠다

아내에게 대마도 여행 건에 대해 운이라도 뗐더라면 그 무슨 창피였겠는가. 안도의 한숨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대마도도 외국이라고 부푼 꿈 안고 준비한 것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젠 원고료를 갖고 아내에게 선(善)을 베풀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바에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어쩌면 글도 보다 뜸하게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젠 별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 아내와 여행 갈 꿈을 꿔야지.


태그:#은혼식, #대마도 여행, #원고료, #봉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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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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