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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합천창의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합천임란창의사적비
 경남 합천의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합천창의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합천임란창의사적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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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병들의 후방 공격에 시달리느라 일본군은 큰 병력을 전방에 집결시키지 못했다."
(2) "조선 사람들은 한 것이 없다.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 덕분이다."

(1)과 (2)는 각각 누구의 말일까? 대상이 너무 넓다면, '선조'와 '일본'으로 좁혀서 생각해 보자. 선조는 (1)과 (2) 중 어느 발언을 했을까? 하나가 선조의 발언이라면 다른 하나는 일본 측의 발언인데, 과연 어느 쪽이 일본의 생각일까?

상식적으로, 선조는 (1)과 같이 말했을 듯하다. 의병들의 활약 덕분에 일본군은 군사력을 더 이상 북쪽으로 집결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1)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선조는 1601년 3월 17일 (2)를 말했다.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것이 없다,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명나라 덕분"이라고 단정했다. 합천창의사의 <합천임란사 2집>은 이를 두고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에게 돌림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라고 선조를 비판하고 있다.

선조가 관군·의병의 업적에 인색했던 속사정

물론 선조가 그런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1601년 3월 17일 하루만이 아니다. <선조실록> 1603년 2월 12일자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장사(將士, 장군과 병사)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을 몰아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수공(首功, 제일 큰 공)이고 그 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찰 뿐 나머지는 (그럴 듯한 공을 세웠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간혹 잘했다고 하는 자도 겨우 성 하나를 지킨 데 불과하다"라는 선조의 망언(?)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게다가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공신을 임명할 때에도 조선 관군과 의병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하게 나왔다. 1604년 3월 6일자 <선조실록>에 보면 선조는 자신과 함께 압록강까지 피란을 갔던 사람들과 직접 왜군과 전투를 한 장졸들, 그렇게 두 종류로 공신을 구분하라면서 "호종(扈從)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갔던 사람이고, 정왜(征倭)는 세 대장(이순신, 원균, 권율) 외에는 기록할 만한 자가 별로 없다" 식으로 말한다. 선조의 이 발언은 그 후에도 <선조실록>에 계속 등장한다.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정인홍이 김면, 박성, 곽준, 곽율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해 적을 토벌했으며, 손인갑이 중군장으로 무계에서 왜적을 제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합천창의사 유물관은 그 부분을 펼쳐서 보여주고 있다.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정인홍이 김면, 박성, 곽준, 곽율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해 적을 토벌했으며, 손인갑이 중군장으로 무계에서 왜적을 제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합천창의사 유물관은 그 부분을 펼쳐서 보여주고 있다.
ⓒ 합천창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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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박했던 임진왜란 초기에는 선조도 의병들에게 감지덕지했다.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전쟁 발발에 대비를 하지 않았던 탓에 압록강 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선조가 "나라의 목숨이 의병들 덕분에 유지되었다"라고 토로하는 대목을 보여준다. 같은 해 11월 16일에도 선조는 "변란(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인심이 흩어졌는데 의사(義士)들이 한 번 창의(倡義)하자 군민(軍民)이 호응하여 국가가 오늘날까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의병들의 힘이었습니다"라는 사간원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야 의병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딴청을 부린다. 1601년 3월 14일자 <선조실록>은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사들의 은혜다, 우리 장수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패잔병의 수급을 얻었을 뿐 적장의 머리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한 적이 없었다,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다소 나을 뿐이다, 명군이 들어오게 된 것은 모두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명나라에 호소한 덕분이다, 그 공로로 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라며 의병과 조선군을 멸시하는 선조의 본얼굴을 보여준다.

