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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미술관.
 '이쾌대 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미술관.
ⓒ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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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정부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이 덕분인지, 올해는 유독 문화재청이 매해 실시하던 경복궁과 경내 국립고궁박물관, 창경궁의 야간개장에 관심이 쏠리는 듯하다. 헌데, 덕수궁은 상시로 야간개장을 실시한다. 그리고 그 경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역시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후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다시 광복 70주년. 그 덕수궁관에서는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화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거장 이쾌대 : 해방의 대서사' 전이다. 화가 이쾌대(1913~1965). 그리고 '월북작가' 이쾌대. 1930~1940년대 일제강점기를 관통해 해방 전후의 시대상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의지의 화가.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해방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예술가의 사명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화가 이쾌대를 조명하는 전시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8월. 이쾌대는 동료 화가인 진환에게 이런 서신을 전한다. 여전히 '친일'이 국론을 분열(?)한다는 주장이 횡행하는 시대, 그리고 그 친일파를 처단하는 내용을 직설화법으로 다룬 영화 <암살>을 약 천만 명이 관람하는 지금,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던 예술가가 맞이했을 광복의 벅찬 감동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기어코 고대하던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감격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경성의 화가들도 '뭉치자 엉키자 다투지 말자', '내나라 새 역사에 조약돌이 되자' 이와 같은 고귀한 표언 밑에 단결되어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소개 중

보수주의나 리얼리즘에 경도되지 않았던 이쾌대만의 독창적인 미학 

이쾌대, <군상4>, 1948년 추정, 개인소장.
 이쾌대, <군상4>, 1948년 추정, 개인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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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화풍은 관학풍의 보수주의적 입장도, 이념 중심의 좌파 경향도 아니었다. 그는 주체적인 자기 인식으로 근대미술사에서 리얼리즘 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이쾌대는 해방공가에서 남북한 미술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미학 이념을 만들어낸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월북 화가'라는 이력 때문에 남한에서는 40여 년 동안 잊혀져 왔다." - 조영복 저,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이쾌대 · 장엄한 역사의 서막을 알려준 화가의 손' 중에서.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쾌대의 <군상> 시리즈는 이러한 평가를 두 눈으로 직접 알현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해 준다. 마치 들라쿠르아의 낭만주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군상> 시리즈는 그러한 예술 사조의 기풍 아래 우리 민족적 현실을 단단하게 새겨 넣은 한국적 리얼리즘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군상Ⅳ>는 1948년 6월 8일 일어났던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는 진상이 자세히 알려질 수 없었지만, 실상은 대일 강화 조약 이후 미국이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하던 독도에 폭격을 가해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오폭은 1952년에도 다시 벌어졌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군상Ⅳ>를 비롯한 이쾌대의 군상 시리즈는 역사적인 상황과 민족적 울분을 대담하고 과감한 색체와 화풍으로 승화시킨 역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쾌대의 시대적인 인식은 1948년 '조선미술문화협회' 회장직을 맡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미술문화협회'는 식민지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실천적인 모색을 추구하며 반일 기조를 유지한 좌익 미술 단체였다.

예술은 물론 '뮤즈'였던 아내를 깊게 사랑했던 인간 이쾌대    

덕수궁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쾌대의 사진.
 덕수궁미술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쾌대의 사진.
ⓒ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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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는 휘문고보 5학년이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이란 작품으로 입선 후 일본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화가로 입문했다. 이번 전시는 '사랑을 그리다 : 1929~1937', '전통을 탐구하다 : 1938~1944', '시대를 끌어안다 : 1945~1953'의 챕터로 구분, 그의 예술세계를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 만큼, 이쾌대의 화풍을 리얼리즘으로만 단정해선 곤란하다.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자화상과 초상화와 같은 인물화부터 민족적 전통에 대한 탐구까지 다채로운 주제의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직접 쓴 서신이나 작품 준비를 위한 스케치 등 인간 이쾌대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유품들도 눈길을 끈다.

특히 20대 초반 결혼한 이쾌대가 전쟁 직후 떨어질 때까지 무한한 애정을 바쳤던 '뮤즈'인 아내 유갑봉을 그린 인물화들은 이쾌대의 화풍의 변화는 물론 당대 여성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한편으로, 그가 전쟁 직후 홀로 피난 길에 올라 아내와 세 자녀에게 쓴 절절한 감정의 서신도 전시돼 있다. 이 서신은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의 초상을 엿보게 해 주기도 한다.

또 유독 미남 예술가가 많았던 일제강점기, 그 스스로 모델이 되어 다양한 각도와 색체로 그려낸 자화상들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서구 사조와 민족적 예술의 접목을 고심했던 이쾌대였던 만큼,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소재의 그림들도 적지 않다. 그 중 <운명>과 같은 작품은 죽음과 운명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예술가 이쾌대의 시선이 꽤나 넓고 깊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단돈 1000원으로 만나는 광복 70주년, 그리고 해방 전후의 예술사적 이해  

이쾌대, <카드놀이하는 부부>, 1930년대, 개인소장.
 이쾌대, <카드놀이하는 부부>, 1930년대, 개인소장.
ⓒ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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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월북작가'를 '월북작가'로 부를 수 없는 아이러니다. 물론 이쾌대의 월북 이후의 삶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림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바다.

그러나, 전시의 주체인 국립현대미술관이 관람객들을 위한 간략한 도록에도 '월북작가'란 사실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정치적·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이쾌대가 학계를 통해 제대로 알려진 것은 민주화 바람을 탄 1980년대 후반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다되고 있는 2015년, 인터넷 검색 한 번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을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흘려 보내야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여기저기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곳곳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이나 친일문제에 관한 각성의 주장들이 들려 온다. 그 와중에 서울의 한복판인 덕수궁미술관에 마련된 '이쾌대 전'은 광복의 의미를 온몸으로, 그리고 예술적인 차원에서 기록하고 승화시키려했던 한 예술가의 초상을 마주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다.

특히나 '월북작가'이기에 그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훨씬 가치를 지닌다. 또 회화 작품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흥미롭게 엿볼 수 있는 서신이나 사진, 잡지들까지 마련돼 교육적 효과도 높다.

덕수궁 미술관의 관람료는 단 돈 1000원. 덕수궁 입장료만으로 그 몇 배의 가치를 즐길 수 있는 '이쾌대 전'은 11월 1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임시공휴일 연휴,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면, 놓치지 마시길.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이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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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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