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합천창의사')의 유물관에 들어가면 답사자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현관 벽에 걸려 있는 '무계 전투도' 부조와 만나게 된다. 경북 고령 무계는 정인홍 의병군이 왜적을 격파했던 전투 장소이다.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합천창의사')의 유물관에 들어가면 답사자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현관 벽에 걸려 있는 '무계 전투도' 부조와 만나게 된다. 경북 고령 무계는 정인홍 의병군이 왜적을 격파했던 전투 장소이다.
ⓒ 함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필마로 옛 싸움터를 지나노라니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길게 흐르네.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누가 왜적과 강화를 말하는가?

(於今誰唱和戎說)
장사들이 그때 원통하게 죽었거늘….
(將士當年枉死亡)

유물관 관람 안내도
 유물관 관람 안내도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아래 창의사) 유물관에 들어서면 현관 정면에 걸려 있는 정인홍의 시 <과무계(過茂溪, 무계를 지나며)>가 맨 먼저 나그네를 맞이한다.

정인홍이 이 시를 지은 1595년, 평양과 서울에서 후퇴한 왜적들이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데도 조정 일부는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자고 주장했다.

배후에는 명이 있었다. 일본군이 평양성을 차지하고 있던 1592년 9월 이래 명나라가 꾸준히 제기해 온 강화 논리를 조선 대신들이 대변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인홍은 시를 지어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혼자서 지난 날 왜적과 싸웠던 (경북 고령) 무계를 지나노라니, 강물은 여전히 한을 품고 길게 흐르고 있도다. 그런데도 왜적들과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장을 한단 말인가? 원통하게 죽은 우리 장수와 군사들을 벌써 잊었는가…." 

4부로 나뉘어 있는 유물관 내부


정인홍의 시를 읽은 후 왼쪽으로 접어들어 '관람 안내'를 본다. '관람 안내'는 유물관 내부가 4부로 구성돼 있다고 말해준다. 4부의 제목은 각각 <임진왜란 발발> <항일 의병의 활약> <합천 의병의 활약> <합천 의병의 맥>. 게시물의 본문들을 보지 않더라도 임진왜란 당시 전국 상황, 전국 의병 활동, 합천 지역 의병 활동, 독립운동으로 연결된 합천 의병의 정신이 차례대로 해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현관 바로 왼쪽 벽이 <임진왜란 발발>이다. 주된 내용은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와, 지도로 보여주는 '임진왜란 상황도'이고, 조총도 진열돼 있다.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를 요약하여 읽어본다.

삼정문란
조선 정부의 재정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으로 주로 구성되었다. 전정은 매년 생산되는 곡식에 대해 공정한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제도였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소유하지 않은 땅에 세금을 거두고, 몇 배나 더 거두는 등 '전정 문란'이 심해졌다.

군정문란도 마찬가지였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았고, 군대 가는 대신 납부하는 군포(軍布)도 불법으로 면제받았다. 결국 옆집사람에게 이를 강제로 징수하고,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까지 거두는 문란 상황이 벌어졌다.

환정은 봄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뒤에 돌려받는 제도인데, 이 역시 문란해졌다. 본래 1/10만큼의 곡식을 이자로 받게 되어 있었는데 1/2까지 더 받고, 줄 때도 모래, 겨 등을 섞어 적게 주었다. 관리들이 곡식 대신 돈으로 받아 착복하기도 했다. 이를 환정문란이라 한다.

삼정문란은 전정· 군정· 환정 셋의 문란을 합친 이름이다. 삼정문란은 1811년의 홍경래 난, 1862년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임술농민항쟁 등 19세기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나라를 세운 지 200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온 조선은 '붕당(당파) 정치'에 빠져 '부국 강병을 소홀히' 한 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작은따옴표로 인용된 내용이 원문임)

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백여 년에 걸친 통일 전쟁을 끝낸 후 '정권의 안정을 위해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자신의 정복욕도 성취하고자 전력을 다해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세 파악을 목적으로 일본에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의견은 엇갈렸고, 조정이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는 정사의 보고를 무시하고, 부사의 의견을 따르게 되어 국방은 소홀하게 되었다.'