선조보다 오히려 일본이 제대로 평가한 의병들의 활약

의병들의 활약을 제대로 평가한 (1)의 발언은 (또, 뜻밖에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나왔다. 합천창의사 간행 <합천임란사 2집>은 '의병을 일으킨 자들로 전라도에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의 무리가 있고, 경상도에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의 무리가 있으며, 충청도에는 조헌 및 승려 영규 등이 있어, 때로는 산과 숲에 모여 있고, 때로는 우리(일본)의 수비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들의 전투는 모두 서로 연결되지 못해 단편적이기는 했지만 아군의 후방을 걱정스럽게 하여 대병(大兵)을 전방에 집결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라는 일본군 참모본부의 기록을 보여준다. 이 기록은 일본군 참모본부가 1924년에 출간한 <일본 전사(日本戰史) 조선역(朝鮮役, 임진왜란) 본기(本記) 부기(附記)>에 실려 있다.

합천창의사 유물관에서 보는 의병 장수의 복장. (왼쪽) 관리가 되었을 때의 관복 (오른쪽) 전투복
 합천창의사 유물관에서 보는 의병 장수의 복장. (왼쪽) 관리가 되었을 때의 관복 (오른쪽) 전투복
ⓒ 합천창의사 유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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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의병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칼을 들었고, 또 어떤 공을 세웠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합천창의사의 합천임란창의사적비문(陜川壬亂倡義事績碑文)을 읽어본다. 합천임란창의사적비문은 '경상남도 합천에서 임진왜란 때 일어난 의병들의 일을 기록한 비석의 글'이므로 의병들의 생각과 활동을 알아보는 데 아주 적격일 듯하다. 다만 실제 비석에서 글자를 다 해독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합천임란사 2집>에 게재되어 있는 전문을 읽는다.

'나라가 평화로우면 뜻을 펴서 그 번영에 힘쓰고, 어지럽거나 위태로우면 분연히 일어서서 그 수습에 신명(身命, 몸과 목숨)을 바친다. 국가에 흥망(興亡, 발전과 멸망)이 있고 민족에게는 성쇠(盛衰, 성장과 쇠약)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땅 합천 고을의 사람들은 역사의 고비마다 악선호의(樂善好義)하는 미덕(美德, 아름다운 행동)으로, 내 나라 내 겨레 내 고장을 온몸으로 가꾸고 다듬고 지켜왔다.'

의병이 된 것은 착하고 의로운 성품 때문

기꺼이 의병이 된 것은 악선호의, 즉 착한(善) 것을 즐기고 옳은(義)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는 선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합천의병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조식의 <남명집>에 나온다.

조식과 경상우도 의병장들

경상남도 의령군 의병박물관은 '경상우도 의병 활동의 특징' 중 한 가지로 '경상우도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 출신'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합천이 경상우도의 일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합천의병장들의 스승은 당연히 남명 조식이다.

조식은 안동의 이황과 나이가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출생했다. 이황은 선조 4년인 1571년, 조식은 그 이듬해인 1572년에 타계했다. 70 평생을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1564년 9월 18일 조식은 이황에게 <여퇴계서(與退溪書)>라는 편지를 보낸다. 스스로를 '못난 동갑내기'로 자칭한 조식은 이황에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近見學者)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것도 모르면서(手不知灑掃之節)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고(而口談天理)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計欲盜名)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而用以欺人), (중략)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十分抑規之如何)" 하고 말한다.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하게 하고, 글을 미사여구로 꾸미는 일에만 관심이 많은 제자들을 경계하자는 뜻이다. 편지 속 조식의 생각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 벼슬 하지 않은 선비)라고 하면 옳지만 유자(儒者,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로 지목한다면 사실에 어긋한 것이다"라고 했던 말과 뜻이 같다. 이이가 <석담일기>에 조식의 이 말을 실은 것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선비다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조식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뇌룡정 복원 건물이 합천군 삼가면 오토리에서 답사자를 기다리고 있다.
 조식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뇌룡정 복원 건물이 합천군 삼가면 오토리에서 답사자를 기다리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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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기본적으로 <논어>가 규정한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거한다.(用之則行 舍之則藏)'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들은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은거(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했다. 따라서 유자들은 학문의 목표를 수기치인(修己治人)에 둔다. 자기 수양을 하고, 이윽고 백성들을 다스리러 벼슬길에 나아간다. 출사(出仕)를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조식은 스스로 유자가 아니라 처사라 했다. 실제로 그는 벼슬하지 않는 선비, 즉 처사로 평생을 살았다. 조식은 벼슬은 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바른 말만은 서슴없이 하는 선비,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진정한 처사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박균섭의 <선비 정신 연구>가 조식을 두고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처사'로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가짜 선비가 아닌 '행동하는 양심'을 지향

