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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박달나무의 꽃은 마치 커다란 애벌레를 보는 듯하다.
▲ 까지박달나무 까치박달나무의 꽃은 마치 커다란 애벌레를 보는 듯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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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양평 용문사로 올라가는 길가의 계곡물도 제법 커단란 소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6월 중순임에도 8월 한 여름 뙤약볕의 목마름이 느껴진다. 그래도 나무그늘로 가려진 산책길을 걷다보니 제법 시원한 숲바람에 잠시 속세의 가뭄 걱정을 떨쳐버린다.

사람이란 자기 중심적이라서 제 배 부르면 남의 배도 부른 줄 아는 것이다. 그게 사람의 한계면서도 타인의 결핍을 자신의 결핍처럼 느끼는 공감능력도 가지고 있으니 이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 양면성을 가진 존재, 나는 사람이므로 그런 양면성을 가진 존재가 싫지 않다.

목재가 치밀하고 단단해서 가구를 만들 때 많이 사용된다는 박달나무가 애벌레를 닮은 꽃을 내놓았다. 그들은 숲에 깃대에 살고, 꽃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피어나 나뭇잎이 햇볕을 가려주니 가뭄에도 아무 염려가 없겠다.

나무의 꽃을 풀꽃보다 조금 더 여유있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풀꽃의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않고 그저 꽃인듯 아닌듯한 꽃들을 피워내는 나무들이 많다. 자연에서는 아름답고 향기가 짙을 수록 그만큼 생존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이다. 같은 꽃이라도 척박한 절벽에 피어난 꽃이 더 짙고 향기도 진한 까닭은 생존을 위한 조건이 더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뭄에도 양귀비꽃이 화들짝 피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 원예종 양귀비 가뭄에도 양귀비꽃이 화들짝 피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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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심한 가뭄에도 어엿하게 피어난 양귀비, 원예종이지만 거의 야생과 다르지 않게 스스로 피어났다.

그들의 피어나는 모습은 신비스러움 그 자체다. 맨 처음 꽃몽우리일 적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바라본다. 하늘을 향해 절이라도 하는 듯 그렇게 줄기도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꽃을 피울 때가 되면 꼿꼿하게 고개를 든다. 아마도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지고나면 여전히 곳꼿한 줄기에서는 씨앗이 여물어간다. 그 씨앗이 여물어 바람에 다 날려가기까지 줄기는 말라 딱딱해질 지언정 시들어 흐늘거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내가 관찰한 양귀비의 모습이다. 어쩌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삶도 모범은 있으되 답안지는 없다는 사실에 그들처럼 살지 못함도 조금은 덜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누군가 작은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쌓았을 것이다.
▲ 돌탑 누군가 작은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쌓았을 것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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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진 고목의 밑둥에 쌓인 돌탑엔 어떤 소원이 들어있을까?
▲ 돌탑 베어진 고목의 밑둥에 쌓인 돌탑엔 어떤 소원이 들어있을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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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올라가는 산책길 양 옆으로는 작은 돌탑 무더기들이 쌓여있었다.

돌탑, 그것은 사실 전시에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돌을 쌓으면서도 전쟁없는 세상을 갈구하고, 혹여라도 전쟁이 나도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 둘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개인들의 소원이 하나 둘 쌓이게 되었다.

요즘의 전쟁은 양상이 달라졌으니 돌탑도 그 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공깃돌만한 돌멩이로도 탑을 쌓았고, 여기저기 아이들 장난처럼 작은 돌탑들이 소박하게 쌓여있다. 그 작은 돌탑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소원도 그렇게 작아졌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그것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작은 돌탑을 쌓으면서 빈 소원은 "첫사랑 이뤄주십사" 하는 소박한 것들이 주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소원이라면, 시주도 하고, 부처님께 빌었을 것이니 말이다.

여행객들이 툇마루에 앉아 쉼의 시간을 갖고 있다.
▲ 용문사 여행객들이 툇마루에 앉아 쉼의 시간을 갖고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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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어느 곳에서든 접속되어있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이곳에서조차 우리는 그 작은 화면을 바라보지 않으면, 터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 작은 화면을 통해서 보고 듣는 세상 소식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와 그 모든 느낌들이 아닐까?

사람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잠시 접속의 사회로부터 단절될 필요가 있다. 자연의 품에 안겼으면, 자연이 주는 소리를 듣고 보는 것이 자연에 대한 예의일 것이며, 사찰에는 부처의 말씀 하나라도 되새기며 속세의 짐을 벗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그럼에도, 삭막한 도시의 지하철이나 복사열 올라오는 도심의 보도가 아닌 곳에서의 접속은 그렇게 나빠보이지만도 않는다.

용문사 은행나무에 깃들어 사는 식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에 깃들어 사는 식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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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에는 1100살 즈음된 은행나무가 있다. 방문할 때마나 이 나무 전체를 담아보고 싶었지만, 담을 수가 없었다. 먼 곳으로 가면 그 숨쉬는 듯한 표정을 보지 못하고, 광각렌즈의 힘을 빌리면 지나치게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냥 다 담지 못해도 가까이에서 세월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나는 더 좋다.

은행나무의 옹이는 고난의 세월을 뜻한다. 저 옹이에 은행나무의 가장 깊은 향이 스며있을 것이며, 다른 부분보다도 훨씬 더 단단할 것이다. 그토록 단단한 옹이에는 민들레, 닭의장풀, 일엽초, 뱀딸기, 양지꽃 등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다래나무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은행나무가 품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존재도 제 품에 품어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11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도 불자가 되었고, 더 나아가 다른 존재들을 품으면서 부처가 된 것이다.

천 년의 세월, 감히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의 시간이다. 고작해야 한 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인지능력을 넘어서 있는 듯한 은행나무, 오랜 세월은 그를 그렇게 부드럽게 만들었다. 제 몸에 다른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말이다.


태그:#용문사, #까치박달나무, #돌탑, #은행나무,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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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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