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페케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영화 <피케이> 스틸컷 피케이가 기도를 올리는 신은 특정 종교의 숭배 대상이 아니라 신 그 자체다.

▲ 영화 <피케이> 스틸컷 피케이가 기도를 올리는 신은 특정 종교의 숭배 대상이 아니라 신 그 자체다. ⓒ 와우픽쳐스


종교에 따라 신에 대한 관점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영화 <피케이> 속에서 종교는 힌두교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들의 교리와 관념을 취사선택하고 대중적인 인식 차원에서 전달한다. 이 글에서 신과 종교에 대한 개념은 영화의 것을 따른다.

외계인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것

영화 <피케이>는 '전지전능한 신의 나라 인도에서 인간은 어째서 끝없이 고통 받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마음속으로 한 번씩은 던져봤음직한 질문이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는 질문이기도 했다. 신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종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드러내놓고 질문을 꺼내는 사람은 이단이나 주정뱅이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피케이(peekay. 주정뱅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감히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피케이(아미르 칸)는 외계인이다. 그는 탐사 차 지구에 들렀다가 우주선을 조종할 리모컨을 도둑맞는다. 리모컨을 찾아 헤매는 그에게 지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의 존재는 그를 고뇌하게 만든다.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이며 기도에 담긴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려도 응답받는 경우는 드물기에, 신의 목소리를 접했다고 주장하는 성직자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피케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신이 성직자들의 입을 빌어 '재물을 봉헌하라. 으리으리한 성전을 지어라. 칼로 제 몸을 내리쳐라. 몸이 아픈 아내를 두고 험지로 순례를 떠나라'고 말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피케이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고통 받는데, 신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과 99% 흡사한, 하지만 1% 다른

피케이가 감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과 99% 흡사한 외계인'이기 때문이다. 처음 지구에 온 피케이는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점 몇 가지를 드러낸다. 우선 돈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말 대신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차이점은 피케이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기능적으로만 쓰인다.

일단 언어를 배우고 경제관념을 이해하게 된 피케이의 사고방식은 빠르게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리모컨을 찾아주지 않는 신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며 따지는 부분에서 시작해 인간에게 연정을 품고 갈등하는 부분에 이르면, 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새 잊힌다. 그가 인간과 본질적인 차이점을 보이는 1%는 종교다.

피케이는 종교에 대해서만 순수하게 무지하다. 아니 영화의 전개 차원에서 보면 '기능적'으로 무지하다. 피케이가 신을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줄 '서비스 담당자' 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1%의 무지를 극대화시킨 부분이다. 상황 분석이 다르니 문제 인식도 해법도 다르다. 피케이는 성직자가 자꾸만 '잘못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서비스를 요구하기 때문에 신 대신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약이 올라 말도 안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피케이는 '신은 죽었다'거나 '성직자들은 장사꾼'이라는 등의 말로 종교의 본질을 부정하는 대신 '잘못된 번호(wrong number)'라는 말을 슬로건처럼 사용한다. 이런 피케이의 태도는 상대를 에둘러 비판하거나 비꼬는 것과는 다르다. 신과 종교라는 관념에 대한 철저한 무지에 기인하여 종교의 본질을 재확인하는 긍정의 질문이다. 따라서 철저한 무지 속에 그 누구보다 확고하게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피케이에게 '이단', '악마의 아들'이라는 비판은 무의미하다. 종교는 그저 피케이의 순수한 질문에 답변해내는 수밖에 없다.

그가 외계인이 아니라 단순한 이방인이었으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제단으로서, 무신론자에게는 사회와 문화의 근원으로서, 종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피케이>가 던지는 순수한 질문은 종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외계인이나 품을 수 있는 판타지에 가깝다. 만약 'Wrong number'를 외치는 피케이 대신, <세 얼간이>의 교육철학자 '란초'가 'All is well'을 외쳤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 '이단'이자 '신의 배신자'로 낚인 찍혀 종교 테러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두 개의 이름, 두 명의 신

영화 <피케이> 스틸컷 피케이에게 종교는 패션이다. 종교의 차이는 인간 내면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차이만 드러낼 뿐이다

▲ 영화 <피케이> 스틸컷 피케이에게 종교는 패션이다. 종교의 차이는 인간 내면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차이만 드러낼 뿐이다 ⓒ 와우픽쳐스