임금과 조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조식

임진왜란 발발 얼마 전인 1555년(명종 10) 5월 왜구들이 70여 척의 배로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 영암, 강진에 침입해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을 포로로 잡아간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 부분은 이 사건에 대한 소개도 게시하고 있다. 몇 달 뒤인 10월, 왜구들이 만행 가담자들의 목을 베어 바치자 조선 조정은 그들을 용서하고, 무역선도 다섯 척 증가시켜 주었다는 내용이다.

조식 선생 초상
 조식 선생 초상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남명 조식은 이때 임금에게 문서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여 무인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라면서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신하를 대하는 것은 엄하면서 왜구를 사랑하는 자비심은 망해가는 송나라보다 더합니다"라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조식의 질타는 거리낌이 없다. 임금에게 이렇게 비아냥대어도 목이 붙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 후 조식은 '장차 왜침(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문하생들에게 무예를 장려하고 병법을 강론하였다.' 스승이 그러했으므로 제자들이 그를 빼어닮은 것이야 당연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학권(南冥學圈, 남명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머무는 지역)인 경상우도(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일대에서 (조식 선생의) 문하생(제자)들이나 재전문인(再傳門人, 직접 배우지는 않은 정신적 제자)들이 창의(의병) 기병하여(군사를 일으켜) 전국에서 가장 으뜸가는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 스승과 제자들

<임진왜란 발발> 왼쪽 벽면의 <항일 의병의 활약> 게시물 중 '의병 활동의 사상적 기반'도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이 특히 크게 일어난 까닭을 설명해 준다. 남명은 '대담하고도 과격하게 임금을 비롯한 위정자(정치 권력자)들을 비판하여 대오각성(큰 반성)을 촉구'하였는데, 남명의 '이같은 대응 자세는 그의 문도(추종하는 선비)들로 하여금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모두 창의토적(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에 앞장서게 하였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강직한 자세'를 가지게 했다.

경남 합천 삼가면 외토리의 '조식 선생 생가터'의 안내판. 조식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한 지 20년 후인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 손수 전쟁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라고 적혀 있다.
 경남 합천 삼가면 외토리의 '조식 선생 생가터'의 안내판. 조식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한 지 20년 후인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 손수 전쟁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라고 적혀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창의사에 출발해 남쪽으로 합천군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삼가면 외토리의 '조식 선생 생가터' 안내판도 같은 견해를 보여준다. 생가터(경상남도 기념물 148호) 안내문은 '조식 선생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선생이 타계한 지 20년 후인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 손수 전쟁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라고 말한다.

그동안 줄곧 가져왔던 의문 하나가 유물관의 글들을 읽으니 시원하게 풀린다. 정인홍, 김면, 곽재우를 '영남 3대 의병장'이라고 부른다는 표현을 여러 책과 논문들에서 볼 때마다 '어째서 이 세 사람은 모두 경상남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했을까?', '그것도 곽재우와 김면은 대구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고령군에 연고를 둔 인물들인데…' 하고 궁금했었다. 세 사람이 모두 남명 조식의 제자였구나!

임진왜란 7년, 시작과 끝은 어떻게 전개됐나

창의사 유물관에 게시되어 있는 <임진왜란 발발> 전문을 읽으며 임진왜란 전체의 역사를 알아본다. 아래의 글은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약간 가다듬어 새로 쓴 문장이다. 다만, 유물관 현장의 게시물을 직접 보면서 그 뜻을 궁금하게 여길 학생 답사자들을 위해 원문의 한자어들은 모두 살려두었다. 어려운 용어 뒤에 괄호로 묶어 덧붙인 내용은 인용자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보탠 것이며, 원문에는 없지만 임진왜란 전체 역사에서 꼭 알아야 할 사실도 일부 추가했다.

