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주 양동마을 수운정의 마루 모습. 수운정은 임란 발발 직후 경주 부내(시내) 집경전에 있던 이성계의 초상화가 안동으로 옮겨질 때 거쳐간 임시 피란처였다.
 경주 양동마을 수운정의 마루 모습. 수운정은 임란 발발 직후 경주 부내(시내) 집경전에 있던 이성계의 초상화가 안동으로 옮겨질 때 거쳐간 임시 피란처였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592년(선조 25) 4월 16일, 경주부윤 윤인함은 '집경전 참봉 정사성과 홍여율을 시켜(使集慶殿參奉鄭士誠洪汝栗)' 조선 건국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부터 대피시킨다(侍奉御容移遷). 이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주 일원에서 근무한 경상감사 이하 관리들에 대한 관청의 공식 기록인 <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경주선생안>은 '임진년(1592) 4월 13일 대마도에서 출발한 왜선이 부산을 함락하고 16일 잇달아 동래를 무너뜨린 후 승승장구하여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나누어 진격하자 경주부윤 윤인함이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어진을 안동 예안 '등'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경주 집경전은 전주 경기전(慶基殿)과 더불어 조선 창업 군주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셔온 건물이다. 조선 왕조가 집경전과 경기전을 경주와 전주에 건립한 것은 그 두 곳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주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서울, 전주는 이성계 집안의 고향이다.

경주에 모셔져 있던 이성계 초상도 왜란 당해 피란

어진은 곧장 안동까지 못 가고 중간 어디쯤에서 쉬었다. 최종 종착지는 이황의 손자인 이영도의 예안 집이었지만 당시 교통 사정으로는 단숨에 거기까지 내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경주선생안>은 '안동예안등내지(安東禮安等內地)'로 옮겼다고 기술한다. '임금의 얼굴'은 (포항시 북구) 죽장에서 하룻밤을 잤고, 그 이전에는 양동마을 수운정(水雲亭)에서 밤을 지샜다. 수운정은 중요민속자료 80호이니 어용(御容)도 한밤을 지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본 수운정의 모습. 그러나 수운정은 실제로는 기역자 건물이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오른쪽 뒤로 작은 마루와 방을 거느린 집이 기역자로 붙어 있고, 그 앞 담장에는 협문(작은문)이 나 있다.
 앞에서 본 수운정의 모습. 그러나 수운정은 실제로는 기역자 건물이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오른쪽 뒤로 작은 마루와 방을 거느린 집이 기역자로 붙어 있고, 그 앞 담장에는 협문(작은문)이 나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부윤의 명령을 받은 두 참봉은 어째서 양동마을의 그 많은 집들 중 이곳 수운정에서 머물렀을까? 부윤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일까? 아니면 본인들이 수운정을 최적지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혹은 집주인이 요청을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위치로 볼 때 수운정이 최고의 피란처라는 점은 지금 살펴보아도 부정할 수 없다.

보통의 답사자들은 양동마을에 들어서면 주차장 정면 언덕 위에서 엄청난 위용을 뽐내고 있는 향단(보물 412호)부터 보게 된다. 그 후 어지간히 부지런한 사람들도 관가정(보물 442호),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호), 무첨당(중요민속자료 411호) 등을 보는 데서 대만족한다. 그만 하면 사실 양동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돈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수운정, 양동마을 찾은 답사자도 놓치기 쉬운 곳

실제로 양동마을 안을 걸어보면 거의 맨 안까지 들어가야 서백당을 만날 수 있다. 서백당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관가정에서 출발하여 향단, 무첨당, 경산서당을 두루 둘러본 답사자에게만 서백당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도 수운정은, 이들 중요 문화재들을 빠짐없이 꿰면서 양동마을을 일주하는 여정에마저 포함되지 않는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곧장 왼쪽 높은 곳으로 오르면 관가정(맨 왼쪽 사진)이 있다. 관가정을 둘러본 후 돌아나와 향단(관가정 오른쪽 사진)을 보고, 무첨당(향단 오른쪽 사진)으로 발걸음을 한다. 무첨당 뒤 언덕에 오르면 경산서당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내려가 마을을 지나면 서백당(맨 오른쪽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곧장 왼쪽 높은 곳으로 오르면 관가정(맨 왼쪽 사진)이 있다. 관가정을 둘러본 후 돌아나와 향단(관가정 오른쪽 사진)을 보고, 무첨당(향단 오른쪽 사진)으로 발걸음을 한다. 무첨당 뒤 언덕에 오르면 경산서당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내려가 마을을 지나면 서백당(맨 오른쪽 사진)을 만날 수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서백당과 무첨당 사이에는 양동마을 내 가장 높은 언덕배기의 삼거리가 있다. 이곳까지 허위허위 올라온 부지런한 답사자도 웬만해서는, 수운정을 버리고, 서백당이나 무첨당으로 발걸음을 한다. 그것이 이른바 '군자대로'이기 때문이다. 다른 길들은 좁거나 가파르고,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까닭이다.

