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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기 영화감독
 백승기 영화감독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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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객과의 대화로 바쁜데, 만나는 사람들이 영화보다 실물이 낫다고 해요(웃음)."

백승기(33·사진) 감독은 영화 '숫호구'(Super Virgin)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원준'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서른 살까지 연애 한 번 못해본 열등감에 사로잡힌 남성의 얘기인데, 백 감독 본인이 90% 투영된 연애성장담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어요. 지금까지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 영화 주인공에 그 여학생을 집어넣었죠.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이었는데, 그 여학생은 다른 남자와 사귀었어요. 그 남학생은 영화 속에 쓰레기로 나오는 '성호'라는 캐릭터와 같았어요. 얼굴만 반반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여성을 비하하고 가지고 놀던 놈이었죠. 이런 놈은 여자 사귀면 안 되는데, 내가 좋아했던 여자가 이놈하고 사귄다는 걸 듣고 충격이었죠. 영화 속 원준이 그 마음이었어요. 남을 괴롭히고 막 사는 놈들이 사랑받는 걸 보면서 여자의 마음을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뒤집혀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 감독은 2010년 겨울에 촬영을 시작해 2011년 2월에 끝내고 1년간 편집한 뒤 '숫호구'를 세상에 내놓았다. 장편영화는 처음이었다. 100만 원으로 만든 이 영화는 30만 원을 남겼다고 했다. 숱한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백 감독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인천으로 이사를 와 만석초, 화도진중, 인천예고, 인하대를 졸업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그에게 낯익은 동인천과 배다리이고, 영화를 찍는 동안 밥을 공짜로 준 이들은 동네 가게 주민들이다. 영화에도 출연한 부모 또한 든든한 후원자여서, 이동 시 아버지의 트럭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배우들은 대부분 지인들이었고, 출연료는 없었다.

"막무가내로 그냥 캠코더로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가 중요한지도 몰라 그것도 없이 그냥 상황을 설정하면 배우들이 알아서 대사를 했죠. 대사가 없다보니까 오히려 모두 연출자의 마음으로 하기도 하더라고요. 물론 부모님은 좀 달랐지만요(웃음)."

영화 속 부모 역할로 실제 부모가 출연해 원준과 식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몇 번을 해도 대사가 어색해 자막으로 처리했더니 오히려 그것이 영화의 묘미를 살렸다.

C急(시급) 무비

백 감독은 2004년 군 제대 후 영화감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2005년 꾸러기 스튜디오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이 영화사는 A급도 B급도 아닌 'C급' 무비를 표방했다.

"보통 저예산 독립영화를 B급이라고 하는데, 저처럼 영화 인프라도 없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독립영화시장에서도 대접을 못 받아요. 영화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B급도 안 되면 더 내려가자고 생각해 C급이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C급 무비에는 더 재밌는 영화철학이 담겼다. '캠코더(Camcorder)로 찍어 컴퓨터(Computer)로 코믹(Comic)한 시네마(Cinema)를 사이버(Cyber)에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하자'는 의미로 C급이라 칭했다.

상업영화는 한 편을 만드는 데 수십 개월이 걸린다. 기본적으로는 프리프로덕션·프로덕션·포스트프로덕션으로 나누는데, 시나리오 제작, 캐스팅, 영화 계획, 콘티 작성, 촬영, 편집, 더빙, 믹싱, 마케팅 등 엄청난 과정이다.

"돈과 과정이 어마어마하니까 아무나 못 찍는다고 생각하죠. 연극영화과 출신들도 어려워서 영화를 못 만들어요. 하지만 저는 그냥 사람들 모아서 찍어요. 모든 과정을 간소화하죠. 뭘 구색을 맞추려 해요? 시나리오도 없이 그냥 찍는 거죠. 우리는 오전에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바로 찍어서 편집하고 저녁에 술 한 잔 마시면서 완성된 거 보고 밤에 올리면 새벽에 피드백 달아주고 하루 만에 모든 과정이 이뤄져요. 우리 영화는 빨리 찍으니까 급할 급(急)을 달아 C급 무비라는 겁니다. 2005년에 동인천 삼치골목에 영화제작사를 차리면서부터 가진 저희 영화사의 정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패기 넘치는 영화제작사가 되자는 취지로 '글로발 C급 무비'를 주창했고, 하루 만에 찍는 영화라는 개념도 그때 만들었다.

산소호흡기 뗄 뻔한 영화
   
백승기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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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만들 때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영화제에 출품하면 알아줄 것이고, 극장에서 개봉하겠다는 각오로 만들었죠. 하지만 현실의 벽을 느꼈습니다. 장비나 기술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다 보니, 우리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입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걸 영화라고 만들었어?'라고 말하거나 별점을 보류했습니다. 반면에 '너희 작품도 엄연한 영화다. 패기를 인정한다'고 했던 분도 계셨죠. 저희 영화는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영화입니다."

