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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볼 때 예술작품처럼 보는 거예요."

얼마 전 종편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에서 한 남성의 발언에 많은 이들은 찬사를 보냈다. 낭만적인 남자라며. 하지만 내심 불편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불편함을 느낀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한 여성학자가 쓴,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발언을 비판하는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수용자에따라 찬사라고 느낄 수도, 불쾌를 느낄 수도 있다.
▲ Jtbc <비정상회담>의 한 장면. 같은 말이라도 수용자에따라 찬사라고 느낄 수도, 불쾌를 느낄 수도 있다.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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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성은 꽃이다'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이 언설이 작동하는 의미 체계에 있다. 남성은 보잘 것없는 이파리나 뿌리인데 여성이 꽃이라면, 이 말은 남성들의 주장대로 칭찬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유통되는 '여성은 꽃'이라는 담론의 전제는, 남성은 꽃을 꺾는 '사람'이며, 꺾는 행위는 성폭력 혹은 섹스를 의미한다. 꽃은 스스로 이동하지 못하고 사람(남성)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으며, 꺾였을 때 쉽게 시든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사람이거나 꽃일 때는 성희롱이 아니다. 하지만 남성은 사람인데 여성은 꽃이라면, 인권 침해가 된다. 꽃의 운명은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정희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최연희 의원과 '훼손된 꽃'' 가운데 발췌. 2006.03.31)

같은 발언이라도 누군가는 찬사로 느끼지만 누군가는 불쾌를 느낀다. 말은 그 자체보다 발화자와 수용자의 관계, 수용자의 세계관 등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애초에 그 누구에게도 불쾌를 주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불쾌를 느끼는 지점은 인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남자 침대에선 어떨까?"는 성희롱이다? 아니다?

지난 4일 방송된 SBS <매직아이>에서 칼럼니스트 곽정은씨가 가수 장기하씨를 두고 "'이 남자 침대에선 어떨까?' 상상한 적 있다"고 밝히며 논란이 됐다. 이에 대해 성희롱 논란이 일자, 곽정은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기하씨는 나의 그 발언에 대해 유쾌하게 받아들였다"며 성희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같은 말을 했더라도 직접적 수용자인 장기하씨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고, 간접적 수용자라 할 수 있는 시청자들의 일부는 불쾌감을 느꼈다.

"'이 남자는 침대에서 어떨까?'상상한 적 있다'고 말한 피처 에디터 곽정은씨는 성희롱 논란에 휩싸였다.
▲ SBS <매직아이>의 한 장면. "'이 남자는 침대에서 어떨까?'상상한 적 있다'고 말한 피처 에디터 곽정은씨는 성희롱 논란에 휩싸였다.
ⓒ 정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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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은 공적인 관계에서 사적으로 발화되며, 상대가 수치심을 느꼈을 때 성립한다. 또한 그 관계가 권력관계에 있을 때는 더 악질이다. 성희롱의 조건들이 주관적이기에 성희롱을 판단할 때, 발언 그 자체보다 어떤 관계와 맥락 속에서 발언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곽정은씨의 발언은 전형적인 권력관계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수용자가 흔쾌히 받아들였기에 죄질이 나쁜 성희롱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이 공적인 발언인지 사적인 발언인지는 그 경계가 애매하다. 

우선 방송인들의 사적인 이야기, 특히 성적인 이야기를 내보내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많아진 환경이 한 몫을 했다. 또한 곽정은씨의 직업이 '섹스'라는 사적인 것을 공적으로 이야기하는 '섹스 칼럼니스트'이기에 애매함을 더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고려하면 곽정은씨의 발언은 사적이며 은밀한 성의 욕망을 드러낸 성희롱이라기보다, 직업인으로서 공적으로 한 이야기로 봐야한다. 해당 프로그램의 흐름상 곽정은씨는 장기하 씨에 대한 일종의 평가를 해야하는 상황이었고, 그녀는 섹슈얼한 화제를 이야기하라고 불려온 섹스 칼럼니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이라는 환경 때문에 수용자는 장기하씨 당사자 한 명뿐만이 아닌 것이 문제다. 이때 방송을 보던 이들, 이후 기사로 그 발언을 마주한 이들은 성희롱 발언이 아니냐며 분노했다. 방송의 시청자들 역시 수용자라는 점에서 그들이 불쾌감을 느꼈다면 이는 성희롱 발언의 조건 하나를 충족한다.

당사자는 괜찮다고 하지만 옆에서 듣는 이들이 불편한, '실패한 섹드립'을 마주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방송인 신동엽이나 유희열이 인기 있는 이유가 당사자는 물론이고 시청자들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경계를 넘었다는 점에서 방송인으로서 재미없는 섹드립을 반성하는 기미는 보였어야 한다.

방송인 신동엽은 적절한 수위의 섹드립으로 시청자들의 꾸준한 호감을 얻는다.
▲ Jtbc <마녀사냥>의 신동엽. 방송인 신동엽은 적절한 수위의 섹드립으로 시청자들의 꾸준한 호감을 얻는다.
ⓒ 정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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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묻는 건 사회적 맥락 무시한 지적

하지만 '남자가 이 발언을 했다면 가만 두었겠느냐'는 논리는 사회적 맥락를 보지 않은 지적이다. 남성과 여성의 발언을 차이 없이 100% 같은 선상에 두기란 어렵다. 말의 사회적 의미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쉽게, 흑인에게 '까맣다'는 것과 백인에게 '까맣다'고 하는 것, 장애인에게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과 비장애인에게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남성도 수많은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해왔다는 사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의 경우와 비교하면 희박하다. 통계청(2010)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피해(여성 35.6%, 남성. 8%), 밤늦은 귀가 및 택시탑승 시 범죄율(여성 68%, 남성 19.7%), 집에 혼자 있을 때 낯선 사람의 방문(여성 62.2%, 남성 17.3%) 등 일상생활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성관련 범죄피해 사례가 높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하지 않은 여성은 희박할 정도다. 이러한 사회적 토대를 고려할 때, 여성을 향한 성적 발언은 남성을 향한 것보다 더 쉽게 모욕이나 폭력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남성이 여성을 향한 성희롱에 분노하는 것만큼 여성의 남성을 향한 성희롱에도 분노함이 맞다. 하지만 수용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고, 공적인 맥락이 있었다는 점에서 당사자를 대신해 정의로운 누군가가 분노를 터뜨려야만 하는 악질의 성희롱은 아니다.

그렇기에 곽정은씨가 장기하씨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에 불쾌감을 느낀 두 번째 수용자, 시청자에 대한 사과는 필요할 수 있다. 곽정은씨가 그의 블로그에 장기하와의 이후 관계를 설명한 후 마녀사냥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비치기보다, 불쾌감을 느낀 시청자에게 '내 발언으로 인해 불쾌감을 느낀 시청자들에게는 사과한다' 정도의 문장을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태그:#곽정은, #장기하, #매직아이, #성희롱, #섹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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