수운정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는 삼거리에서 들판까지 내려가라고 말한다. 갔다가 되돌아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오라고 말한다. 게다가 수운정은 그 삼거리 오르막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탓에, 많은 답사자들은 수운정 관람을 포기하거나, 혹은 처음부터도 알지 못했던 까닭에 놓치고 만다.

양동마을에 쳐들어 온 왜군들도 수운정은 발견하지 못했을 듯하다. 지금처럼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설혹 들판까지 내려갔다 하더라도 수운정은 거기서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운정은 거기서 다시 높은 봉우리 위, 큰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다. 이성계의 얼굴을 모신 참봉들이 하룻밤 정도는 충분히 숨어 지낼 만한 멋진 은신처인 것이다.

수운정 주인 손엽은 임진왜란 때 화왕산 의병 참전

게다가 집주인 손엽(孫曄)이 임진왜란 의병장이었으니 수운정은 더 더욱 태조의 어진이 머물기에 적합하였으리라.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 보고서 경주 양동마을 2>(경주시청, 2011)에 따르면 손엽은 '(곽재우 중심의) 화왕산 회맹(會盟, 모여서 맹세함)에 달려가 의병에 참여하여 전략을 세우고 군량미 조달에 협조'하였는데, 종전 후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자 받지 않고 수운정에서 학문에 매진하다가 타계했다.

그는 '물처럼 맑고 구름처럼 허무하다(水淸雲虛)'는 뜻에서 집 이름을 수운당이라 지었다. (경남) 창녕 의병장 조호익(曺好益)은 묘지명(墓誌銘, 묘소 앞 비석에 새긴 글)에 '덕의 광채가 아름답고, 도의 살찌움이 빛나는구나!' 하고 썼다.

동해에서 경주로 넘어오는 추령 오른쪽 함월산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있는 기림사의 일주문
 동해에서 경주로 넘어오는 추령 오른쪽 함월산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있는 기림사의 일주문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주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추령 고개는 하늘이 주신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뜻한 바가 큰 사람은 누구든지 이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문왕도 아버지 문무왕을 기려 감은사를 지었던 682년 이 고개를 넘나들었고, 심지어는 왜적들도 이 길을 지났다.

1238년 황룡사 대종을 훔친 몽고군들도 이 고개를 넘었다. 적들은 추령에서 흘러 동해까지 이어지는 물길로 대종을 운반하려 했다. 하지만 어찌 하늘이 그런 대도(大盜, 큰 도둑)를 용서할 것인가. 배는 풍랑에 엎어졌고, 큰 종이 가라앉은 물길은 그때부터 대종천(大鐘川)이라 불리게 되었다.

쉽사리 그 존재를 예측할 수 없는 깊은 산속의 기림사

기림사는 추령 아래 대종천 일원에서도 아주 구석진 산골 속에 있다. 동해에서 추령으로 나아가는 도로변에서도 500m나 안으로 들어간 좁고 깊숙한 골짜기 가운데에 있다. 특히 절 쪽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좁아 도로에서는 골짜기 안에 거대한 사찰이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다.

기림사도 임진왜란 때 소중한 서책과 문서들이 피란을 왔던 곳이다. 사진은 기림사 진남루(문화재자료 251호). 이름에 쓰인 진(鎭)은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가 승병이나 수군의 주둔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준다.
 기림사도 임진왜란 때 소중한 서책과 문서들이 피란을 왔던 곳이다. 사진은 기림사 진남루(문화재자료 251호). 이름에 쓰인 진(鎭)은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가 승병이나 수군의 주둔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준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기림사는 보물 958호 삼존불상, 보물 415호 건칠보살상, 보물 959호 고려 금은자사경(金銀字寫經), 보물 833호 대적광전, 유형문화재 241호 웅진전, 문화재자료 251호 진남루, 문화재자료 301호 소장 유물들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신라 고찰이다. 기림사는 자체 유물전시관도 보유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경주>는 '(기림사에) 이렇듯 많은 유물이 전래질 수 있었던 것은 기림사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전쟁이나 기타 재화(災禍)를 면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임진왜란 때에도 경주 사람들은 기림사에 소중한 문화재를 숨겼고, 그때 이후 기림사에는 경주부의 전적(典籍, 책)들이 유물전시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경주부의 귀한 책과 문서들을 기림사로 피란시킨 최락

경주부 서리(胥吏) 최락(崔洛)은 증조할아버지 이래 경주부 호장(戶長, 세습 성격의 지방 관청 토착 하급 관리들의 대장)을 지낸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전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지리지> <경상도 속찬 지리지> <도선생(관찰사)안> <부선생(경주부윤)안> <호장선생(향리의 대장)안> <신라 시조 세계 족보> 등 경주 지역의 주요 문건들을 무장산 깊은 동굴 속에 숨겼다가 다시 기림사로 옮겼다. 그리고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본주(本州, 경주)는 바로 신라의 고도(古都, 옛 서울)로서 옛부터 유전하던(전해져 온) 고적(古蹟, 옛 문화유적)이 모두 병화(兵火, 전쟁)에 망실되고(없어지고) 오늘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본도(경상도)지리지와 속지리지, 영주(營主, 관찰사)선생안, 부윤(경주시장)판관(대략 부시장)선생안, 신라시조 세계족보 등 약간뿐이다.