유세온(사진, 위), 손인갑 장군이 당시 사용했던 칼
 유세온(사진, 위), 손인갑 장군이 당시 사용했던 칼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대마도를 출항한 소서행장 휘하(아래)의 700여 척 대선단(커다란 선박 집단)이 일몰경(해 질 무렵)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조선 침략군의 선봉인 1군(1만8700명)을 싣고 부산으로 항진(항해)해 온 것이었다. 이로써 7년에 걸친 대동란(큰 난리), 임진왜란의 막이 올랐다.

일본군은 백수십 년에 걸친 전국시대(통일 이전, 작은 나라들끼리 계속 전쟁을 벌인 시대)를 통해 단련되고, 조총(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총이라는 뜻)이란 신무기로 집단전술(한 명씩 개인 단위로 적군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 단위로 전투를 계획하여 싸우는 방식)화 된 막강한 군대였다.

또한 그들은 선봉인 1군, 2군, 3군에서 9군까지 육군 15만8800명과 수군 9200명, (일본) 명호옥 본영(군대의 총본부)의 후방(직접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는 지역) 지원 병력까지 모두 30만5300명에 이르는 공전(지금까지 없었던)의, 조선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의 대군이었다."

하혼에게 내려진 임금의 교지(임명장, 위 왼쪽), 정진철 교지(위 오른쪽), 조응인에게 온 임금의 유지(문서, 아래 왼쪽), 정창서 벼루(아래 오른쪽), 모두 존칭 생략
 하혼에게 내려진 임금의 교지(임명장, 위 왼쪽), 정진철 교지(위 오른쪽), 조응인에게 온 임금의 유지(문서, 아래 왼쪽), 정창서 벼루(아래 오른쪽), 모두 존칭 생략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선봉군은 세 길로 나누어 파죽지세(대나무를 쪼개듯이 쉬운 기세)로 북상하여(북쪽으로 올라가) 20일만인 5월 2일 한양을 점령하고, 후속(뒤따른) 군단(큰 군부대 단위)들도 북상을 거듭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침입하였다. 

4월 17일 급보(급한 소식)에 접한 조선 조정(임금과 대신들)은 이일을 순변사(임금이 위급한 군대 일 때문에 특정 지역에 보낸 고위 관리), 신립을 도순변사(순변사 전체의 대장), 류성룡을 도체찰사(나라 전체의 군대 일을 지휘하는 가장 높은 직책)에 임명하여 제장(여러 장수들)을 독찰(격려하고 감독)하게 했으나 관군은 연전연패하여 4월말 국왕은 몽진(피란)하고, 6월 중순 평양이 함락되자 다시 의주로 피란하였다."

합천창의사에서 보는 <부산진 순절도>(보물 391호) 복사본의 일부. 부산진전투에서 정발 등 부산의 군, 민들이 전사했다.
 합천창의사에서 보는 <부산진 순절도>(보물 391호) 복사본의 일부. 부산진전투에서 정발 등 부산의 군, 민들이 전사했다.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조선 육군은 어째서 싸울 때마다 연전연패 했을까

