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분위기> 포스터

<그날의 분위기> 포스터 ⓒ 쇼박스


연초 개봉한 한국 멜로 영화 <그날의 분위기>가 여성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온 이후, <한겨레> <노컷뉴스> 등 매체에서 '성희롱 범죄를 로맨스로 포장한 영화', '거의 성범죄 다큐'와 같은 제목을 붙여서 이 영화에 관해 진행 중인 여성혐오 논란을 기사화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오늘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 성희롱 범죄가 영화에선 로맨스? / "섹스 거부한 여성은 철벽녀?... 이 영화 거의 성범죄 다큐") 온라인상의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 이전에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 느끼는 황당함

 <그날의 분위기>의 한 장면

<그날의 분위기>의 한 장면 ⓒ 쇼박스


논란 이전에 영화를 관람한 관객으로서, 이 영화에 대해 여성 혐오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황당하다. 영화 전체로 보면 <그날의 분위기>는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멜로나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치를 완벽히 만족시키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선정적으로 빠지기 쉬운 원나잇스탠드라는 '어려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여성을 객체화시키지 않고 줄거리를 끌어가는 지점이 이 영화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미덕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해진 대사인 "저 오늘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는 재현(유연석 분)의 대사는 그 대사 하나만 놓고 보면 성희롱이 맞고 또 영화 전체를 그렇게 보이게 할 소지가 충분히 있다. 일단 해당 대사만 놓고 보자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그것도 기차 옆 좌석에 우연히 앉은 처음 본 이성에게 저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상식적인 상황에서라면 그런 말을 꺼낸 남성은 뺨을 맞거나 최소한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분위기>는 원나잇스탠드라는 사건이 있기 위해서 필요한 상호 간의 동의와 감정 변화와 같은 조건들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원나잇스탠드를 자극적인 소재로 소비해버리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이다. 영화 속 재현(유연석 분)이라는 캐릭터가 비록 '저 말도 안 되는 성희롱적 대사'를 수정(문채원 분)에게 던지기는 하지만,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그 장면이 오히려 영화 흐름상에서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재현은 수정에게 원나잇스탠드를 제안하지만 요구하거나 강제하지 않으며, 섹스를 통해 얻는 쾌락을 목적으로 삼고 목적지향적으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수정을 향한 그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그녀의 감정을 거의 완벽하게 배려하는 남성으로 그려진다. 재현 캐릭터의 이러한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수정이 원나잇스탠드에 동의한 후 이어지는 호텔 장면에서다. 원나잇스탠드를 결심한 수정이 육체적인 관계를 빨리 끝냄으로써 일탈로 인한 죄책감이나 힘든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 조급한 행동을 보이는 반면, 재현은 오히려 지금 자면 안 될 것 같다는 감정을 느끼고 스킨십 '진도'를 나가는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난다.

<그날의 분위기>는 남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원나잇스탠드 성공 후기'가 아니라, 여성의 관점까지도 포괄하여 만들어진 '멜로 영화'에 가깝다. (그것이 성공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원나잇스탠드라는 조금은 특별한 사건 속에서 변화하는 남녀의 세밀한 감정들을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왜 이 영화가 여성 혐오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여성 중심의 서사를 그려낸 영화인지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평론을 쓰고 있다(관련 글: 우리가 비록 유연석·문채원 같은 선남선녀는 아닐지라도). 그는 "<그날의 분위기>는 재현이 아닌 수정을 주어에 놓으면서, 정체되었던 자신을 딛고 새롭게 도약하는 여성의 성장을 보여준다"고 언급하면서, 이 영화가 지금의 현실과 다른 '성 정치학적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 연애를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저 웬만하면 오늘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는 대사에 대해서도 "모호한 감정을 내세우면서 지분거리는 게 아니라, 명쾌한 요구와 함께 분명한 동의를 구한다"는 면에서 "신선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황진미는 지금까지 여성혐오의 혐의가 있다고 생각한 영화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하는 평론들을 써왔다. 특히 2015년 개봉한 이광수, 박보영, 이천희 주연의 블랙코미디 <돌연변이>의 주진(박보영 분) 캐릭터에서 여성 혐오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관련 글: '돌연변이', 아버지 세대의 닦달에 대한 청년의 응답).

그렇다면, 실제 영화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성 혐오 논란이 일어난 것일까?