당시 급란(急亂, 경주 함락)을 당하던 날 내가 이 보적(寶籍, 귀한 책)을 갖고 나와 굴을 파고 깊이 묻어 두었다가 적이 물러간 뒤 다시 깊숙한 산사(山寺, 기림사)에 옮겨 두어 마침내 화재를 면하였다. 이로써 후세에 전하여 고금(古今, 과거와 현재) 연혁(沿革, 역사)의 자취를 잇게 되었으니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동경통지> 권12 수행조, <경주부의 임란항쟁사>에서 재인용)

최효식은 <경주부의 임란항쟁사>를 통해 '이같이 문적이 보전된 후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 문적 보관에 더욱 관심이 고조되었던 것'이라며 최락에게 큰 찬사를 보낸다. 1919년에 간행된 <기림사 완의(完議)>에 따르면, 실제로 경주사람들은 최락의 예를 본받아 기미독립선언 때에도 여러 문적들을 새로 만들어 기림사, 불국사 등 산사에 보관했다. 최락은 상찬받아 마땅한 업적을 쌓았다는 말이다.  

성균관 수준으로 지어진 경주향교는 경주의 조선 시대 위상을 잘 말해주는 건물이다. 사진은 경주향교 대성전
 성균관 수준으로 지어진 경주향교는 경주의 조선 시대 위상을 잘 말해주는 건물이다. 사진은 경주향교 대성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주향교 또한 조선 시대 경주 선비들의 큰 기림을 받았던 곳이다. 경주향교에는 공자 이하 조선의 통치 이념을 이루는 성리학의 상징적 인물들이 위패로 모셔져 있었다. 경주향교는, 신라 천년의 서울이었던 경주의 위상에 걸맞게, 처음부터 국가의 중앙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거의 대동소이한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경주향교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공자를 한 가운데에, 그리고 그 좌우에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네 분을 모셨다. 이 다섯 분을 흔히 5성(五聖)이라 한다.

5성 좌우에는 안회 등 공문10철(孔門十哲)이라 부르는 공자의 제자 10분과, 주희 등 송조6현(宋朝六賢)을 각각 반씩 나누어 그 위패를 모셨다. 이 역시 성균관과 똑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경주향교는 스스로 성균관에 맞먹는 교육기관임을 자부했던 것이다.

성균관은 한국18현(韓國十八賢)이라 하여 공자의 위패 왼쪽에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의 아홉 분, 오른쪽에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의 아홉 분을 모셨다. 그러나 경주향교는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네 분을 모셨다.

성균관 누리집의 '성균관의 역사' 축약
성균관(成均館)의 의미
고려 말과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이름이다. 성균은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 24년(1298) 성균감(成均監)이 되고, 충선왕 원년(1308) 성균관이 되었다. 공민왕 5년(1356)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 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 때는 개성, 조선 때는 현재 자리에 위치했다. 태조 7년(1398) 건물이 지어져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학제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입학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불렀다. 생원ㆍ진사가 아닌 재학생도 있었는데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 소학에 능통한 자 등)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불렀다. 정원은 초기에 200명이다가 뒷날 100명으로 축소되었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에 상한선은 없었다.

교과과정 및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쳤다. 대학(1달), 논어(4달), 맹자(4달), 중용(2달), 시경(5달), 서경(5달), 주역(7달) 순서로 정밀하게 가르치고 배웠고, 그 외 춘추(5달)와 예기(7달)를 학습햇다. 이를 마치면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初試)를 보게 하였다. 노장(老莊)ㆍ불경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게 했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개별 지도에 치중했으며,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문묘와 교육시설
성균관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 선조 34년(1601) 재건에 착수, 6년 후 대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도 그 내용이 같았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4성,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나라 6현(賢)을 모셨고, 동ㆍ서무(東ㆍ西廡)에는 주ㆍ한ㆍ진ㆍ당ㆍ원ㆍ송나라 94위(位)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 뒤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봉향하고 있다.

