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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은 경쟁이나 효율 대신 연대 혹은 관계, 빠름이나 속도 대신 느림의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받아들인다
▲ 거창 황산마을 오래된 마을은 경쟁이나 효율 대신 연대 혹은 관계, 빠름이나 속도 대신 느림의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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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였다. <사기>에 실린 고사성어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이다. 온갖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위계에 놀아나 진실을 보지 않거나 진실에 눈감아버리는 사회를 비꼬는 말이다. 거짓, 핑계, 남 탓, 위선이 난무한 한해였다. 그야말로 거짓으로 진실의 눈을 가리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눈먼 한 해였다.

눈은 닫아버리고 귀만 살짝 열어놓은 나에게 '오래된 마을 옛담'은 변방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희망의 북소리같았다. 그 북소리를 향해 마음의 눈을 연 지 일 년 반이 지났다.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기약 없이 시작한 일인데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오래된 마을은, 거짓 없는 진실이 통하고 내 잘못을 남에게 돌리지도 비겁한 변명을 일삼지도 않으며, 위계와 위선이 발붙이지 못하는 곳이다. 끈끈한 공동체 삶이 살아 숨쉬고 핏줄과 이웃정이 설기설기 얽혀 그 무엇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곳이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 같은 세상 너머에 있는 서로 소통하고 보듬고 정을 나누는 곳, 그런 곳이다.

마을 사람들의 끈끈한 세월이 쌓인 옛담들

오래된 마을은 속도나 직진을 우선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이웃을 보듬고 느릿느릿 살아가는 곳이다
▲ 제주 하가리마을 오래된 마을은 속도나 직진을 우선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이웃을 보듬고 느릿느릿 살아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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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은 핏줄이나 이웃간 정이 담 타고 얼기설기 얽혀있어 함부로 끊을 수 없다
▲ 성주 한개마을 오래된 마을은 핏줄이나 이웃간 정이 담 타고 얼기설기 얽혀있어 함부로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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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가 얘기한 '변방'과 같은 곳이다. 공간적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주류담론이 전부가 아니어서 주류로부터 벗어나 그 주류에 저항하고 새로운 주류를 창조하는 공간이다. 경쟁, 직진, 빠름, 능률, 효율 같은 중앙의 주류 가치 대신 연대, 관계, 느림이라는 비주류의 가치가 새로운 주류로 자리 잡은 공간이다.

오래된 마을은 내 가슴속 변방이다.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경쟁 대신 연대를 추구한다. 직진과 빠름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느릿느릿 살아가는 곳이다. 결과만을 중시하고 효율과 능률을 만능으로 여기는 '싸구려 가치'는 적어도 오래된 마을과는 거리가 멀다. 

돌담 타고 이웃간 정이 이어졌다. 소소한 하루하루 정이 쌓이고 그 정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 신안 비금도 내촌마을 돌담 타고 이웃간 정이 이어졌다. 소소한 하루하루 정이 쌓이고 그 정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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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이 몸이라면 오래된 담은 그 마을의 얼굴이다. 집 구성요소 중에 제일 바깥에 자리 잡아 바깥세상을 보고 듣고 바깥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너와 나 사이에 담이 존재하지만 그 담은 벽이 아니라 너와 내가 서로 등대고 기댈 수 있는 등받이다. 등을 맞댄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한다. 벽은 선이지만 담은 공간이다. 공간에는 관계가 존재한다.

오래된 담은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마을사람들의 세월이 쌓인 것이다. 주름살은 세월의 자국, 사람마다 주름살이 다르듯 마을마다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이 달라 담 모양이나 그 맛도 다르다. 세월이 쌓인 것이니 향토적 서정이 깊을 수밖에, 알싸한 맛은 없지만 중독성 있는 농익은 맛이 난다. 단순한 미 이상의 미학이 담겨있다. 

