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트풀8>의 한 장면.

헤이트 풀 8 ⓒ 누리 픽쳐스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은 19세 관람불가의 등급답게 유혈이 낭자하고, 죽음이 널브러지는 살육의 현장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살해'의 잔인함보다는, 영화를 내내 감쌌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장중한 오케스트라처럼, 미국역사를 조감한 한 편의 서사 소동극을 본 듯한 감흥에 젖어든다.

눈보라 속 산장에 모인 증오의 역사

 <헤이트풀8>의 한 장면.

헤이트 풀8 ⓒ 누리픽쳐스


영화의 시작은 눈 쌓인 산속이다.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에 흠씬 젖어 들어가는 산중, 거기에 몇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한 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마차의 앞길을 막아서는 한 사람, 그의 뒤에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얼어버린 살덩이들이 몇몇 쌓여있다. 하지만 그렇게 식겁할 만한 시체 덩어리를 보는 마부나, 마차 속 승객들의 반응은 마치 사냥한 동물을 보듯 심드렁한 데서, 이 영화적 상황의 심각성은 역설적으로 전달되어 온다.

즉, '인간을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워렌 소령(사무엘 L. 잭슨 분)을 맞이하는 건, 또 다른 '인간' 데이지 도머구(제니퍼 제이슨 리 분)를 산 채로 사냥해가는 교수형 집행인 존 루스(커트 러셀 분)와 그를 나르는 마부이다. '살육' 위에 쌓아진 '서부시대'가 감지된다

서로가 총을 들이밀며 승강이를 벌이다 결국은 밀려오는 눈보라 속에서 생명을 건사하기 위해 현상금 사냥꾼은 자신을 지키는 총을 포기한다. 그는 교수형 집행인과 여죄수의 일행이 된다. 눈 속을 힘겹게 나아가는 말들의 걸음처럼 느리게 그들의 소개가 진행된다. 일행의 소개가 마무리될 즈음, 또 한 사람의 동행이 등장한다. 바로 그들이 사냥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가를 치러줄 자칭 레드 락의 보안관 후보자 크리스 매닉스(윌튼 고긴스 분)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헤이트풀8>의 한 장면.

헤이트 풀8 ⓒ 누리 픽쳐스


장황한 마차 속 수다를 통해, 우연히도 마차에 함께 탄 이들 네 명의 아이러니한 관계는 점점 드러난다. 서부 영화의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현금 사냥꾼은 '흑인'이다. 남북 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무려 링컨의 자필 편지를 가지고 있는 전직 '소령'이다. 교수형 집행인조차 저어할 정도로 링컨의 친애를 받는 흑인 북군 소령을, 백인인 여죄수는 그의 소중한 링컨이 자필 편지에 침을 뱉으며 조롱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탄, 그들의 성과를 증명해줄 신임 보안관이란 자는, 과거 악명이 자자한 남부군 무리의 아들이다. 과거 북군의 소령이었던 이가 한때 적이었던 남군 출신 보안관에게 죄수를 넘기고 전과를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 이처럼 전쟁 후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와 상관없이 그들 속에 쌓인 증오심은 여전하다.

아이러니한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도착한 산장에서 더 극대화된다. 언제 가더라도 정다웠던 미니의 산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걸쇠가 사라진 산장의 문처럼 주인 내외가 사라진 산장이다. 대신 수상한 사람들이 그득하다. 하지만 눈보라를 배겨 내지 못하는 산장의 문을 못질하고 닫듯,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삶을 건사하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한자리에 모여 든다.

처음 들어설 때부터 산장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워렌 소령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산장 속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산장에 머물던 오래된 손님 샌포드 스미더스(브루스 던 분)와, 산장을 대신 맡은 멕시콘인 밥(데미안 비쉬어 분), 역시나 눈을 피해 들어온 카우보이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 분) 그리고 진짜 교수형 집행인 오스왈도 모브레이(팀 로스 분)처럼. 그저 산장의 손님이었던 이들은 새로 합류한 네 명의 손님들과 합쳐져, 결국 중간의 식탁을 경계로 '남과 북'의 경계로 나누어진다. 남북 전쟁이 끝난 시점이지만,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는 전선을 이룬다.