소규모 영화제에서도 모두 탈락한 백 감독은 영화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상을 원망하며 비관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2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후지필름이터나상을 수상했다. 한국 최고 독립영화에 주는 상이라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후 1년간이나 배급하겠다는 회사가 없어, 이제 이 영화의 산소호흡기를 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아르헨티나 프로그래머가 우리 영화에 꽂혀 자기 나라에 초청한 적이 있어요.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영화에 꽂히면 올인(all in)하는 사람이 가끔 있어요. ATNINE(엣나인) 필름의 정상진 대표님이 우리 영화를 알아봐주시고 개봉을 추진했죠. 후원자를 잘 만났어요. 정 대표님은 평소에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을 키워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데, 개봉을 못했다고 하니까 도와주셨어요."

백 감독은 요즘의 영화와 관객들은 자본주의와 너무나 닮아 있다고 일갈했다.

"영화란 우리 삶에서 잠시 여유를 가지려고 보는 것인데, 영화도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더 비싼 효과만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영화를 대하는 게, 삶에서 벗어난 일탈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니라 상품을 구매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특수효과를 낸 작품을 보면서 비싼 상품을 샀다는 것에 만족하죠. 모든 걸 수치화하려고 하고요."

성공의 반열에 오르면 제작 규모가 커지고 자연스레 '스펙터클'한 영화에 욕심이 나지 않겠냐는 질문에, 백 감독은 "큰 영화도 찍어보고 싶지만 나만의 색깔을 잃고 싶지 않아요. C급 무비의 철학은 돈이 없고 기술이 없어도 영화를 찍고 싶어 영화를 찍었다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영화는 나도 찍겠다'"고 한다며 같이 찍는게 훨씬 재밌다고 덧붙였다.

매력적인 오답들을 위하여

백 감독은 인하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군 제대 후 영화감독이 됐고, 영화사도 차리고, 영화제 기획도 하고, 동네에 극장도 만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유지가 힘들어 기간제 미술교사로 학교에 갔다.

"2008년에 남동구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 담임을 맡았어요. 세상과 타협한 느낌과 이대로 안주할 것 같은 불안감이 많았죠. 하지만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는 순간 마음이 변했어요. 아이들은 무언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들입니다. 저도 무엇이 되고 싶어서 아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학교에서 놀았어요."

학교는 '하지 말라'는 말이 난무하는 곳인데, 백 감독은 그곳에서 무언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외로움을 알기에, 아이들과 함께 그런 세계를 찾아나갔다.

"외롭고 우울한 이유는 정답만을 강요하기 때문이에요. 외국에는 다양한 영화가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진짜 영화감독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죠. 1000만 관객을 부르는 영화를 찍는 사람이 진짜 감독이고, 나 같은 사람은 진짜 감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완벽한 정답은 아니어도 매력적인 오답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아홉 사람 희생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색깔로 빛을 낼 수 있죠."

백 감독은 어릴 때 꿈이 영화배우, 영화감독, 화가, 댄스가수였다고 한다. 그 꿈을 다 이뤘다는 말에 의아해했더니, '숫호구'에 출연한 손이용 배우와 2인조 댄스그룹 '리스키(Risky: 위험한)를 결성해 2013년 1월 싱글 1집을 내기도 했단다.

"시사회 때 자축하는 무대를 만들기도 합니다. 정답은 아니지만 오답으로라도 댄스가수 됐다는 걸 제자들한테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향해 평범한 어른들이 꿈을 이뤄가는 모습 말예요."

그는 몇 년간의 교직생활후 모은 돈으로 다시 서울에 사무실을 차리고 영화인들과 교류하며 영화 제작을 고민했다. 그러다 통장에 100만원이 남았을 때 인천에 와 '숫호구'를 찍었다.

시발(始發)놈
   
백승기 영화감독
 백승기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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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감독이 새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 제목이 '시발(始發)놈'이다. 인류의 시발이 된 사람의 얘기다. 역시나 원시인 분장은 CG(=컴퓨터그래픽) 하나 없는 유치원 수준이라고 한다.

"저예산 영화들은 학교 이야기나 소박한 얘기만 영화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C급 무비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습니다. 가편집된 영화를 보고 어떤 평론가가 '이 영화는 개봉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어요. 영화에 대한 모독이죠. 저는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접한 배경에 동네 사람들 데려다 말도 안 되는 원숭이 분장 시켜놓고 최초의 인류를 이야기하면 안 되나요? '시발놈'은 인류 존재의 근원, 권력관계, 종교의 시작 등이 다 들어가는 진지한 예술영화입니다."

내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목표로 한다니,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백승기, #숫호구, #시급영화, #시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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