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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양귀비와 샤스타데이지가 피었다.
 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양귀비와 샤스타데이지가 피었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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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시골은 가장 분주할 때다. 땅의 흐름을 터주고 작물들을 수확하기 위해 어르신들은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는다. 이른 새벽부터 사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한다.

땀 흘려 일하는 어르신들 앞에서 여유를 부리며 길을 따라 걷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 미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고사리 체취를 위해 잠시 산을 오르는 일 외에는 거의 집에서 나가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자연, 이게 진짜 '봄'

마당 곳곳에 샤스타데이지가 피었다. 저 뒤로 수국이 고개를 숙인 채 피어 있다.
 마당 곳곳에 샤스타데이지가 피었다. 저 뒤로 수국이 고개를 숙인 채 피어 있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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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집을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해야 맞다. 봄은 자연의 모든 것을 깨워놓았다. 여기저기 꿈틀거림이 느껴지고 하루가 다르게 자연은 변해가고 있다.

우리 집만큼 온갖 꽃들과 곤충, 파충류 등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없는 듯하다. 커다란 케이크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듯이, 자연의 한 조각을 떼어내 집 마당에 툭하고 던져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이 바스락 소리는 나를 자주 찾아오는 지네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다. 나는 지네가 무섭지 않다. 정말 무섭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말할 수 없다. 잠깐, 머리 정수리로 들어간 전류가 발가락 끝으로 빠져나오는 찌릿한 통증을 느끼기는 하니까 말이다. 이놈의 지네 때문에 나는 잦은 외출을 했다. 집 이곳저곳에서 마구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집을 벗어날 수가 없다. 지네가 찾아와도 뱀이 찾아와도 저 대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룸메이트와 함께 상추와 쑥갓을 심었다. 이른 봄에 쪽파와 냉이 그리고 민들레 잎으로 따서 먹었고 봄의 절정기인 지금은 부드러운 상추와 향기 나는 쑥갓이 자라 밥상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룸메이트가 나를 위해 딸기밭을 만들었다.
 룸메이트가 나를 위해 딸기밭을 만들었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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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딸기, 딸기."

그랬다. 나는 매번 딸기를 먹고 싶다고 외쳤다. 그래서 룸메이트는 마당 한쪽에 딸기밭을 만들었다. 매일 두 꼭지씩 따서 먹고 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이 딸기밭으로  간다. 혹시 익은 딸기가 없는지, 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음으로 가는 곳이 상추와 쑥갓을 따러 간다. 너무나 부드러운 상추는 손에 힘을 조금만 주어도 부러져버린다.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니면 어디가 무릉도원일까

연못 위로 수국이 떨어져 물 위에 생크림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연못 위로 수국이 떨어져 물 위에 생크림을 뿌려 놓은 것 같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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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온몸에 난 솜털을 간질이는 바람이 불어오고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앉아 있노라면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를 몰아서 지금 다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아침을 굶어야 했고, 점심도 5분 안에 먹어치웠다. 점심시간을 쪼개 부족한 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회사 근처 커피숍 소파에 몸을 구긴 채 피곤함을 달래던 일이 떠오를 때면 내가 왜 그리 살았나싶다.

시골로 내려오니 다급함이 많이 사라졌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예의를 갖춘다며 화장을 할 필요도 없다. 어떤 일을 해도 다급하지 않은 것이다. 

숲 속을 연상케 하는 마당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있다. 샤스타데이지와 붉은 양귀비가 마당 가득 피었다. 이름도 어려운 샤스타데이지는 미국의 육종학자가 국화와 데이지를 접목해서 개량한 꽃이라고 했다. 인디언말로 샤스타가 흰색을 의미한다고 룸메이트는 5월이 되면 샤스타데이지를 보며 내게 이 설명을 해준다. 내 기억력의 짧음으로 매번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물었던 것 같다.

5월이면 룸메이트가 가꾸어 놓은 마당에는 흰 무꽃에 노란 갓꽃이 허드러지게 피고 오월 초부터 조금씩 자라나던 양귀비도 붉게 피어난다.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가느라단 몸을 하고 있는 양귀비는 크기도 키도 제각각으로 자라나 사방에 피어나 내 눈을 홀린다. 양귀비의 붉은 빛깔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 사이로 피어난 샤스타데이지 덕분이다. 흰색과 붉은 색이 조화를 이루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배도 고프지 않고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 그 사이로 자라난 잡초를 뽑는 일 또한 힘들지 않다.

참 이상한 것은 3월 수선화가 피어날 때는 사람들이 집을 자주 찾아왔었다. 그런데 양귀비가 온 마당을 수놓는 5월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계획한 듯이 끊어진다. 그래서 양귀비가 온 마당을 뒤덮을 정도로 피어나는 이유가 꼭 나만을 위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를 위해 꽃이 피어난다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바람도 불고 볕이 좋아 빨래를 널어두고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잔디 위로 꽃눈이 쌓였다.  제 몸에 많은 꽃을 달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있던 수국이 이제는 버겁다며 꽃잎을 땅위에 쏟아놓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처음 본 2년 전, 수국 꽃잎이 눈처럼 가득 쌓인 사진을 '기상이변으로 이곳에는 눈이 내렸다.' 라는 글귀와 함께 친구들에게 보냈었다. 친구들 모두 그 사실을 믿었다. 오래 전부터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말이다. 놀란 친구들은 이제 지구가 멸망할 징조다, 우리나라가 열대기후로 변한다더니 그 반대가 되려고 그러는 것 같다며 각자의 생각을 내게 전했다. 뒤늦게 수국 꽃잎이 떨어져 쌓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친구들은 내가 살고 있는 시골로 내려오고 싶다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찾아오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기 바쁘다는 것이 이유였다. 잠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친구들은 잠을 청하겠다고 한다.

서울에서 3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시골로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타야하고 이십 분 이상을 걸어야 우리 집 마당에 다다를 수 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니 찾아오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연의 한 조각을 떼어놓은 우리 집 마당을 둘러보면 그대들도 나처럼 발길을 밖으로 돌릴 수 없게 될 것이다.


태그:#양귀비, #샤스타데이지,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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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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