종교가 힘과 테러만으로 질문을 억누른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서양 사회에서 중세 암흑기 이후 종교는 발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그 대신 종교는 인간의 고통에 나름의 이유를 부여해왔다. 이른바 신정론이다. 인간이 받는 고통을 내세의 영광을 위한 준비 과정,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는 악의 계책,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인간의 원죄라는 식으로 긍정했다. 그 논리는 종교에 따라 다양하지만, 신의 전능함과 인간의 고통을 분리해내는데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제는 현대에 접어들며 이성과 자유가 신앙과 계급을 차츰 몰아내면서 발생했다. 무신론자들이 급증했고 신앙인들도 믿음의 방법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피케이>에서 피케이의 인간 친구로 나오는 자구(아누쉬카 샤르마)는 그 분기점에 서 있다. 그녀는 독실한 신앙인인 아버지가 성직자로부터 받은 '자갓 자나니'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구'라는 이름을 고집하며 사는 인물이다. 그녀가 가진 두 가지 이름은 인도 사회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과거에는 신이 정한대로 질문 없이 살아가는 신정론적 종교관이 인도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성직자가 신의 목소리를 바르게 전하는지 끝없이 의심하고 제 나름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의 종교관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인도의 종교관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피케이와 자구는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영화는 구시대적 종교 관념으로 피케이와 자구를 옭아매는 힌두교 성직자 타파스비(사우라브 슈클라)를 통해 답을 내리려 한다. 타파스비는 피케이의 리모컨을 빼앗고 자구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고통이 커다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화 속에서 타파스비는 인간이 고통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신정론 그 자체다.

처음에 피케이는 타파스비가 '잘못된 번호'를 통해 신의 뜻을 물어봤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한대로 신의 존재를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성직자가 말하는 신은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 단호하게 말한다.

"신은 두 종류가 있다. 인간을 만든 신과 인간이 만든 신이 그것이다."

무분별한 긍정에서 가치 있는 의심으로. 피케이의 태도 변화는 인간이 신정론을 해체하고 현대적 관점으로 종교를 재해석하는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종교에서 ⟶ 정치로

영화 <피케이> 스틸컷 종교가 신의 뜻을 곡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TV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영화 <피케이> 스틸컷 종교가 신의 뜻을 곡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TV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와우픽쳐스


피케이와 자구가 얻은 답은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자구의 진정한 사랑을 입증하는 전화 한 통으로 성직자의 예언이 틀렸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종교 권력을 무장해제 시키며 답을 도출해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종교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질문에 답을 내리는 대신 질문을 던진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죽였다. 이는 신앙 그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 거기에 깃든 권력의 속성이었다. 권력은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순수성을 위협한다'는 혐의를 씌워 내친다. 이 속성을 이해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잘못된 번호'가 세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종교가 저물어도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정치로 완전히 이전됐다.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오래 전에 신정 분리가 이뤄졌다. 사회와 사상 차원에서도 현대에 들어 정치가 주도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 결과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을 마주했을 때 "신만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하는 인도에서도 사실은 정치에서 해법을 찾는다. 정치는 종교를 대신하는 만능 해결사가 됐다.

그렇다면 정치는 창조자의 뜻을 어떤 번호로 전달하는가, 그 번호는 잘못된 번호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를 통해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국민은 국가와 정부의 창조주다. 국민이 만든 국가이지 국민을 만든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피케이> 속의 인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이 개념은 상시적으로 혼동된다. 만약 국민을 만든 것이 국가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신의 뜻을 참칭해 교인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성직자와 매우 닮아있을 것이다.

<피케이>에는 헌금을 받고도 기도는 들어주지 않고 성전만 확장하는 교단이 등장한다. 세금을 거둬 복지와 안전에는 인색하고 잘못된 국책 사업으로 몇 십 조씩 날려먹는 한국의 행정기관이 겹쳐 보인다. 삶의 신산함을 토로하는 신도들에게 신의 목소리를 빙자해 고통을 권하는 성직자도 나온다. '국민이 나태하다'며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치인의 모습과 유사하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멋대로 신의 개념을 재설정하는 모습이 국민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이들의 정치관과 무섭도록 닮아있다.

우리가 외계인이 되자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에서 주인공 피케이를 연기한 아미르 칸, 누가 그를 50대라고 생각하겠는가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에서 주인공 피케이를 연기한 아미르 칸, 누가 그를 50대라고 생각하겠는가 ⓒ (주)와우픽쳐스


따라서 피케이가 대한민국에 던져야 할 질문은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 한국 사회를 당장 바꿀 수는 없다. 한국의 권력은 의문을 이견으로, 이견을 다시 이단으로 몰아세우는데 능숙하다. 의문을 품는 자들의 사회적 연결고리를 역추적해서 그들의 순수성을 마음대로 훼손해버린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세월호 침몰 사건 때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던 김영오씨가 있다. 권력은 김영오씨의 노조 활동 경력과 가족사를 물고 늘어져 질문의 순수성을 훼손했다. '금속 노조에서 활동한 것을 보면 정치적으로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거나, '이혼 후 딸을 잘 돌보지 않던 사람이 딸에게 과도하게 애틋하다'는 식의 비상식적인 반응이었다. 결국 김영오씨는 '피케이(주정뱅이)'라는 멍에를 짊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권력은 가히 종교를 방불케 한다. 그래도 이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본질적인 질문을 반복하는 것 밖에 없다. 피케이 같은 외계인의 도래를 바라서는 안 된다. 우리가 외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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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케이>   포스터

▲ 영화 <피케이> 포스터 ⓒ 와우픽쳐스



피케이 세 얼간이 아미르 칸 발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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