그러므로 조식의 제자들,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의 선비들이 임진왜란 발발 즉시 창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합천창의사 유물관의 게시물 중 '의병 활동의 사상적 기반'에 기록되어 있는 표현을 따르면 그들의 즉각적인 창의는 '반궁실천(反窮實踐: 몸을 반성하여 실천함)'을 서슴없이 행동으로 보여준 일일 뿐이었다. 착한 것을 즐기고 옳은 것을 좋아하는 합천 사람들의 기질이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어려움을 맞아 고스란히 실행된 것이었다.

함천창의사 경내의 합천임란창의기념탑 (위) 정면에서 본 모습 (아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뒷모습
 함천창의사 경내의 합천임란창의기념탑 (위) 정면에서 본 모습 (아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뒷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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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사람들은 나라의 고비마다 내 나라 내 겨레 내 고장을 온몸으로 가꾸고 다듬고 지켜왔지만) 그중에서도 고을 안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섬나라 오랑캐의 침입에 항거한 임진왜란은 피눈물로 되새겨지는 민족의 수난이 아닐 수 없다. 임진 정유 7년전쟁이라고도 하는 이 사상(史上, 역사에서) 미증유(未曾有, 일찍이 없었던)의 전쟁은 조선 왕조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14일 부산진성에 이어 이튿날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마치 질풍(疾風, 미친 바람)처럼 드센 기세로 이 나라 강산을 짓밟으면서 북상(北上, 북쪽으로 올라감)했지만 우리의 관군(官軍, 정부의 군대)은 가랑잎마냥 맥없이 패주(敗走, 져서 도망)만 거듭했다. 1백여 년 동안 군웅할거(群雄割據, 여러 영웅들이 여기저기 버티고 있음)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 통일 이전, 작은 나라들이 온통 전쟁을 한 시대)를 거치면서 왜인들은 살상(殺傷, 죽이고 다치게 함)의 전쟁에서 단련된 집단전술(集團戰術, 군사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움직이는 전투 방법)과 신무기(新武器, 새로운 무기)인 조총(鳥銃,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총)으로 무장한 모두 9개 군단(軍團, 큰 규모의 군대) 15만9천 명이 이 땅에 상륙하였는데, 수군과 후방 예비 병력까지 하면 30만5천 명에 이르는 공전(空前, 전에 없었던)의 대병력이 총동원되었다.

이에 비해 우리는 태평연월(太平烟月, 평화 속에서 밥 짓는 연기와 달구경을 즐김)을 구가(謳歌, 즐기고 노래함)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키움)을 소홀히 하여 전쟁 태세(態勢, 움직일 수 있는 자세)를 전혀 갖추지 못한 형편이었다. 관군이 무너지자 민중(民衆, 권력을 가지지 아니한 일반 백성)이 일어섰다. 선비는 붓을 던지고 농부는 괭이를 팽개치고 창과 칼을 잡고 싸움터로 달려갔다. 이것이 의병(義兵, 의로운 일을 위해 스스로 군인이 된 사람, 관군의 반대)이다. 의병은 온 나라 안에서 합천이 가장 먼저 규모를 갖춰 일어났다.'

합천 의병이 나라 안에서 '가장 먼저 규모를 갖춰 일어났다'라는 대목은 유심히 읽어야 할 부분이다.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켰다는 말이 아니라 '규모를 갖춘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켰다는 뜻이다. 규모를 갖추었다는 표현은 병사의 숫자, 조직 수준, 무기와 군량미 확보 등 모든 면에서 일본군과 맞서싸울 충분한 태세를 정비했음을 의미한다.

