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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건드리더군.

- 파블루 네루다 '시' 중에서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에 동그랗게 앉았다. 글쓰기 수업마다 졸던 소년은 어디 간 걸까. 그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한다.

며칠 전부터 "세인샘, 글쓰기 수업 기대하세요.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했어요"라고 호언장담하던 소년. 싱긋 웃으며 눈을 찡긋거리던 소년이 읽어주는 시.

"시를 읽어주는 남자, 낭만적이야. 마치 네가 쓴 시를 읽는 거 같다."

시를 읽어주는 남자는 사실 나의 로망이었다. 나의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글쓰기 수업에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시인을 정해주기도 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을 스스로 준비해오기도 했다. 물론 숙제를 잘 안 해온다. 나는 강요하는 게 싫어서 조용히 넘어가는 편인데, 그걸 아는 아이들이 미룰 때가 많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여러 번 마음이 부대끼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수업을 준비해 가지만 얼어버린 동태눈으로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는 게 힘들었다. 결국 나와 그들의 민낯이 드러나 괴롭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문학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여전히 설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에 누가 시인 찾아올래?"라고 물으니 한 아이가 해맑게 대답한다.

"저는요. 시인 한 명도 몰라요. 아무나 정해주세요."
"그래, 그럼 랭보 할래?"
"랭보가 누구에요?"
"그냥 너 보니까 랭보 생각 나. 이번 기회에 한 번 알아봐."

그 친구가 랭보를 만날까. 물론 깊게 만나든, 얕게 만나든 그건 그 친구 몫이다. 나는 다만 시의 세계를 알려줄 뿐이다.

파블로 네루다처럼 십대시절 내게도 한 편의 시가 왔다. 야자시간에 짝지가 내민 한 편의 시. 열여덟 살 소년의 감성이라고 믿기지 않았던 시가 내게 왔다. 시는 사람을 배반하지 않았다. 시를 적은 소년을 흠모하여 여고시절 내내 열병처럼 앓았다.

'별리, 별리 당신을 두고 왔습니다'로 끝나던 시를 썼던 소년의 감성을 오래 사랑했다. 달달 외우고 다닌 시가 이제 가물가물한 걸 보니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나의 외사랑은 아직도 시를 쓰고 있을까. 마치 '방문객'처럼 왔던 한 편의 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승 '방문객' 중에서

나는 아직도 문장을 삼켰던 데미안처럼 좋은 시를 만나면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렇게 한 존재나 한 편의 시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도 있음을 샨티학교 아이들과 느끼고 싶었다. 물론 나의 욕심이다. 하지만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내가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고"라고 선창을 하면 아이들이 후창을 한다.

"헤어지면 위대한 시인이 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십대 시절부터 시를 적었고, 그 시들이 대표 시가 된 경우가 많다고 얘기해 주었다. 말랑말랑한 감성을 떠오르는 대로 기록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시를 자꾸만 읽다보면 언젠가 시를 적고 싶을 테다.

수업을 마무리할 즈음 카페 주인장인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더니 "오늘 여러분 시 낭송하는 모습 보고 반했어요. 오늘 찻값은 공짜입니다" 하셨다. 쉬는 화요일, 샨티학교 아이들을 위해 카페 문을 열어주시고 공짜 차를 주신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에 뭔가 보답해드리고 싶었다.

"우리 노래 한 곡 부를까."

기타를 튕기고 있던 아이가 샨티학교 교가라며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른 날을 기억하며...."를 불렀다. 시와 노래가 있었던 카페의 풍경. 글쓰기 수업, 오늘만 같아라.

카페 버스정류장 '수피전' 보러 오세요

사실 글쓰기 수업을 카페에서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카페에서 샨티학교 서수미샘의 그림전이 열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매일 보는 선생님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흔이 넘어 해혼을 하고, 살기 위해 사막을 달린 여자. 고통을 견디기 위해 붓을 들었던 여자. 그녀의 긴 사연은 접어두고, 내가 쓴 그림책의 서문으로 대신하련다.

그녀를 만난 건 시절인연이었다.
돌고 돌아서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
나보다 10년의 세월을 견뎌온 그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했다.
사막으로 달려가야 했던 그녀를
숨이 막혀도 뛰어야 했던 그녀를

사막에서 돌아온 그녀가
오아시스마저 버리고 붓을 들었다.
한 여자의 생이 그림이 되었다.

그녀를 만났다고 돌아서지 마시기를
별똥별 쏟아지는 사막의 어디쯤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만나기를

행여나 삶이 남루하다고 느껴질 때, 경북 상주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에 꼭 한 번 들르시기를! '이런 곳에 카페가 있을까' 하는 곳에 카페가 덩그러니 있고, '여기까지 누가 올까' 하는 곳에 단골이 있고, '이런 곳에 설마 그림전을 할까' 하는 곳에 '수피전'이 열리고 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정한 카페 주인장이 있고,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오신다면 글쓰기 수업 이야기에 뜬금없이 홍보를 한 죄(?)로 저도 달려가겠습니다.


태그:#샨티학교, #글쓰기, #카페 버스정류장, #수피전, #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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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쓸 때는 은둔자가 되고 싶으나,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여인. 곧 마흔, 불타는 유혹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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