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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MBC예능국 권성민 PD가 9월 25일 오전 마포구 MBC상암사옥 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권 PD는 지난해 <오늘의 유머>에 세월호참사 관련 보도를 비판한 '엠병신 PD입니다'는 글을 올렸다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고,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예능국 이야기>(일명 유배툰)를 올렸다가 해고를 당했다.
 MBC예능국 권성민 PD가 9월 25일 오전 마포구 MBC상암사옥 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권 PD는 지난해 <오늘의 유머>에 세월호참사 관련 보도를 비판한 '엠병신 PD입니다'는 글을 올렸다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고,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예능국 이야기>(일명 유배툰)를 올렸다가 해고를 당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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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드라마 <송곳>을 보며 자꾸 한 청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도 한 발을 내딛고야 말았다. '오늘의 유머'에 글을 올렸고, "일단 몸을 좀 사리라"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웹툰을 그렸다. 그리고 기어이 해고를 당하고야 말았다. 1심에서 재판부는 회사가 힘을 남용한 것이라고 그의 손을 완벽하게 들어줬지만, 회사는 "기형으로 난 떡잎은 잘라내야 한다"며 한사코 복직을 거부했다. 곧바로 항소를 선택했다.

권성민 전 MBC PD, 그와 여러 차례 만났고 전화로도 이야기를 나눴다. MBC PD란 명함을 '떼고' 가급적 청년 권성민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MBC와 싸우는 '투사'로서 이야기는 이미 다른 뉴스 속에도 넘쳐흘렀다. 그보다는, 드라마 <송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과 천안 오가며 일흔명 넘게 과외 공부해야 했던 청년

권성민, 그는 예비역 병장, 아니 한국군과 미군이 공히 인정한 '6성 병장' 출신이다. 작전병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군 생활 중 주한미군 봉사단체(USO)로부터 '명예 6성 장병'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작전병으로 차출되기 전에는 소총병으로 철책에서 근무했다. 그는 '노크 귀순' 사건으로 잘 알려진 22사단에서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의 군 생활 회고가 흥미롭다.

"부대장님이 존경스러운 분이었어요. 무슨 비리라든지 이런 건 정말 바늘로 뚫고 들어갈 틈도 없는, 정말 이순신이 살아 있었으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런 분이었는데, ('훈련은 빡셌겠다'고 묻자) 훈련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동료들이랑 '이순신 부하들은 이순신 '개 싫어했을 거'라고 그랬어요(웃음)."

으레 송곳 같은 사람하면, 갖기 쉬운 선입견을 깨는 이야기라 먼저 소개했다. 그는 까칠하지 않았다. 드라마 <송곳>의 이수인 과장이 그랬듯, 오히려 다정다감한 쪽에 가까웠다. 뾰족하게 들이받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른바 불평분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대학 시절 이야기 역시 그의 이런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의 대학 시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월, 화, 수, 목은 신촌(연세대)에서 학교 생활.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집이 있는 천안으로 간다. 부모님 품에서 쉬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말 낮 시간은 모두 청년부 회장이자 고등부 주일 교사로 교회에서 보낸다. 자신을 '권쌤'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이런저런 책임을 맡고 있어 서울 교회로 옮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밤에는 과외 선생,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과외 9군데를 돈다.

그러다 보니 일요일 밤 새벽 2, 3시쯤 집에 들어왔다가 월요일 오전 수업이 있으면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서울과 천안을 오가며 졸업할 때까지 일흔 명 넘게 과외를 했다고 한다. "군 입대 전날에도 머리를 밀고 새벽 2시까지 남은 과외를 해주고 집으로 돌아와 입소 준비를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압력이 높아질수록 밀도는 커진다

회사를 상대로 한 정직 및 해고 무효 소송 1심에서 승소한 MBC예능국 권성민 PD. 권PD는 지난해 <오늘의 유머>에 세월호참사 관련 보도를 비판한 '엠병신 PD입니다'는 글을 올렸다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고,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예능국 이야기>(일명 유배툰)를 올렸다가 해고를 당했다.
▲ MBC사옥앞에 선 권성민PD 회사를 상대로 한 정직 및 해고 무효 소송 1심에서 승소한 MBC예능국 권성민 PD. 권PD는 지난해 <오늘의 유머>에 세월호참사 관련 보도를 비판한 '엠병신 PD입니다'는 글을 올렸다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고, 이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예능국 이야기>(일명 유배툰)를 올렸다가 해고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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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입장이다 보니까, '진짜 열심히 가르쳐주자', '적어도 받는 만큼은 해 주자' 그런 생각으로 맡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어요. 그러다 보니 엄마들 입소문도 나고 나중에는 엄청 줄을 섰었거든요... 대학 다니면서, 늘 피곤하긴 했죠. 잠이 항상 부족하니까. 고된 걸로 따지면 엄청 고된 시기이긴 했는데요. 그래도 밀도 있게 살았던 시간인 거 같아요."