오래된 마을은 들녘, 산골, 섬에 흩어져 있다. 팔공산 북쪽 산 아래에 자리 잡은 한밤마을은 육지마을이라도 돌이 많아 돌담으로 쌓았다
▲ 군위 한밤마을 돌담 오래된 마을은 들녘, 산골, 섬에 흩어져 있다. 팔공산 북쪽 산 아래에 자리 잡은 한밤마을은 육지마을이라도 돌이 많아 돌담으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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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오래된 마을의 옛 담장이 여러 곳 있다. 2000년 중반부터 스러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몇 개 마을담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들른 오래된 마을은 담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마을, 18곳(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등록 해제된 성주 한개마을 포함)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문화재로 등록이 안 되었지만 문화재로 등록되어도 손색이 없는 군위 한밤마을, 완도 여서마을, 제주 하가리마을, 신안 도초도 고란마을 등 총 22곳이다. 

현재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마을은 경남고성 학동마을(258호), 거창 황산마을(259호), 산청 단계마을(260호), 무주 지전마을(262호), 익산 함라마을(263호), 강진 병영마을(264호), 담양 삼지천마을(265호), 대구 옻골마을(266호), 완도 청산도 상서마을(279호), 부여 반교마을(280호), 산청 남사마을(281호), 신안 흑산도 사리마을(282호), 신안 비금도 내촌마을(283호), 의령 오운마을(365호), 정읍 상학마을(366호), 여수 사도·추도마을(367호), 영암 죽정마을(368호)이다.

반교마을 빼고는 전라도, 경상도 한갓진 들녘이나 산골, 섬에 흩어져 있다. 덕유산 굽이굽이 굽은 구천계곡 끄트머리에 무주 지전마을과 거창 황산마을이 매달려 있고 가슴팍 두툼한 팔공산 이쪽저쪽에 군위 한밤마을과 대구 옻골마을이 파고 들었다.

지리산과 덕유산 물은 경남산청(山淸)에 이르러 남강(南江)이 되더니 그럴싸한 두 마을, 남사마을과 단계마을을 떨궜다. 덕유산에 쫓긴 비단물(금강)은 익산에 다다라 함라마을을 토했고 실뱀처럼 흘러온 낙동강은 경상도에 닿자 성주에 한개마을을, 의령에 오운마을을 낳았다. 담양을 휘돌다 영산강을 기웃대던 세갈래 물길(삼지천)은 힘에 부쳐 창평들녘에 삼지천마을을 뱉었다.

역사, 문화, 생활방식에 따라 다른 모습 지닌 마을담장

감나무에도 자리 내준 배려의 담이다.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교훈을 남겼다
▲ 산청 남사마을 흙돌담 감나무에도 자리 내준 배려의 담이다.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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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제일의 산, 월출산은 '남도1번지' 영암에 '남한1번지' 마을, 죽정마을을 코앞에 두더니 저 멀리 강진 병영, 쟁반 같이 둥근 땅에다 병영마을을 떼어냈다. '뜨거운' 황토고을 정읍은 몸을 식히려했는지 두승산 서늘한 곳에 산골마을 상학마을을 두었고 부여 만수산과 아미산은 금쟁반 위에서 반교마을을 품었다. 한반도 남쪽 끝자락, 공룡이 노닐던 고성에 억겁의 세월을 뚫고 학동마을이 생겼다.

담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섬마을은 여수 사도·추도마을, 완도 상서마을, 신안 비금도 내촌마을, 흑산도 사리마을이다. 완도 여서마을이나 신안 고란마을, 제주 하가리마을은 담이 문화재로 등록이 안 되었지만 푹 삭은 농익은 맛에 이끌려 둘러본 마을들이다.