조선 육군은 왜 싸우기만 하면 이토록 계속 지기만 했을까? 한명기의 논문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직후 일본군이 승승장구'한 것은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며 실천 경험이 풍부했던 장병이 많았던 데다, 신무기 조총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또 '조선 사정에 밝았던 대마도 출신들이 전쟁에 가담했던 것도 일본군의 연승에 일조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일대를 효시(시작)로 전국 도처(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다. 의병들은 향토(사는 곳) 지리에 익숙하고, 조건에 알맞는 무기(돌, 물, 불 등)와 전술(기습 작전 등)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침략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었는데, 의병들은 해전에서의 잇따른 수군의 승리와 함께 전황(전쟁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조선의 의병은 모두 2만3000명 정도였다. 이는 관군 전체 인원의 1/4가량 되는 큰 규모였다. 한산도대첩으로 대표되는 수군의 승전과 더불어 의병들의 활약은 일본군의 전라도와 서해 진출을 막음으로써 그들의 군수 물자와 군량미 공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김시민 중심의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 승전도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평양성에 머물 때부터 후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명군의 참전으로 1593년 1월 초순 평양성에서 패퇴한 일본군은 4월 중순 한양도 버리고 일제히 남하(남쪽을 향해) 퇴각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은 전쟁 시작 때에 비해 군사들이 30~40%가량 줄어 있었다. 전투, 굶주림, 질병 탓이었다. 후퇴 초기인 1593년 2월, 적들은 한때 한양을 향해 재공격을 시도했지만 권율 중심의 조선군에게 한산도 대첩, 진주성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행주산성 대첩만 안겨주고 물러났다.)"

정언충 묘지석(본인의 의병 활동 및 합천의병의 낙동강 전투 기록에 새겨진 돌로, 묘소에서 발견되었다.)
 정언충 묘지석(본인의 의병 활동 및 합천의병의 낙동강 전투 기록에 새겨진 돌로, 묘소에서 발견되었다.)
ⓒ 정언충

관련사진보기


"경상도 일대의 적 제7군도 우리(합천) 의병군의 공격에 견디다 못해 1593년 2월 4일 거점(활동의 바탕이 되는 중요 장소) 성주성, 2월 16일 개령 본진(왜군 주둔군의 본부)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합동 작전을 펴고 있던 영, 호남의 모든 군사들이 어울려서 (경북) 선산의 적군을 공격하였다. 이후 전쟁은 소강 상태에 이르고, 강화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달라 3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동안 왜적은 일부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는 울산에서 남해섬에 이르는 해안 지역을 점령한 채 주둔하고 있었다. 명과 강화 협상에 나선 일본은 '조선의 8도 중 4도를 일본에 내놓아라,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 황제에게 시집보내라,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라' 등을 요구했고, 명은 '일본이 철수하면 풍신수길을 일본왕으로 임명해준다' 등을 내걸었다. 강화가 성립될 리 없었다.

"일본은 (1597년, 일본에 머물고 있던 군대까지 다시 바다를 건너보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조·명 연합군은 북상해온 일본군을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에서 격파, 남쪽으로 격퇴시켰다. 해상(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적의 수군을 (전라남도 해남군) 명량에서 크게 무찔렀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점차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도망가는 적 수군 수백 척을 (경상남도 남해군)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으면서 울산, 부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일본군은 철수했고) 노량 대첩(큰 승리)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란이 끝났다."

합천의병군이 왜적을 무찌른 (경북 성주) 안언역 전투 모형도와, 1593년 진주에서 전사한 윤탁 장군이 조정에 올린 상소문(오른쪽 사진)
 합천의병군이 왜적을 무찌른 (경북 성주) 안언역 전투 모형도와, 1593년 진주에서 전사한 윤탁 장군이 조정에 올린 상소문(오른쪽 사진)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이제 세 번째 벽면과 네 번째 벽면에 게시되어 있는 <합천 의병의 활약>과 <합천 의병의 맥>을 살펴본다. 합천에서 창의한 의병들은 어떤 성과를 일구었을까? '합천 의병 군단의 전적(전투 업적)'과 '합천 의병 봉기의 의의'가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준다. '합천 의병 군단의 전적'부터 읽어본다.

"정인홍은  임진년(1592) 5월 10일 합천 숭산동 (소학당)에서  동문(정인홍과 같이 조식의 제자)인 곽율, 김면과 회동하고, 곽준, 박성과 그의 제자 문인(선비)들과 함께 창의하여 합천, 초계, 삼가, 거창, 안음, 함양 등 경상우도 일대의 사민(선비와 백성)들에게 통문을 보내 토적(적을 토벌)하기를 약속하니,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분연히(용감하게) 일어났다.