전국 의병의 반 이상이 경남에서 창의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를 통해 1593년 1월 당시 의병 부대들의 주둔지와 병력수를 확인해 본다. 이 자료는 '조선의 현재 병력과 주둔지를 보고하라'는 명의 요구에 따라 1월 11일 회신된 것이다. 관군 관련 내용은 생략하고, 알아보기 쉽게 1천 명 이상의 의병이 포진한 지역과 의병장들의 명단만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경상도 
창령현(경남 창녕군) 의병장 성안의 1000
영산현(경남 영산군) 의병장 신신    1000
합천군(경남 합천군) 의병장 정인홍 3000
의령현(경남 의령군) 의병장 곽재우 2000
거창현(경남 거창군) 의병장 김면    5000

경기도
평택현(경기 평택시) 의병장 수백명 5000
강화부(경기 강화도) 창의사 김천일 3000
                            의병장 우성전 2000

<신편 한국사>는 '각처에 봉기하여 향토를 지키고 있는 많은 의병들을 이 보고에서 제외시켰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라면서 '여기에 등재된 의병장은 지명도가 높고 일본군과 전투를 경험한 부대'로 추정한다.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경기도 양근군의 600 의병과 평안도 법흥사의 300 의병까지 합산할 때 전국 의병은 약 2만 2900명으로, 그중 절반 이상인 1만2천 의병이 남명학권(南冥學圈, 남명과 그 제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인 경남 북부 일원이다. 이만하면 조식의 고향인 '합천이 가장 먼저 규모를 갖춰 의병을 일으켰다'는 말은 어김없는 진실이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 합천군 가야면 면소재지의 부음정. 정인홍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 합천군 가야면 면소재지의 부음정. 정인홍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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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을 안의 선비들이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사방에 격문(檄文, 옳은 일을 위해 함께 나서자는 뜻을 담은 글)을 띄웠다. 경(敬, 도덕적 정신을 뜻하는 유학 개념. 존중, 예의, 정중, 근신 등)과 의(義, 사회의 공통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는 착한 행동)를 주지(主旨, 주된 뜻)로 하는 실천 유학(實踐儒學, 말로만이 아니라 말한 대로 실천하는 유학)의 거유(巨儒, 큰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 수제자)인 정인홍은 장령(掌令, 현대의 감사원, 검찰청, 법원 등을 합쳐놓은 듯한 조선 시대 사헌부의 고급 간부. 종2품 대사헌, 종3품 집의, 정4품 장령, 정5품 지평)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동문(同門, 같은 스승을 모시는 선비들)인 곽율, 김면 등과 뜻을 같이하고 합천을 비롯하여 초계, 삼가, 거창, 안음, 함양, 고령, 성주 등 이웃 고을에 통문(通文, 알리는 글)을 보내자 그의 문인(門人, 제자 및 학문적 벗)인 박이장(朴而章), 하혼(河渾), 권양(權瀁), 조응인(曺應仁), 문홍도(文弘道) 등을 핵심으로 본군(本郡, 합천군) 의병만 해도 1천6백여 명의 장정이 모여들었다.'

정인홍 등이 합천 의병 창의를 처음 논의한 곳인 소학당 왼편의 사당 화산사 앞에 가면 권양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빗돌도 볼 수 있다. (사진의 가장 오른쪽)
 정인홍 등이 합천 의병 창의를 처음 논의한 곳인 소학당 왼편의 사당 화산사 앞에 가면 권양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빗돌도 볼 수 있다. (사진의 가장 오른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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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의 경상도 관찰사는 현재의 부산, 대구, 울산, 경북, 경남 전체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진 고위 관료였음) 김수(金晬)는 합천, 삼가, 고령, 성주 등 5읍 군대를 그에게 소속시켜 주었고,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보내 중위장(中衛將, 가운데를 지키는 장수란 뜻으로, 실질적 지휘권을 가진 무장)으로 삼도록 했다.

후에 고령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휘하(麾下, 아래)에 들어왔고, 초유사(招諭使, 전쟁 중에 임금을 대신하여 의병을 독려하고 고을 수령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수행한 고위 관료)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정인홍은) 김면과 더불어 의병대장의 직책을 부여 받았으며, 의령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영남 3대 의병대장의 일컬음을 듣게 되었다.