성처럼 쌓은 담, 바람 무서워 이렇게 쌓은 것이다
▲ 완도 여서마을 돌담 성처럼 쌓은 담, 바람 무서워 이렇게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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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진, 직선에 익숙한 우리에게 쉼표 같은 담이다
▲ 성주 한개마을 굽은 담 직진, 직선에 익숙한 우리에게 쉼표 같은 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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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 옛담에는 사연, 역사, 철학이 주렁주렁하다. 대구 옻골마을 직선담은 절제(節制), 여러 오래된 마을의 굽은 담은 마을사람들의 순정(純情)이 매달렸다. 한개마을의 누이 닮은 눈썹담과 대구 옻골마을의 오라비 상고머리 닮은 소깝담은 오누이의 애틋한 정을 품었다.

세월의 무게에 눌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의령 오운마을의 배불뚝이 담은 '쓸모'에 대한 철학적 얘기를 들려주었다. 감나무에게 자리 내준 남사마을 배려의 담은 생명과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교훈을 알려주었다. 홑이불 뒤집어쓰듯 지붕까지 올라있는 섬마을 돌담에서는 경외감을 갖고 자연에 순응해 가는 섬사람들의 의지가 엿보인다.  

쓸모의 유무를 정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 오운마을 배불뚝이 담은 농익은 향토적 서정을 우리에게 안긴다
▲ 의령 오운마을 배불뚝이 담 쓸모의 유무를 정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 오운마을 배불뚝이 담은 농익은 향토적 서정을 우리에게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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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갖다놓은 배려의 담이다. 아무나 주인 눈치 보지 않고 구멍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 고성 학동마을 구멍 돌담 음식을 갖다놓은 배려의 담이다. 아무나 주인 눈치 보지 않고 구멍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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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 구멍에 음식을 갖다 놓던 고성 학동마을 '구멍담'에서 집주인의 고운 마음씨, 배려와 소통이 읽힌다. 제주 하가리마을의 구멍 숭숭한 마을담과 바람길 내주려는 완도 여서마을의 구멍담은 바람마저 막아버리면 스스로 담이 무너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한다. 그것은 마음의 문을 닫고 벽을 친다면 속이 멍들고 마음의 병을 얻어 고립된 채 자멸한다는 단순한 진리다.

2015년은 혼용무도(昏庸無道)의 해라 했다. 혼용무도, 무능한 군주 때문에 천하가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지록위마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언제나 함열하며 격양가 부르며 살아볼꼬? 만민이 함열하여 격양가 불렀다는 함라마을의 옛담을 다시 쳐다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몇 년간은 이런 날이 오지 않을 듯싶다. 그때까지 새로운 내 마음속의 '변방'을 찾아 길을 헤매는 일은 계속되리라.

이상세계를 꿈꾼 죄로 함라마을에 귀양 간 허균이나 세상너머의 세상을 넘본 죄를 짓고 흑산도 사리마을에 유배 간 정약전은 변방에서 북소리 울리며 그들의 꿈과 이상세계로 가는 희미한 길을 알리고 있다.  

함라마을 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낮은 사람들을 내치기는커녕 그들을 보듬은 집 주인의 고운 마음이 담겼기 떄문이다
▲ 익산 함라마을 흙돌담 함라마을 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낮은 사람들을 내치기는커녕 그들을 보듬은 집 주인의 고운 마음이 담겼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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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신영복 선생의 타계소식을 접하였다. 나의 ‘뿌리’와 ‘뼈대’가 흔들릴 때마다 <동양고전 강의>, <나무야 나무야>, <변방을 찾아서>,<신영복의 엽서> 등 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다잡아주던 선생이었다. 특히 <변방을 찾아서>로 이번 여행의 모티브를 얻었기에 슬픔은 더욱 크다. 선생은 나의 여행 길잡이였고 나는 늘 여행길에서 선생을 떠올렸다. 선생은 나를 모르고 나는 선생을 사랑하는 짝사랑 관계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늘 존경하던 선생이었다. 2016년 1월 16일 선생의 ‘맑은 영혼’같은 눈이 ‘느릿느릿’ 내려 ‘낮은 곳’을 메꾸고 있다. 세상의 죄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세상너머 세상에서 편히 사소서....



태그:#오래된 마을, #옛담,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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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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