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기계에 불과한 컴퓨터가 부러워지는 순간, 바로 '포맷' 기능을 쓸 때다. 이것저것 쌓인 기록과 기억을 깨끗이 들어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판단과 실행이 한결 빠르고 가볍다. 그러나 아쉽게도 컴퓨터를 만든 사람에겐 포맷 능력이 없다. 잊고 싶은 과거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 기억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드라마는 기억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대중의 갈망을 '기억상실증'이라는 유용한 장치로 풀어냈다. 의학적으로는 가능하더라도 현실성은 상당히 떨어지는 이 테마가 꾸준한 사랑받은 것은 강력한 반전을 불어넣고 싶은 작가의 욕구에 가장 충실히 봉사하는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속 기억상실증은 진화했다. 최근에는 인물이 마치 시청자와 같은 시각에서 주인공의 기억상실증을 분석하는 모습을 그려내 색다른 현실감과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일부 작품은 우연한 사고로 기억을 잃고 회복하는 뻔한 구도를 답습해 고전적 테마가 지닌 한계를 스스로 노출하기도 했다.

<후아유-학교 2015>, 주변 인물이 주인공 증상 분석

 드라마 <후아유-학교 2015>에 출연한 육성재와 김소현, 남주혁(왼쪽부터)

드라마 <후아유-학교 2015>에 출연한 육성재와 김소현, 남주혁(왼쪽부터) ⓒ KBS


'스타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드라마 <학교> 시리즈를 2년씩 기다린 시청자는 초반부터 등장한 기억상실증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주혁과 김소현, 육성재(비투비) 등 대세 청춘스타를 기용한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5.9%(닐슨코리아 기준)를 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드라마를 지켜본 시청자는 이 작품에서 묘사한 기억상실증이 이전 작품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지난 5일 방송된 4회에서는 주인공(이은비, 김소현 분)이 보인 기억상실증에 학급 친구들이 의문과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장면이 등장했다. 이들은 사람이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글씨체처럼 몸에 밴 습관은 잊히지 않는 점을 언급하면서 주인공(이은비)의 글씨체가 자신들이 원래 알고 있던 인물(고은별)의 글씨체와 전혀 다른 점에 주목했다. 주변 인물이 기억상실증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상식과 지식을 갖고 주인공의 행동을 분석하는 설정이 연출된 것이다.

보통 지금까지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기억상실증을 주변 인물이 평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쳤던 점과 비교하면 사뭇 진화한 설정이다.

<냄새를 보는 소녀>, 아직은 예측가능한 스토리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에 출연하는 박유천(왼쪽)과 신세경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에 출연하는 박유천(왼쪽)과 신세경 ⓒ SBS


<후아유-학교 2015>가 비교적 뻔한 테마를 쓰면서도 활용법에 변화를 주려 했다면, SBS 수목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는 창의성이 떨어지는 극 전개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주인공이 기억을 잃고 회복하는 계기를 모두 교통사고로 설정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스토리 전개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12회 기준 6.9%(닐슨코리아 기준)에 머물렀다. 초감각과 기억상실 등 유사 테마를 활용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23%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주인공(이종석 분)이 과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게 맞는지를 두고 시청자의 판단이 엇갈리게 만드는 장치를 배치해 극 전개에 흥미를 불어넣은 바 있다.

현실 조명한 드라마에 시청자 열광...비현실적 코드 이제 그만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하더라도 기억상실증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카드가 분명하다.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 채널에서 수십 편의 드라마가 동시에 쏟아지는 시대에 시청자가 "또야?"라는 반응을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시청자가 경험하기 어려운 특이한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 자체가 약발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다. 드라마의 '본방 사수' 인구가 급감하는 가운데도 최근 눈에 띄는 본방 시청률 성적을 낸 작품을 살펴보면 현실을 깊숙이 파고든 '리얼리티 드라마'가 다수를 이룬다. 청춘드라마 중에는 <연애의 발견>과 <미생>이, 가족드라마 중에는 <가족끼리 왜이래>가 있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는 하루하루가 고달픈 시청자에게 최고의 선물이자 힐링의 수단이 된다. 이러한 때 웬만하면 경험할 일 없는 기억상실 따위가 시청자에게 공감과 설렘, 재미를 줄 여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기억상실증 테마로 아시아 시청자를 공략한 뒤로 13년이 흘렀다. 이제 이만하면 됐다.

후아유-학교 2015 냄새를 보는 소녀 기억상실증 이강훈 이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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