(정인홍은) 전팔고, 하혼, 권양, 문경호, 정인영, 정인함 등을 참좌(參佐, 참모) 각수유사(실무 책임자)로 삼고, 박이장, 문홍도, 서적, 장인준 등에게 군량모판지임(군량 관리 책임)을 맡겨 1000여 명의 병력을 얻었으며, 관찰사 김수는 합천, 삼가, 초계, 고령, 성주 등 5읍의 군대를 (정인홍에게) 소속케 하고, 전 첨사 손인갑을 (정인홍에게) 보내 합천군단의 중위장(핵심 장군)에 삼도록 하였다.

초유사(전쟁 중 임금을 대신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관리)  김성일은 정인홍과 김면에게 의병대장을, 의령의 곽재우에게 가장(임금을 대신하여 초유사가 임명한 장군)의 직책을 내렸다."

합천의병의 발상지인 소학당(문화재자료 137호) 전경.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989번지에 있다. 그런데 현장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이야기가 거론되어 있지 않다.
 합천의병의 발상지인 소학당(문화재자료 137호) 전경.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989번지에 있다. 그런데 현장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이야기가 거론되어 있지 않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왜군의 급속한 북상 후 관군 쪽에서 탈락한 포장(포를 다루는 기술자), 산졸(흩어진 군사)들이 도처(곳곳)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정인홍은 이들을 효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의병 조직을 급속히 전투 병력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5월 중순 경에는 전투 능력을 수행할 수 있는 의병 군단이 조직되었다.

합천의병군의 주요한 군사적 역할은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전치원, 이대기 등과 고령의 김응성, 성주 일원을 지키는 문려, 이홍우 등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위급한 곳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즉, 경상우도의 의병을 총괄(총지휘)하는 지위에 있었다. 합천의병군단의 주요 전투 전적으로는 무계 전투, 사원동 복병 전투, 초계(마진) 전투, 안언역 전투, 성주성 탈환 작전, 진주성 1, 2차 구원 전투 등이 있다."

합천 의병군이 일궈낸 임진왜란의 성과

'합천 의병 봉기의 의미'는 '합천 의병 군단의 전적' 전체의 결론으로 읽힌다. '합천 의병 봉기의 의미'는 "(합천 의병은) 전국적인 의병 봉기의 선봉이 되고, 경상우도의 전략적 요건(산, 계곡, 의병 참가자가 많음)을 충분히 활용하여 '이소격중(以小擊衆,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공격함), 이일대로(以逸待勞, 쉬면서 적을 지치게 만듦)' 하는 유격(형편에 맞춰 적을 기습 공격함) 전술을 구사하여 국난 극복의 일익(한몫)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로 시작된다.

"(합천의병군은) 첫째, 전국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로 창기(의병을 일으킴)함으로써 타 지방 창의를 촉발하는(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관군이 재기하고(다시 일어나고) 명군이 내원(來援, 도우러 옴)하여 전세(전쟁의 흐름)를 역전시킬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다.

둘째, 낙동강과 경상우도의 험준한 지형지물(산, 강, 계곡 등)을 이용하여 왜군의 호남 침입을 끝까지 저지하고(막고) 수운(낙동강 물길) 이용을 방해함으로써 주(가장 중요한) 보급선(무기와 군량을 앞서 간 군대에 전달하는 길)을 단절시켜(끊어) 전선(적과 마주 선 지점)에 고립된 적군의 후퇴를 불가피하게 했다.