그 전선을 기점으로 각자의 전사, 속내 혹은 그저 역사 속 남북 전쟁이 쏟아 부어진다. 남군과 북군, 북군에 참가한 흑인, 패배한 백인 남군의 극복될 수 없는 자존심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상흔들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수위를 높여간다. 애초에 산속의 마차에서부터 긴장감을 쌓아올리던 남과 북, 흑과 백의 갈등이 아니던가. 결국 워렌 소령의 도발로 샌포드 스미더스 장교가 총을 들고, 그 팽팽한 경계가 흩어진다. 산 자는 워렌 소령이고, 죽은 자는 이제는 갈 곳도 없어진 남군의 장교다. 하지만 퍼붓듯이 쏟아낸 그들의 속내에서, 전쟁은 그들의 가족도, 자존도, 동지도 앗아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증오를 덮는 건 링컨의 편지?

 <헤이트풀8>의 한 장면

헤이트 풀8 ⓒ 누리 픽쳐스


남과 북의 전선은 그저 <헤이트풀8>의 한 장이었을 뿐이다. 워렌 소령은 마치 개신교의 목사와도 같은 옷차림으로 여덟, 아니 이젠 일곱 명의 군중을 상대로 앞에 나선다. 자신이 미니의 산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수상했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한 워렌 소령의 추리가 어긋나지 않게, 영화는 커피 주전자 속에 든 독약으로 인한 독살로 본격적인 2막이 시작된다.

2막의 주제는 데이지 도머구와 그녀의 조력자들이다. 워렌 소령의 독무대 뒤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독살 음모는 어이없이 마부와 그토록 집요하게 하지만 때로는 애틋하게 그리고 결국은 잔인하게 여죄수를 산 채로 호송해 가던 존 루스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하지만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데이지 도머구의 조력자들을 색출해 내려 하기가 무색하게, <헤이트풀8>이 무색하게 뜻밖의 등장인물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조력자와 조력자가 아닌 인물들이 서로 핏빛 실랑이를 벌이며, 결국은 헤이트 풀은 시체의 풀로 남겨지게 된다.

영화는 인간의 사냥이 용인되는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남북 전쟁의 전사를 훑고, 결국은 범죄 집단과의 육탄전으로 막을 내린다. 주인이 이미 제거된 산장은 흡사 <리바이어던>에서 홉스가 말한 바 있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떠오르게 한다. 처음 눈 쌓인 산속에서 존 루스와 워렌 소령이 만났을 그 순간부터, 그들은 때론 마차 속 생존을 두고, 혹은 남인가 북인가, 혹은 누가 먼저 총을 잡는가, 누가 조력자인가를 두고 이합집산을 시도한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가 죽고 죽였을 뿐이다. '총'으로 흥한 자 '총'으로 망하듯이.

치킨 게임이 되어버린 증오의 산장은, 미국 역사의 상징처럼 선명하다. 총 한 자루에 의지해 생명을 건사했던,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혹은 대의를 위해 남과 북이 나뉘었던 시간.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 속에서 서로가 자멸해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은 미국의 전사가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그 길지 않은 장황한 역사는, 때론 서로의 실체를 더듬는 '아가사 크리스티'식 추리로,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다른 영화 같은 총부림으로 절대 짧지 않은 168분의 상영시간을 흠씬 채운다.

세계 1위의 국가가 된 미국의 역사. 그 한 꺼풀을 벗겨내면, 168분의 시간 동안 죽고 죽이는 핏빛의 '증오'로 흥건한 시간처럼, 지난 역사는 '증오'를 그럴듯하게 위장해온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 증오를 덮어 '하나의 공동체'로 위장할 수 있는, 아니 증오를 덮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 속 내내 등장인물들이 그리도 궁금해했던 워렌 소령이 소지한 링컨의 편지. 개인의 증오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공신력 없는 보안관이 아니라, 남군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조차 죽어가며 그리워하는 편지. 그 편지만으로 존재감이 컸던 링컨처럼 '국가'가 그 증오를 덮을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헤이트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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