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이트풀8> 스틸컷.

영화 <헤이트풀8>의 한 장면 ⓒ (주)누리픽쳐스


많은 사람이 스릴러라는 장르를 생각하면 아슬아슬한 추격 장면, 눈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짧은 장면이 쏟아지는 화면 전환을 떠올리기 쉽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스크린을 향해 '확' 튀어나와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면도 이젠 흔하다. 그러다 보니 '그런 요소 없이 스릴러를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6년 1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만한 영화 한 편이 등장했다. 지난 7일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이다.

눈보라 속 오두막, 여덟 사람이 갇혔다

 영화 <헤이트풀8> 스틸컷.

영화 <헤이트풀8>의 한 장면 ⓒ (주)누리픽쳐스


<헤이트풀8>은 '의심'으로 막을 연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마차 앞을 가로막는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자신을 현상금 사냥꾼(사무엘 L. 잭슨)이라 소개하며 가까운 마을까지 마차를 함께 타자고 제안한다. 마차 안에 탄 교수형 집행인(커트 러셀)은 총을 겨누며 "당신 총을 마부에게 맡기고 타라"고 답한다. 교수형 집행인이 수송 중인 죄수(제니퍼 제이슨 리)의 현상금을 현상금 사냥꾼이 노릴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겨우 동승이 이뤄지는가 했더니, 얼마 가지 않아서 누군가 또 나타난다. 길에서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한 제3의 남자는 자신이 인근 마을에 새로 부임할 보안관(월튼 고긴스)이라며 마차에 태워달라고 간청한다.

마차는 눈 폭풍에 쫓기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작은 상점에 멈춰 선다. 교수형 집행인과 현상금 사냥꾼 일행은 날씨 탓에 숙박시설이 딸린 상점에서 며칠 지내기로 결정한다. 눈이 내리는 상태로 봐서 더는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였다.

마차를 정리하고 마침내 들어간 숙박 시설에는 얼굴을 알고 지내던 주인은 없고 낯선 손님이 먼저 도착해 있다. 현상금 사냥꾼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망설일 틈도 없이 눈보라에 여덟 사람이 오두막에 갇힌 신세가 된다. 교수형 집행인은 죄수를 지키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이방인과의 '불편한 동침'이 시작된다.

증오 가득한 이들의 만남, 비극의 시작

 영화 <헤이트풀8> 스틸컷. 현상금 사냥꾼(사무엘 L. 잭슨)의 모습.

영화 <헤이트풀8> 한 장면. 현상금 사냥꾼(사무엘 L. 잭슨)의 모습. ⓒ (주)누리픽쳐스


미국에서 남부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헤이트풀8>은 서부극이지만 메마른 황야가 아닌 설원에서 이야기를 펼친다. 창틀에 가득한 흰 풍경, 조용한 분위기를 깨는 문밖 바람 소리가 관객을 한겨울 설원으로 데려간다.

영화 <헤이트풀8>의 묘미는 오두막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전개되는 상황이다. 하릴없이 같은 곳에 투숙하게 된 사람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데, 등장인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한 꺼풀씩 비밀이 드러난다. 아무런 연관없는 듯한 인물들이 서로 알아가면서 매 순간 분위기가 반전된다.

마치 좁은 방에 먹이사슬로 연결되는 맹수 여러 마리가 들어찬 것처럼,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흑인인 현상금 사냥꾼, 흑인을 멸시하는 미국 남부 장군 출신의 노인(브루스 던), 정체불명의 카우보이, 보안관과 죄수까지. 등장인물은 서로 의심하고 혐오할 여지가 있는 상대이다. 재치있는 대사가 이어질 때마다, 눈보라 속 풍경처럼 뿌옇던 인물의 정체가 점차 선명해진다.

영화는 각자 '미워할 이유가 충분한' 여덟 사람이 오두막에 갇히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이유 말이다. 폭설로 외부와 단절되고, 두려움과 분노로 이성의 끈을 놓칠 상황이 이어진다.

'느릿한 스릴러' 보여준 타란티노, 박수받을 만하다

 영화 <헤이트풀8> 포스터.

영화 <헤이트풀8>의 포스터 ⓒ (주)누리픽쳐스


<헤이트풀8>에는 급박한 화면 전환, 숨어있던 인물이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튀어나오는 장면, 쫓고 쫓기다가 주인공이 승리하는 뻔한 추격전이 없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로 마치 '이런 거 없이도 스릴러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하다.

숨을 공간조차 없는 탁 트인 오두막에서 여덟 사람의 공방에 따라 상황은 수시로 변한다. 그런데도 전개는 숨 막히게 빠르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영화 상영 도중에 '제1장' '제2장'과 같은 식으로 부제를 달면서 흐름을 끊기까지 한다. '느릿한 스릴러'란 표현이 있다면 이런 영화에 쓰일 묘사가 아닐까. 천천히 전개되는 줄거리에도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영화 후반부까지 팽팽하게 계속된다.

나지막이 이어지는 대사만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은 타란티노 감독이 지난 작품부터 쭉 쌓아온 실력으로 보인다. 2009년 작인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 그랬고, 2012년에 개봉한 <장고>의 초반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예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직접 출연했던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대사마다 신랄한 풍자와 유머감각이 돋보인다.

<헤이트풀8>에서는 감독이 가장 잘하는 것을 모아서 극대화한 느낌이다. 어느 순간에 관객의 뒤통수를 쳐야 전율을 느낄지 안다는 듯이 치밀하게 짜놓은 줄거리는 박수받을 만하다. 양념처럼 더해진 영화음악도 몰입을 돕는다. '악당'과 '더 지독한 악당'을 가득 채워 넣은 등장인물 구성도 흥미롭다. '과연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까' 싶은 이 영화, 새해 극장을 찾아 관객이 직접 결말을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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