셋째, 자보향리(고향을 스스로 지킴)의 지역적 폐쇄성을 초월하여 활동을 조직적으로 광역화(범의를 넓힘)시켜 공격적인 전술로 이웃 거창의 김면 군과 멀리 호남의 관, 의병과도 연합하여 경상도 경략(다스림)의 주체인 왜 7군 모리휘원의 3만 대군의 거점인 성주와 본진이 있는 (경북 고령) 개령 일대를 공격하여 끝내 왜군을 축출하여(내쫓음) 회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합천 의병 부대의 성립 과정과 전투 업적, 그리고 임진왜란 전체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유물관 안에는 아군 병력 배치 일람표, 적군 병력 배치 일람표, 경상도 의병장과 의병진 규모 등도 있고, 합천 의병의 안언역 전투, 초계 마진 전투, 무계 전투, 현풍 영산 전투, 진주성 구원 전투, 성주성 전투에 대해 해설한 게시물도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의병들의 전투 관련 역사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제일이므로 각 싸움터에서 다시 '공부'하기로 한다.

1604년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간행한 <남명문집>(왼쪽)과 1911년 간행된 정인홍의 <내암선생문집>
 1604년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간행한 <남명문집>(왼쪽)과 1911년 간행된 정인홍의 <내암선생문집>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게시물들을 충분히 읽었으므로 의사들이 남긴 유물과 유품들을 살펴본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입었던 갑옷(장군복)과 썼던 투구, 당상관의 관복(당시 공을 세운 인물이 입었던 복식), 1593년 6월 진주성 싸움 때 순절한 윤탁 의병장의 상소문과 과거 시험 답지, 정창서 선생께서 사용했던 벼루, 온양군수 재직시 선정을 베풀자 당시 관찰사 이원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왕으로부터 관복과 함께 내려온 조응인의 유서(왕이 보낸 문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유세온 장군이 직접 사용했던 칼 등 눈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볼거리들이 정말 많다.

손인갑 장군의 칼도 보관돼 있다. 손인갑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산첨사를 지낸 인물이다. 당시 장군이 사용했던 칼 앞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의 운명이 누란(달걀을 쌓아놓은 모양)의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하고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내암군(정인홍 의병 부대)의 중위장으로서 무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마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군도는 당시 손인갑 장군의 왜병을 섬멸하던 칼'이라는 작은 안내문이 놓여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이 사용했던 칼 '눈길'

하혼과 정진철 장군의 교지도 있다. 하혼의 교지는 찰방으로 있을 때 세운 임란 공적을 인정받아 좌승지로 증직 임명되면서 받은 임명장이다. 정진철은 1568년 향리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출생한 인물로, 임란 중 세운 많은 공적을 세워 직장이 되고, 1606년 권무별시에 급제하여 제물량 수군만호를 거쳐 명천부사에 이르렀다. 그 외 윤선, 윤탁, 손인갑의 문집과 조응인의 자필 책자, 정인준의 1579년 진사 급제 교지도 있다.

정언충의 묘지석은 아주 색다른 유물이다. 이 돌들은 정언충의 묘소에서 발견된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본인의 행적 및 합천의병군의 낙동강 방어 기록이 담겨 있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과 평생의 행적 등을 돌이나 사기판 등에 기록하여 무덤 안에 함께 묻어둔 것을 말한다.

물론 창의사가 임진왜란의 의병들을 기리는 공간인 만큼, 임란 공신들의 등급과 이름이 기록된 선무원종공신록권이 없을 리 없다. 정인홍의 녹권이다. 정인홍을 영의정에 임명한 광해군의 교지도 있다. 지금까지 본 것도 많지만, 합천군 안에도 삼가면의 조식 유적(생가터, 서원, 정자), 가야면의 정인홍 유적(기념관, 사당, 정자)과 소학당, 그리고 합천 의병들이 목숨을 내놓고 왜적과 싸웠던 여러 전투 장소 등 '아직 볼 것도 많다'는 생각에 잠기며 유물관을 나선다. 계단 아래로 합천임란창의사적비가 보인다. 

정인홍의 초상과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는 광해군의 교서
 정인홍의 초상과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는 광해군의 교서
ⓒ 합천창의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어서 '합천 임란 창의 사적비' 기사를 게재할 계획입니다.



태그:#조식, #정인홍, #임진왜란, #의병, #합천창의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