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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매일 오후, 두 시간 동안 격렬하게 산책을 했다고 한다. 주머니엔 연필과 악보가 있어서 떠오르는 악상을 재빨리 옮기면서 말이다.

현대인 중에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있다. 걷느니 굶는 걸 택할 만큼 움직이기를 싫어하던 내가 가을 덕에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적당히 즐기는 것도 아니고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10년을 갇혀 산 아이니 충분히 누리게 해주고 팠고, 기피하던 분야를 '오늘부터 좋아함!' 하고 마음먹으니 다른 세상이 보이더라. 베토벤의 천재적 생산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가을의 보호자로서 산책을 하며 깨닫고 배운 점들이다.

사람만 다가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가을이

산책길에 만난 친구 유리창 건너편에 있어도 대단히 무서워하는 중이다
산책길에 만난 친구유리창 건너편에 있어도 대단히 무서워하는 중이다 ⓒ 박혜림

"아이 귀여워"하고 가을이에게 손을 뻗는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무안을 당한다. 가을은 사람들의 접근에 한밤 중 소복 입은 귀신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다. 걷던 방향을 황급히 바꾸고 귀를 접은 채 눈물이 금세 그렁해져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모른다. 줄을 당기며 멀리 가고 싶어하고, 내가 안고 있다면 밀어내면서까지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

이름을 부르면 친해지리라 예상하고 쉼 없이 "가을아! 가을아!"하는 분들에게도 다름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크고 갑작스럽다. 가을이는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차라리 1m쯤 떨어진 곳에서 잠자코 지켜봐 줄 때 거짓말처럼 먼저 다가가 냄새를 맡는다. 어쩔 땐 인사를 청하듯 조심스레 왼발을 건네기도 한다.

입양을 하고 약 1년 10개월간 하루에 최소 두 번의 산책을 한 가을이가 겨우 이 정도다. 그동안 만난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도 발전이 참 더디다고 볼 수도 있다.

"이상하다, 나를 싫어하는 개는 없는데"... 알고 보니

원하는 것을 향해 앉는다 나가자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가을의 뜻을 이젠 읽을 수 있다
원하는 것을 향해 앉는다나가자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가을의 뜻을 이젠 읽을 수 있다 ⓒ 박혜림

사실 나도 가을이와 만나기 전엔 동물을 보면 손부터 뻗었다. 눈을 맞추고 말을 걸고 안아보고 싶어했다. 공격을 당한 적은 없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동물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공부한 이후로 이젠 그들의 '거부 신호'가 읽힌다.

만약 어떤 강아지가 고개를 돌려 나의 시선을 피하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지금은 내버려두라는 뜻이다. 몸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기분이 나쁘다는 듯 앞니를 슬쩍 드러내거나,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말아 넣기도 한다. 긴장한 눈빛으로 짖으며 꼬리를 좌우로 강하게 친다면 그 또한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쓰다듬거나 안아 들었다? 강아지는 비록 얌전해 보일지라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이런 반응은 보호소에 있는 강아지들에게 특히 뚜렷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 나를 싫어하는 개는 없는데" 라고 말하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버림을 받고 상처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싫어요', '무서워요'의 표현은 생존과 직결됐기에 더 확실하다.

동물행동학을 연구한 책들을 통해 이들에게 자극을 적게 주면서 다가가는 법을 배웠다. 아직도 나에게 쌀쌀맞은 그 애를 서운해 말자. 말은 못해도 힘든 역사를 갖고 있을 테니. 그저 밥을 주고 청소를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덜 느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인간의 뻗은 손, 두 눈, 몸의 정면, 말소리는 동물에게 이해하기 힘든 위협의 대상이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가 암묵적으로 지키는 예의가 있듯이 그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은 측면으로 틀어 개에게 내 몸의 앞, 뒤가 다 노출되도록 앉는다.

몸집이 큰 개도 눈높이는 우리보다 거의 낮으니 앉는 게 중요하다. 시선도 개를 응시하기 보단 슬쩍 피해준다. 뚫어져라 바라보면 아무리 사랑을 듬뿍 담았다 할지라도 그들을 떨게 만들 수 있다. 만지고 싶고 이름을 부르고 싶겠지만 역시 참자. 안정된 후에 말을 걸어줘도 늦지 않다.

그리고 핵심은 천천히 하품을 하고 쩝쩝 입맛을 다시는 행위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낯선 환경에서 개들이 하품을 하고 혀로 코를 핥아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을이도 원하지 않는 곳에서 지체해야 하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이 가까이 오면 똑같이 행동한다.

우리도 그들에게 조금은 긴장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같이 릴렉스하는 게 어때? 눈도 느린 속도로 깜박거리고 숨도 침착하게 쉬어본다. 개들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소란스럽고 빠르다. 아무 말 없이 이 행동만으로도 경계하던 개는 서서히 안정을 취할 수 있다. 물론 한 번에 해결이 될 것이라 기대하지 말고 반복하며 기다려주기. 조급해하지 말고 믿어주기.

1000회 학습의 효과, 이럴 줄이야

기다리는 중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렇게 멀끔하게 앉아 기다린다
기다리는 중가르쳐주지 않아도 저렇게 멀끔하게 앉아 기다린다 ⓒ 박혜림

개는 이벤트보다 규칙성을 더 선호하는 생명체다. 어쩌다 한 번의 깜짝 선물은 애인에게나 하고 반려견에겐 꾸준한 관심과 인내가 동반된 생활 패턴을 주어야 한다.

나와 발을 맞추어 나란히 걸으며 기다릴 줄 알고, 보채지 않는 가을이를 무척 신기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고 신호를 기다리고 자동차 소리에 멈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유기견은 원래 눈치가 빠르다고도 하고, 나이가 많으면 원래 똑똑해진다고도 한다. 내 생각엔 매일 매일의 반복이 자연스럽게 학습이 된 것 같다. 그 어떤 훈련이나 교육 없이도 가을이는 나의 길을 읽고 나의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 번 이상의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쐰 강아지는 엄청나게 들뜬다. 짧은 목줄은 뒤에서 당기고 있고 곳곳마다 마킹을 하고 싶지만 주인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상엔 놀라운 냄새가 가득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반가움의 연속이다. 온갖 것들의 자극에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견주는 녀석의 허둥대는 모습이 마뜩잖다. 점잖은 가을이를 보며 부러워하지만 사실은 천 번의 학습이 바탕이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다.

후미진 골목에서 '짐승남' 만나도 산책은 포기 않겠다

어느 날 앞서 걷던 가을은 취객의 노상방뇨 현장을 목격한다. 인간이 마킹하는 모습을 처음 본 우리의 소심견, 문화 충격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취객에게 다가가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이른다. 이것은 왜 이러고 있는가. 왜 하필 내 구역에서 이러는가.

그때, 뒤통수가 뜨거웠던지 가을의 시선을 파악한 취객이 냅다 소리를 지른다.

"크롱크롱!! 멍멍!! 왈왈!! 이히히히!!"

마킹하는 인간의 포효에 가을은 혼비백산 줄행랑. 개인지 인간인지, 가을은 정체가 궁금했을 것이다. 후미진 골목에서 '짐승남'을 만날지라도 산책을 포기하지는 않겠다.


#가을이#유기견입양#개의사회성#산책 만세#마킹하는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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