초계와 삼가에서도 의거(義擧, 의병을 일으킴)를 했으니, 초계에서는 5월 초순에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고, 삼가에서는 윤탁(尹鐸), 윤선(尹銑) 종형제(從兄弟, 사촌 형제), 박사제(朴思齊) 등이 앞장서서 모병(募兵, 군사를 모음)을 하고 군량(軍糧,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았다.'

(왼쪽) 1918년 간행된 손인갑의 문집 <후지당실기>와 (오른쪽) 1934년 간행된 이대기 의병장의 시문집 <설학선생실기>. 두 사진은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 전시물을 찍은 것이다.
 (왼쪽) 1918년 간행된 손인갑의 문집 <후지당실기>와 (오른쪽) 1934년 간행된 이대기 의병장의 시문집 <설학선생실기>. 두 사진은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 전시물을 찍은 것이다.
ⓒ 의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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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하순에 이르러 정인홍 의병군은 3천 명 정예(精銳, 능력이 뛰어난 인원) 군사를 헤아리는 전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전치원, 이대기, 고령의 김응성, 성주 일원을 지키는 문려(文勵), 이홍우(李弘宇) 등 의병장과 연계하면서 경상우도(慶尙右道,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일대의 토적(討賊, 적을 토벌함) 작전을 총괄(總括, 전체를 거느림)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더 읽어보면, 사적비문은 정인홍 중심의 합천 의병이 임진왜란 때 세운 업적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말해준다. 첫째, 왜적이 낙동강을 통해 병사와 군량을 실어나르는 것을 차단했다. 둘째, 왜적이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셋째, 대규모로 창의했고 또 승전함으로써 전국적으로 많은 의병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넷째, 장기간 왜적과 전투를 벌임으로써 관군이 다시 일어서고 명나라 군대가 당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명나라 덕분'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원문을 자세히 읽어본다.    

경상우도와 경상좌도의 경계가 된 낙동강의 2016년 평화로운 풍경. 그러나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살벌한 전투 장소였다.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경상우도 의병들은 왜군을 이 일대에서 줄곧 격퇴함으로써 일본이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큰 공을 세웠다. 사진에 보이는 끝부분 두 산 사이를 돌라들면 김면 의병군의 승전지인 개진포가 나온다.
 경상우도와 경상좌도의 경계가 된 낙동강의 2016년 평화로운 풍경. 그러나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살벌한 전투 장소였다.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경상우도 의병들은 왜군을 이 일대에서 줄곧 격퇴함으로써 일본이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큰 공을 세웠다. 사진에 보이는 끝부분 두 산 사이를 돌라들면 김면 의병군의 승전지인 개진포가 나온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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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의병은 내 고장만 지킨다는 방어 위주의 태세에서 한 걸음 나아가 험준한 경상우도의 지형지물(地形地物, 땅의 모양과 산, 강 등 자연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이 땅에서 침략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적극적이고 전술적인 차원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공을 세웠는데) 첫째, 적군의 생명선(生命線, 생명을 이어주는 선. 왜적들이 낙동강으로 군량과 병사들을 수송했다는 의미)인 낙동강 수로(水路, 물길)를 차단하고, 둘째, 곡창(穀倉, 곡식 창고. 호남 일대가 넓은 평야로 이루어졌음을 가리킴) 지대인 호남(지금의 전라남도 일원)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군의 사기를 꺾으며 격멸(擊滅, 공격하여 없앰)하는 데 주력(主力, 주로 힘을 씀)했다.