경주향교 유생들이 공자 등 선현들의 위패를 모셔들고 가서 숨겼던 옥천서원 뒤 도덕산 정상부의 도덕암(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71-3). 임진왜란 당시 이름은 두덕암이었다.
 경주향교 유생들이 공자 등 선현들의 위패를 모셔들고 가서 숨겼던 옥천서원 뒤 도덕산 정상부의 도덕암(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71-3). 임진왜란 당시 이름은 두덕암이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주향교 교생들이 공자 등의 위패를 처음 숨겼던 금곡사(경주시 안강읍 두류길 758). 대웅전 앞에 보이는 석탑이 일반 탑이 아니라 원광대사 부도탑(문화재자료 97호)이라는 점이 특이한 사찰이다.
 경주향교 교생들이 공자 등의 위패를 처음 숨겼던 금곡사(경주시 안강읍 두류길 758). 대웅전 앞에 보이는 석탑이 일반 탑이 아니라 원광대사 부도탑(문화재자료 97호)이라는 점이 특이한 사찰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임란 당시 박언수는 박혁거세왕의 위패를 모셔와 (무열왕릉 바로 뒤) 선도산에 숨겼다. 사진은 선도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는 마애삼존불(사진의 왼쪽 절벽, 보물 65호)과 선도산 신모(神母)를 제사 지내는 성모사
 임란 당시 박언수는 박혁거세왕의 위패를 모셔와 (무열왕릉 바로 뒤) 선도산에 숨겼다. 사진은 선도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는 마애삼존불(사진의 왼쪽 절벽, 보물 65호)과 선도산 신모(神母)를 제사 지내는 성모사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전란이 일어나자 경주향교 교생(校生, 학생) 여덟 명은 대성전 등에 모셔져 있는 위패들을 받들고 금곡사(金谷寺)로 달려갔다. 그래도 문응성, 박이순, 박이숙, 이기종, 이집, 손응벽, 이시인, 이시립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9월 들어 다시 옥천서원을 거쳐 아득한 두덕암(斗德庵)까지 위패를 받들고 올라갔다. (두덕암은 옥천서원 뒤 도덕산 정상부에 있는 암자로, 지금은 도덕암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1600년(선조 33) 경주부윤 이시발은 부랴부랴 경주향교 대성전을 중건했다. 그리고 두덕암에 피란 가 있던 위패들을 다시 모셔와 봉안했다. <경주부의 임란항쟁사>는 '신라시조왕묘(王廟, 혁거세왕을 모시는 사당)의 위판(位版,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조각으로 위패와 같은 뜻)을 받들고 부(경주)의 서편 7리에 위치한 선도산(무열왕릉 뒤편)에 숨겨 온전하게 보전한 박언수(朴彦秀) 등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성주읍성 서문이 있던 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 성주여고 정문 앞 쌍충각(임진왜란 충신 제말, 제홍록 장군을 기리는 비) 담장을 뒤로 한 채 서 있다. 성주에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한 사고(史庫)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테 타 버렸고, 지금은 그 위치도 확인할 수 없다.
 성주읍성 서문이 있던 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 성주여고 정문 앞 쌍충각(임진왜란 충신 제말, 제홍록 장군을 기리는 비) 담장을 뒤로 한 채 서 있다. 성주에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한 사고(史庫)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테 타 버렸고, 지금은 그 위치도 확인할 수 없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임진왜란의 피바람 속에서도 '역사'를 지키려고 해썼던 경주사람들의 노력을 살펴보았다. 책, 문서, 그림 등을 부여안은 채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넌 사람들의 노고가 쌓여 인류의 역사가 후대에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귀한 실화들이다. 전주사고(史庫, 역사책을 보관하는 창고)의 <조선왕조실록>을 1592년 6월 22일 내장산으로 옮겨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당당히 올린 손홍록, 안의, 오희길, 유신 등보다 더 큰 업적을 세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주사람들의 이름 또한 국사에 뚜렷하게 새겨넣어야 마땅하다.

성주사고의 처참한 일을 기억하자. 전라북도 전주, 충청북도 충주와 더불어 경상북도 성주에는 조선 시대의 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당해 부랴부랴 실록 궤(櫃, 상자)들을 땅에 파묻었지만 일본군은 그것을 끄집어내어 불살랐다. 그 결과 지금은 사고가 있었던 터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런 뜻에서, 경주향교와 양동마을 수운정은 물론 산 정상까지 이르는 가파른 산길을 걸어 도덕암과 성모사에도 가보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계곡을 지나 금곡사도 찾아본다. 규모가 큰 도서관에 가도 일반 열람실에는 없고 현대식 사고인 '저장고'에서 직원이 꺼내와야만 볼 수 있는 <경주선생안>도 읽어본다. 이 책을 안은 채 함월산 계곡을 부랴부랴 뛰었던 임진왜란 당시 경주 선비들의 얼굴이 글자 사이사이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태그:#수운정, #금곡사, #도덕암, #경주향교, #성주사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