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차 세계 대전을 그린 역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10부작 드라마다. 그 중 7번째 시리즈는 미국군 공수부대가 숲 속에서 독일군의 대포격을 받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참호를 파고 무작정 버티고 지키는 미국군과 이를 뚫고자 무차별 포격하는 독일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최고의 공수부대조차 이 무차별 포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안 그래도 추위와의 싸움으로 녹초가 된 그들이었다. 와중에 포격으로 인한 불빛과 쓰러지는 나무를 보고 어이없는 웃음 짓는 이가 있다. 그는 어떤 연유로 그런 웃음을 짓는 것일까.

"파다 만 참호 안에서 생각나는 거라곤 꼬마 때 1월 4일 뿐이었다. 난 딱총이나 폭죽을 만드는 걸 즐겼다. 그걸로 흙더미나 병을 날려버리는 게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그날 포격처럼 무시무시한 광경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조 토이 일을 알았다면 웃진 못했을 거다."

무시무시한 포격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 떨리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드라마도 포격 장면을 위해 이 소설을 참고했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1차 세계 대전을 독일군의 시각에서 그린 에른스트 윙거의 <강철 폭풍 속에서>(뿌리와이파리)다.

투철한 사실성 확보...전쟁 직접 참여한 군인이 저술

<강철 폭풍 속에서> 표지
 <강철 폭풍 속에서> 표지
ⓒ 뿌리와이파리

관련사진보기

소총, 기관총, 수류탄, 박격포 등 쉴 새 없이 총탄이 오고 가는 전장. 그 '강철 폭풍' 중에서 단연 압권은 박격포의 포격이다. 이 소설에서도 이에 관한 단어와 묘사가 족히 수백 번은 나오는 듯하다. 그만큼 이 전쟁에서 포격은 반복되는 일상이다.

"밤에는 사납게 빗발치는 한여름 뇌우처럼 맹렬한 포격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고 나면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상하게도 안전하다는 느낌에 빠져서, 싱싱한 풀을 푹신하게 깔아둔 침대에 누워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벽에서 흙모래가 줄줄 흘러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기분이 엄습했다.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랜기간 동안 낭떠러지 끝에서 격한 삶을 살아낸 뒤에 오는 엄청난 심경의 변화 같았다." (321쪽)

작가가 화자인 만큼 투철한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다. 작가는 1차 세계 대전 참전 장교이자 종전 후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다. 직접 겪은 전쟁을 일기 형식으로 담아냈다. 수많은 전쟁 영화와 소설을 접한 필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의 미덕은 확실하다. 바로 전쟁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영웅주의, 반전주의, 이데올로기, 철학 따위의 첨부 없이 전쟁만을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이런 작품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일단 전쟁에 참여해 실제로 수많은 전투에 임했던 사람이어야 한다. 더불어 그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하며, 그 와중에 철저히 객관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글을 잘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작가는 이런 불가능할 것 같은 이력을 갖췄다.

소설은 시종일관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장의 일상을 그린다. 포격이 오가고, 가스전이 시작되고, 소총과 기관총이 불을 뿜고, 기어코 백병전에 다다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 작가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실제로 작가도 14번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한다.

스토리텔링 대신 객관화 선택한 책...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 소설은 우리가 제대로 접해본 적 없는 1차 세계 대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매우 낯설다. 미국식 영웅주의 또는 반전주의에 익숙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런 부류의 글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 콘텐츠에서 보여주는 사실적인 묘사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전쟁 '외(外)'가 아닌 '내(內)'만 그려낸 작품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충실하다 못해 지독하기까지 하다.

"그는 전쟁의 정당성을 분석하거나 그 결과의 타당성에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참가한 전투 그 자체를, 날마다 군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가 본 것과 그가 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이고, 그 점에서 이 작품을 따를 1차 대전 문학은 없다." (책의 뒤 표지)

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일상은, 무심히 반복되며 당연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사실 끔찍한 '폭력'이다. 폭력으로 인해 다치고 죽고, 폭력으로 상대를 다치게 하고 죽인다. 이 상황이 되풀이 되는 와중에, 어느 순간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된다. 폭력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접하고 <강철 폭풍 속에서>를 읽었다. 취향은 후자에 가깝다. 전쟁 그 자체만을 투철하게 그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스토리텔링도 재밌게 잘 읽혔다. 문학적 위대함은 후자가 훨씬 높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잘 읽히는 문학만 찾는 요즘 시대에 이런 문학의 출간은 뜻깊은 일이다. 최소한 '전쟁의 시대'라는 불명예만은 피하고 싶은 21세기 초.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순수 전쟁 문학은 어떻게 읽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강철 폭풍 속에서>,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15000원, 364쪽, 2014년 8월)



강철 폭풍 속에서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뿌리와이파리(2014)


태그:#강철 폭풍 속에서, #1차 세계 대전, #에른스트 윙거, #밴드 오브 브라더스, #서부 전선 이상없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