초점이 어긋난 논란의 근원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에선 유연석을 '하루에 한여자'씩 만나는 '맹공남'으로 묘사한다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에선 재현(유연석 분)을 '하루에 한여자'씩 만나는 '맹공남'으로 묘사한다 ⓒ 쇼박스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에서 수정(문채원 분)은 '철벽녀'로만 묘사된다.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에서 수정(문채원 분)은 '철벽녀'로만 묘사된다. ⓒ 쇼박스


아마도 이 영화를 여성 혐오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영화를 관람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에 올라온 이 영화를 비판한 최초 게시물이나 관련 기사를 보면 대부분의 비판은 포스터 문구나 예고편에 나온 대사나 자막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논란은 영화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포스터/예고편에 관한 내용이었을 테다. 이것이 조금씩 확대되는 과정에서 영화 자체가 여성 혐오 영화라는 식으로 전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메갈리아4는 게시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처음 본 남자가 섹스하자고 조르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에게 '철벽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이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분위기>에서 재현은 처음 본 여자에게 원나잇스탠드를 제안했을 뿐 섹스를 조르지도, 어떻게든 억지로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지도, 즉 '열 번 찍지도' 않는다. 수정도 그냥 한 남자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그 남자와의 결혼에만 목매고 다른 사랑이나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차단한 '유교적이거나 남성들의 시선에 맞춰진 여성상'도, '철벽녀'도 아니다.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는 원나잇스탠드에 대해 암시하는 말 이후에, 그들의 감정과 관계가 각자의 주체성과 윤리성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는 면에서만 본다면 <그날의 분위기>는 꽤나 괜찮은 영화다.

<그날의 분위기>를 맹공남 대 철벽녀라는 19금 에로영화에나 나올 법한 구도 속으로 굴려 떨어뜨린 것은 누구일까? 아마도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마케팅 전략을 짜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잘못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에 한 여자', '철벽녀', '맹공남', '자유연애', '되느냐 마느냐' 등…. 아마도 배급사, 투자사와 마케팅 부서에서 크게 관여했을 이 영화의 홍보용 줄거리나 포스터, 예고편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목록이다.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콘셉트화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완전히 다 뒤로 물러나버리고, '하루에 한 여자' 식으로 '자유연애'를 하는 '맹공남'이 '철벽녀'에게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는 말로 건 수작이 '되느냐 마느냐', 혹은 두 주인공이 '자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영화를 단순화시켜 버린 것이다.

남성 내레이터가 "되느냐 마느냐"라고 계속해서 읊어대는 예고편은 이러한 단순화의 결정판이다.

영화 마케팅 전략의 나쁜 사례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

<그날의 분위기> 예고편 ⓒ 쇼박스


어쩌면 이러한 단순화는 영화의 대중적인 흥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코드화 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순화는 주체인 남성이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대상 여성에게 작업을 거는 게임이 마치 영화의 핵심인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그날의 분위기>를 '여성 혐오적 영화'로 인식될 가능성을 키우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도 동시에 만들어냈다.

이 유치한 마케팅은 영화 전체를 '여혐'으로 낙인찍히게 한 주범이기도 하고, 관객의 온전한 영화 관람을 망쳐 놓은 방해꾼이기도 하다. <그날의 분위기>의 포스터나 예고편, 줄거리를 미리 본 다음에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 영화의 인물들에 대해 특정한 방식의 선입견을 미리 갖게 된 상태에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영화 장면 내에서는 재현을 감정보다는 원나잇스탠드의 쾌락만 중요한 캐릭터라고, 수정을 10년 된 연인에의 정이나 집착만 중요하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캐릭터라고 단정 지을만한, 그런 근거는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나 만약 위에서 나열한 홍보 문구로 인해 이미 관람의 틀을 어느 정도 가진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재현과 수정의 감정 변화가 너무나 설득력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카사노바 맹공남'인 재현이 갑자기 '진정한 사랑'이나 '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나, '일편단심 철벽녀'인 수정이 갑자기 일순간 원나잇스탠드를 주체적으로 허락하고, 10년 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되는 것을 설득력 있는 변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선입견이 없는 상태였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날의 분위기>는 영화 마케팅 전략이 영화 관객의 영화에 대한 온전한 수용에, 나아가서는 영화 평론/비평에도 얼마나 큰 제한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나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그날의 분위기 문채원 유연석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