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코는 3개월 된 아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이 퇴근길 철로 위에서 전차에 치여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는다. 몇 년 후, 유미코는 이웃의 주선으로 성실한 남자 타미오와 재혼하고 작은 어촌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환상의 빛>(1995)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던 그가 처음 극영화에 도전한 작품인 만큼, 이 작품의 화법은 상업영화에 길든 관객에게 있어 낯설다. 영화 속 대부분 장면은 고정된 앵글에서 인물과의 거리를 철저하게 유지하는 방식으로 촬영됐고, 심지어 주인공 유미코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는 장면조차 매우 드물다.

여기에 최소화된 조명, 연극 막간의 암전(暗轉)처럼 심심찮게 등장하는 긴 어둠까지.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묶어두는 데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개입을 자제하고 인물의 감정에 대한 관객의 공감을 강박적으로 제한한 것만 같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연출 방식이야말로 그가 말하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최선의 방식이 된다.


<환상의 빛>에서 느껴지는 대표적 모티브는 죽음, 곧 '상실'이다. 어린 시절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행방불명 되거나 남편을 자살로 잃는 일, 게를 잡으러 파도치는 바다에 나간 할머니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등의 사건까지. 이러한 장면들은 상실이라는 모티브를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또 하나의 모티브는 '한계'다. 영화 속 유미코에게 있어 가장 큰 트라우마는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자살'인데, 이는 이유나 목적을 알 수도 없고, 정리나 해결도 불가능한 것이다. 유미코는 이 영원한 수수께끼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새삼 확인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삶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맞닥뜨리는 여러 형태의 한계와 다르지 않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사건이라면 '남편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전혀 부각하지 않는 연출은 독특하다. 남편의 죽음은 늦은 밤 쿵쿵 문을 두드리고는 예고 없이 유미코 앞에 선고된 뒤, 그날 밤 내린 소나기만큼이나 순식간에 지나간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는 유미코의 모습, 또는 미스테리한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시도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영화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혼 후 바닷가 마을에서의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는 유미코의 일상을 담담히 그린다.

스펙터클을 기대한 관객으로서는 맥 빠지는 일이다. 대신 영화는 관객에게 일상의 모든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삶 전체를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일상의 무대는 다름 아닌 '자연'이다. 바다와 육지, 바람, 빛 따위의 자연의 이미지는 거대하게 표현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모습은 한없이 작게 그려진다. 영화 말미, 바닷가 장례 행렬 장면에서 수평선과 지평선 사이에 자리한 사람들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죽음(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관객에게 확인시켜 주는 장면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건의 연속이고, 개인에게 있어 사건이란 '유의미한 사건' 과 '무의미한 사건'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 규정이 불가능한 사건은 외면한다. 보통의 영화가 유의미한 사건과 감정, 즉, '규정과 설명이 용이한 이야기'를 다룬다면, <환상의 빛>이 다루는 건 '죽음'으로 대표되는 무의미함(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이다. 보통은 저 멀리 떼어두는 죽음을 일상 속에 포함하고, 관객에게 그 일상을 관조하게 하는 것이다. 관조를 통해 응시하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채워 넣을 수밖에 없다.

결국 <환상의 빛>은 죽음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낯선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즈음이면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죽음을 통해 삶을 위로하는 작품이란 것을 말이다. 각자의 선택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삶은 결코 예상하고 바라고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좀 '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좀 더 행복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