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로우 비디오>  2014년 김형탁 동체시력으로 평생 선글라스를 끼며 세상과 담을 쌓던 아이가 그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 차태현의 필모그라피에 또 하나의 발자욱을 남길 것이다.

▲ 영화 <슬로우 비디오> 2014년 김형탁 동체시력으로 평생 선글라스를 끼며 세상과 담을 쌓던 아이가 그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가는 이야기. 차태현의 필모그라피에 또 하나의 발자욱을 남길 것이다. ⓒ 김승한

사물이 움직이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동체시력'의 소유자 여장부(차태현)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시력으로 인해 따돌림을 받는다. 고속 카메라로 보는 것 같은 동체시력이 너무 강해 날아오는 공을 실밥까지 보며 손으로 잡아내는 가하면, 일정거리에서 숟가락에 숫자를 적고 던져도 숟가락을 손으로 잡는 것은 물론 숟가락에 적힌 숫자까지 알아맞힌다.

이런 능력 때문에 그는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고 그 상처로 인해 20년 동안 집에서 칩거생활을 한다. 그랬던 그는 CCTV관제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동체시력'을 발휘, '다크호스'로 떠오르게 된다. 그렇게 세상에 발걸음을 내밀게 된 여장부에게 하나 둘 친구들이 생기게 되는데….

느리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영화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 번호판을 읽을 수 있을까? 떨어지는 낙엽을 허둥대지 않고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을 수 있을까? 2m의 거리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야구공이 회전과 실밥이 돌아가는 것을 감상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잡아낼 수 있을까?

아님..., 환하게 웃는 여성의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의 색깔과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하여 보면 슬로우 모션으로 볼 수 있다. 큰 소리로 질책하는 상사의 침 튀는 장면도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바이올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연주자의 손가락 모양과 비브라토 모션까지 정확하게 보며 흉내를 낼 수 있다.

사랑스런 눈으로 연인을 보고 있으면 그녀의 향기가 내게 날아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고, 눈웃음 칠 때의 눈가의 떨림과 속눈썹의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다. 얼굴을 씰룩대며 애교 섞인 목소리가 보여주는 입술의 주름과 순식간에 사라지는 빨간 잇몸과 하얀 이의 수까지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영화 <슬로우 비디오> 수미 역의 남상미와 장부역의 차태현의 연기가 불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색함을 제대로 짚어냈다. 그외 조연들의 찰떡같은 연기도 일품이다.

▲ 영화 <슬로우 비디오> 수미 역의 남상미와 장부역의 차태현의 연기가 불편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색함을 제대로 짚어냈다. 그외 조연들의 찰떡같은 연기도 일품이다. ⓒ 20세기 폭스 코리아


집중과 관심과 사랑은 슬로우 모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언제부터 느림의 미학을 잃어버렸던가? 영화 <슬로우 비디오>는 이러한 물음에, 200개의 감시카메라에 찍힌 이들의 일상을 주인공으로 끌어들인다. 기면증에 쓰러져버린 아버지를 리어카에 끌고 가는 아이, 밤마다 혼자 캐치볼을 하는 남성, 집에서 나와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취객의 난동까지 각각의 카메라에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이 있다.

속도전의 시작은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남을 짓밟기 위해 준비하는 전쟁과 그 전쟁을 준비하는 분주한 손길,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쟁업체를 밟고 일어서려는 혼신의 노력, 한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한 몸부림은 자연의 이치와 거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전의 보이지 않는 힘은 속도전의 연장이다. 언론과 미디어는 양질의 보도보다 '속보'를 우선시 한다. 영화는 30초마다 화려한 액션이 보여야만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정직하고 여유로움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치러 탄생해야할 문학과 예술작품조차도 출판사의 집요한 전화와 기획사의 독촉 속에서 만들어진다. 현재는 그야말로 속도전이다.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인생이라는 열차에서 강제로 하차해야 하는 운명 그 자체이다.