아울러 전국 의병 창기(倡起, 의병을 일으킴)의 효시(嚆矢, 최초)가 되고, 패퇴(敗退, 져서 물러남)만 거듭하던 관군의 반격 태세를 갖추게 하는 동시에, 명나라 지원군이 도래(到來,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여, 전세를 역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은 <경상우도 의병 활동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경상우도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 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과, '경상우도의 눈부신 의병 활동은 다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을 자극시키는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일본군의 전라도에 대한 공략을 소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은 <경상우도 의병 활동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경상우도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 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과, '경상우도의 눈부신 의병 활동은 다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을 자극시키는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일본군의 전라도에 대한 공략을 소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 의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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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투를 들어보면, 무계진 전투, 사원동 복병 전투, 초계 전투, 현풍 전투, 안언역 전투, 진주성 지원 작전, 반년에 걸친 성주성 수복(收復, 되찾음) 작전, 나아가 개령의 7번대 본진(本陣, 군대의 본부) 공위(攻圍, 공격하여 포위함) 작전 등 수많은 싸움터에서 막강한 왜군을 맞아 오직 결사 항쟁(決死抗爭,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움)하여 당당하게 전투에 임해 놀라운 전과(戰果, 전투의 성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는 전국적으로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가 전무(全無, 전혀 없음)함에도 유일(唯一, 하나뿐)하게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 기병(起兵, 군사를 일으킴)하여 구원차 도래한 명군(明軍, 명나라 군대)의 향도(嚮導, 길잡이)가 되어 작전을 원만하게 수행하도록 지원하였으며, 7년전쟁을 통해서 엄청난 문물을 약탈당했으나 끝내 이 고장을 방위하여 세계적 문화유산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전화(戰火, 전쟁의 피해)와 약탈에서 온전하게 지켜내었다.' (합천의병의 팔만대장경 수호 공로에 대해서는 이전 기사 '폭격 명령 거부하고 끝내 팔만대장경 지킨 군인' 참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보관 장소인 장경판전의 담장(왼쪽 사진)과, 담장의 문을 지나 장경판전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음)의 모습. 합천의병에 가로막혀 왜적들은 해인사로 진입하지 못했다. 해인사 누리집에도 합천의병들이 팔만대장경을 지켜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보관 장소인 장경판전의 담장(왼쪽 사진)과, 담장의 문을 지나 장경판전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음)의 모습. 합천의병에 가로막혀 왜적들은 해인사로 진입하지 못했다. 해인사 누리집에도 합천의병들이 팔만대장경을 지켜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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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비문의 기술처럼, 정유재란 때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594년 4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그렇게 된 까닭 한 가지를 암시해준다. 선조는 '여러 도의 의병을 없애 (모두) 김덕령(金德齡)에게 소속시키도록 명하였다.' 당시 김덕령은 진주에 머물러 있었는데, '군량이 떨어지고 무리가 흩어졌으므로 (그가 통솔한 의병 부대는) 점점 군대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선조는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운 의병장들을 모두 관군에 흡수시킴으로써 군대의 명령 체계를 단일화했고,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반란도 방지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자기 재산을 팔아 의병들의 양식을 조달하고 무기를 마련해온 창의장들이 사라지자 일반 의병들은 곧장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김덕령의 의병 부대는 저절로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의병장들을 의심하고 죽이기까지 한 선조

선조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던 의병장 김덕령을 반란 음모 혐의 누명을 씌워 직접 고문까지 한 끝에 죽였다. 사진은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김충장공유사> 복제본. 이 책은 1796년 간으로, 김덕령의 행적과 시문을 수록하고 있다.
 선조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던 의병장 김덕령을 반란 음모 혐의 누명을 씌워 직접 고문까지 한 끝에 죽였다. 사진은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김충장공유사> 복제본. 이 책은 1796년 간으로, 김덕령의 행적과 시문을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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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선조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의병장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1594년 1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의병을 해체하지 않는 속뜻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이 죽임을 당하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같은 책 1596년 8월 1일자에도 김덕령이 선조의 고문 끝에 죽으니 '그의 죽음을 들은 왜인들이 기쁜 얼굴로 서로 치하'하였으며, 조선 사람들도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덕령의 일을 되새기며 용력(勇力, 큰힘)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라는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합천의병은 정유재란 때에도 창의를 했다. 본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직후 의병을 많이 일으키기 위해 창의를 하면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이후부터는 의병을 해체하려는 다른 목적에서(관군에 흡수시키기 위해) 관직을 주었다.