압력이 높아질수록 밀도는 커지기 마련이다. 삶에서, 특히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의 삶에서, 경제적 압력은 삶의 밀도를 지배하는 요인이다. 그가 일찍부터 집을 나와 생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족들이 살던 가건물 형태의 집, 당장 방 빼라고 하면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부 곧잘 하는 아들을 위한 부모님의 선택은 당신들의 품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었다.

"독립이 빨랐다. 한 방에 여덟씩 자는 후줄근한 기숙사나마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과 산 것은 열여섯이 끝이었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쩌면 훌륭한 사례다. 학원이나 과외는 남의 일이었다. 공부방도 한 번 가져본 적이 없었다. (2015년 3월 26일 PD저널에 실린 글, 가난을 증명하는 대가 중에)"

그의 아주 어렸을 적 기억 중 하나는 '속옷 같은 거 방문 판매하는 엄마 손을 붙잡고 따라다녔던 것'이다. 무슨 일감을 받아 온 어머니가 실밥을 잘라내는 모습도 기억에 있다고 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행여 다른 자식들과 비교될까 항상 옷을 깨끗하게 잘 다려 입혀서 학교에 보내주던 어머니이자, 새벽 5시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아침밥도 늘 준비하던 아내이기도 했다.

그렇게 다니던 아버지의 회사 생활은 IMF로 끝이 났다고 한다. 천안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아버지가 시작한 것은 낚시 가게. 그로부터 16년 동안, 두 분 모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도 안 쉬고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식한테 공개하지 않은 빚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아들은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별명이 애늙은이였던 이유

- 철이 좀 일찍 든 편 아닌가요?
"어렸을 때부터 별명이 애늙은이였어요(웃음). 동네 누나나 사촌 누나들이 날 보고 그랬대요. 콩알만 한 애가 만날 양반다리 하고 앉아 있다고, 얘 이상하다고(웃음). 아주 어릴 때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항상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서 자랐어요.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치신 것도 아닌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고생 많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철부지처럼 굴면 안 되겠다는, 응석을 부리거나 어리광을 부릴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항상 했던 거 같아요.

물론 저도 아쉬운 건 있었죠.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애초에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뭐 그런 것들? 나중에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면서 돈이 좀 더 있었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있었겠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빡시게' 살진 않아도 됐었겠구나, 그런 생각은 들곤 하죠.

아버지나 어머니, 너무 성실하세요. 요즘은 메밀국숫집을 하시는데, 새벽 5시에 나가셔서 밤 10시 넘어 들어오세요. 그렇게 하루 4, 5시간 주무시고 또 그렇게... 그래서 '하루 좀 쉬시라고, 병 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해도 늘 그렇게 하셔서... 장사를 하면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기 마련이잖아요. 안타깝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렇죠."

이어지는 생각은 자연스레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저렇게까지 열심히 사시는데 왜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까",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구조의 문제가 있겠구나",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른바 투쟁이 아니었다. 그는 "국제 구호 활동을 되게 많이 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을 '그냥 불쌍한 사람으로 타자화시켜서 사람들 동정심을 유발하게 해서 던져주는 게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고민을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하필' 예능 PD였다.

'기형적인 떡잎'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성민 PD의 국제 구호 활동 당시 모습
 권성민 PD의 국제 구호 활동 당시 모습
ⓒ 권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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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를 알고 있는 이들은 다들, 시사교양 PD될 거라고 하셨어요(웃음). 물론 물질적인 가난을 해결하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고, 너무나 중요한 일이고, 저도 마음을 쓰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가득 찬 건 좀 퍽퍽하잖아요.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 하려면 시사교양 쪽보다는 예능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예능 PD에 지원했습니다."

얼마 동안 MBC 자랑이 이어졌다. 또 얼마 동안 '현재' MBC에 대한 안타까움도 내비쳤다. 그 또래 직장에 다니는 이들이 다 그러하듯. 또 생각하면 그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또 다른 청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 내딛었을 뿐이다. 그러자 회사는 청년 권성민에게 '기형적인 떡잎'이란 말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곳이 MBC 1층 로비 안내 데스크였다. 내 이름, 회사 이름, 방문 목적 등을 적고 전화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내 주민등록증을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했던 대로 권성민 PD 역시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었다. "회사 이름 적어주세요"란 그 말을 대하는 그 마음이 어땠을까.

이 모습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가 '송곳'을 얼마나 기형적으로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때가 가장 싫다"고 했다. "예능국에 있는 선후배들과 같이 다시 일하고 싶다"는 그의 1심 최후 진술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9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서관 제305호 법정에서 권성민 PD가 MBC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무효소송 등에 대한 2심 판결 선고가 있다.

2년 전 오늘이라고 했다. 최근 권성민 PD는 "늘 이런 날만 가득한 세상이면 참 좋을텐데"란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경복궁에서 찍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2년 전 오늘이라고 했다. 최근 권성민 PD는 "늘 이런 날만 가득한 세상이면 참 좋을텐데"란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경복궁에서 찍었던 사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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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권성민, #MBC, #최후 진술, #송곳, #이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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