고착화는 빠름과 경쟁의 부산물

영화 중반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여장부는 사랑하는 여인 수미를 위해 마을버스를 빌려 부산 해운대를 가려고 한다. 그러나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인다. 왜 마을버스가 마을을 다니지 않고 고속도로로 나오느냐고! 그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

"경찰 아저씨, 마을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면 안 되나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은 슬로우 모션을 통해 코믹하게 만들어졌다. 도로경찰과 여장부, 수미, 공익근무요원, 마을버스 운전기사, 그리고 꼬마 손님. 이들은 경찰을 향해 항의하며 삿대질을 해댄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은 마을버스 마을버스를 빌려 부산 해운대로 가려했으나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은 마을버스 마을버스를 빌려 부산 해운대로 가려했으나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 20세기 폭스 코리아


좁고 아스팔트 깨진 길을 터덜터덜 달리던 마을버스가 왕복 6차선의 잘 정돈된 고속도로를 달릴 순 없나? 뭐 어차피 기름 값을 따로 대주고 하루 렌트했으니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마을버스라는 이유만으로 고속도로 진입을 허용할 수 없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나친 경쟁으로 만들어진 삶에서 고착화되어 있는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바다를 보고 싶다는 수미의 간절한 바람은 절망에 부딪히지만 나중에 여장부가 그린 그림에는 바닷가 모래밭 위에 수미가 서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주인공인 여장부는 어릴 때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산다. 동체시력 때문에 빠르게 달리게 되면 옆으로 넘어진다. 그의 눈은 세상을 천천히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다른 안과적 질환으로 독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그이기에 세상은 그에게 선글라스를 끼도록 강요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선글라스를 낀 것이 아니라 그를 제외한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두려움으로 바라보던 여장부는 실명한 이후 자기만의 세계를 그렸다. 그 세계는 어릴 적부터 동체시력으로 불편하게 살아와야 했던 여장부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이다. 거기엔 일상의 순간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가 보고 싶어 했던 그리고 수미에게 해주고 싶었던 바람들이 담겼다.

CCTV관제센터에서 일하며 여장부는 종로구 일대의 골목골목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낸다. 감시카메라가 있는 모든 곳을 주시하며 스케치를 하였고 그 거리만큼 직접 걸어 다니며 몇 걸음으로 갈 수 있는지 모두 계산해 놓았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감시카메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만의 독특한 단어로 세워 놨다. 그리고 영화 종반부에 보면 여장부 방의 벽에는 그가 그동안 그렸던 동네의 모든 골목길과 건물들이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듯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렸다고 하기엔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주인공 여장부와 그가 그린 동네의 모습  선글라스를 낀 것은 여장부이지만, 세상 모두가 선글라스를 끼고 여장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 동네의 지도를 그려가며 발걸음까지 세어가는 모습은 세상을 향한 그만의 소통법이다.

▲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주인공 여장부와 그가 그린 동네의 모습 선글라스를 낀 것은 여장부이지만, 세상 모두가 선글라스를 끼고 여장부를 쳐다보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 동네의 지도를 그려가며 발걸음까지 세어가는 모습은 세상을 향한 그만의 소통법이다. ⓒ 20세기 폭스 코리아


그가 그렸던 그림과 동네 골목길을 따라 벽을 짚어가며 숫자를 세는 것은 그만의 세상과의 소통 법이었다. 시력이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보이는 것들을 이용하며 살아가듯이 여장부는 그만의 방법으로 세상으로 나와 영역을 넓혀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신체적 특징일 수도 있고 마음의 병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특이한 점만을 장애로 인식하며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장부를 제외하고 모두 마음 한 구석에 조금 다른 특이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대로의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며 세상과 만나고 있었고, 여장부는 여장부대로 세상과 소통의 방법을 배워나갔을 뿐이다. 신체적 불편함은 남들과 다를 뿐이지 장애는 아니다.

'기다림의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배워보자. 자본주의, 자유주의 체제가 발달할수록 세상은 경쟁 없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어 간다. 여기에서 스피드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필요불가결한 존재다. 그러나 육체적 상처보다 심리적 상처가 사람의 육체와 마음을 더 위축되도록 한다. 떨어지는 낙엽을 부서지지 않게 잡을 수 있을 만큼, 내가 사는 동네의 골목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풍경을 찾아보는 여유를 갖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본인의 블로그에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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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비디오 동체시력 차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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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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