백성들의 큰 지지를 얻는 의병장이 생기는 것을 우려해야 하는 임금의 입장에서는 '관군이 정비된 이후에는 의병의 통제가 절실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인홍은 '관직이 주어져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도 유일하게 경상우도에서 향병장(의병장)이 되었다.' (이 문단의 작은따옴표 속 내용은 경남 의령 의병기념관 게시물의 표현.)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직후에는 의병을 많이 일으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면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부터는 의병을 해체하기 위해(관군에 흡수시키기 위해)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정인홍은 '관직이 주어져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도 유일하게 경상우도에서 향병장이 되었다.' (경남 의령 의병기념관의 게시물 중에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직후에는 의병을 많이 일으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면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부터는 의병을 해체하기 위해(관군에 흡수시키기 위해)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정인홍은 '관직이 주어져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도 유일하게 경상우도에서 향병장이 되었다.' (경남 의령 의병기념관의 게시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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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00여 년, 세계 전사상(戰史上, 전쟁 역사에 있어) 유례(類例, 비슷한 일) 없는 참혹한 국제 전쟁(國際戰爭, 세 나라 이상이 참여한 전쟁)인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우리의 조상님들이 얼마나 의롭게 싸웠던가를 되새겨 보는 모임을 가졌다. 뜻있는 몇몇 분이 앞장서서 합천임란창의기념사업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 모임이 주동이 되어 돌을 깎아 내력(來歷, 이어져 온 역사)과 공훈(功勳, 공로와 업적)을 새기고, 사당(祠堂, 제사를 지내는 집)을 지어 창의장(倡義將, 의병장)과 의사(義士, 의로운 사람)님 100위(位, 100명의 성함을 적은 작은 나뭇조각)와 아울러 황량한 전장(戰場, 싸움터)에서 이름 없이 산화(散華, 목숨을 바친)한 무명(無名, 이름 없는) 의사님들의 충혼의백(忠魂義魄,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을 봉안(奉安, 받들어 모심)하게 되었다.

'조국이 흥망의 기로(岐路, 갈림길)에 선, 그날 오직 갈충보국(竭忠報國,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음) 살신성인(殺身成仁, 자신을 희생하여 옳은 일을 이룸)의 불꽃으로 활활 타올라, 민족정기(民族正氣, 민족의 올바른 기운)를 선양(宣揚, 널리 떨쳐 이름나게 함)하시고, 나라와 겨레의 수호신(守護神, 지켜주는 신)이 되신 영령(英靈, 꽃다운 넋)들이시여! 부디 만세(萬世, 영원)토록 이 나라, 이 겨레, 이 고장을 지켜 주시옵소서.

왜적을 물리친 지 400돌이 되는 1998년 한로절(寒露節,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로 대략 양력 10월 8일, 9일 무렵) 성균관장 국제유학연합회 이사장 최근덕(崔根德) 삼가 짓다.'

합천임란창의사적비가 사당 창의사와 유물관 아래에 서 있다. 사당과 유물관은 이 사진에서 보이지 않은 오른쪽 높은 지대에 있다.
 합천임란창의사적비가 사당 창의사와 유물관 아래에 서 있다. 사당과 유물관은 이 사진에서 보이지 않은 오른쪽 높은 지대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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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다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 해석해가며 정독을 한 탓인지 눈에 피로가 몰려 온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도 느껴진다. 합천 지역의 의병 활동과 임진왜란의 역사에 대해 '근거'를 대가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그런데 1601년 3월 17일, 선조도 '근거'를 거론하면서 말했다. 선조는 "명나라 군대가 아니었으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非天兵之力, 倭賊豈退乎)?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중국 군대의 공이다(恢復彊土, 皆天兵之功),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我國人無所爲). 이는 내가 사실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此予據實而言也)"라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實)'에 '근거(據)'한 것임을 강조했다.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명나라 덕분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선조의 말도 '사실'에 '근거'를 둔 주장이고, 합천창의사 유물관과 의령 의병박물관의 게시물 및 합천임란창의사적비문의 내용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글이라면, 목숨을 던져가면서 왜적들과 싸운 임진왜란 의병들은 많은 공을 세웠을까, 아니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일까?


태그:#합천창의사, #정인홍, #김덕령, #임진왜란,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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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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