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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구한말, 일제 강점기 등 외세 침략이 극심했던 과거, 대구·경북에선 어떤 인물들이 나라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을까?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1907년 '13도 창의군'의 신돌석, 이강년, 허위 의병장,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과 민족저항시인 이상화 등이 바로 그 상징적 인물들이다.

대한광복회 시작된 안일암, 독립운동 성지답게 잘 가꿔야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독립운동 성지' 안일암부터 찾아보자. 조선국권회복단은 1910년대 국내 무장 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 결사단체로 1915년 2월 28일 박상진, 서상일, 이시영, 윤상태 등이 "시회(詩會)를 연다"면서 일제 경찰을 속인 후 이곳 앞산 안일암에 모여 조직했다. 여섯 달 뒤, 조선국권회복단은 채기중, 정만교, 황상규, 김상옥 등이 영주에서 결성한 역시 무장 결사체인 광복단과 통합, 대한광복회로 발전한다.

1910년대 국내 무장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역사의 장소이지만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사찰 경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기념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 대구 앞산 안일암 1910년대 국내 무장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역사의 장소이지만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사찰 경내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기념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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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는 이듬해 1916년까지 전국 조직을 완성한다. 전국 곳곳에 곡물상과 여관을 경영하며 정보망으로 활용하는 한편, 그곳을 무기 비축 공간으로도 이용했다. 먼 만주까지도 지부를 뒀다. 그 지부장이 바로 김좌진 장군이다.

대한광복회는 주로 관공서와 일본인의 광산을 습격했다. 친일부호들의 돈도 빼앗았다. 그 과정에서 칠곡 장승원, 보성 양재학, 낙안 서도현 등 전국의 많은 친일파를 처단했다. 그렇게 마련한 돈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시작의 공간인 안일암엔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장소'를 밝혀놓은 대웅전 앞 소형 안내판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안일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도 역시 무엇 하나 없다. 농촌 소읍 영주 풍기에는 '광복단 기념관'까지 세워져 있지만, 광역시인 대구에는 어떤 것도 없다. 1910년대 국내 무장 투쟁을 선도한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독립 운동 성지'인 앞산 안일암. 대구시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국가사적 62호인 달성은 우리나라 고대 토성 축조술을 보여주는 중요 역사유적이다. 일본은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을 공원화했고, 일본산 향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 향나무들이 지금도 달성공원 곳곳을 덮고 있다.
▲ 달성 경내의 일본 향나무들 국가사적 62호인 달성은 우리나라 고대 토성 축조술을 보여주는 중요 역사유적이다. 일본은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을 공원화했고, 일본산 향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 향나무들이 지금도 달성공원 곳곳을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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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 오후 1시경, 달성공원을 찾은 어떤 아이가 테니스장 철망 밖에 선 채 어른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8월 13일 오후 1시경, 달성공원을 찾은 어떤 아이가 테니스장 철망 밖에 선 채 어른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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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단의 통합은 대구 달성공원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달성공원 안 어디에도 이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다. 일제가 심어 놓은 수백 그루의 일본산 향나무만 무성할 뿐이다. 심지어 국가사적 62호 경내에는 테니스장까지 설치돼 '핑핑' 공이 날아다닌다. 달성공원 내의 테니스장은 철거돼야 마땅하다. 일본산 향나무들은 톱과 도끼로 잘라 없애야 한다. 그 대신 조양회관(등록문화재 4호) 건물을 복원해 달성공원 앞에 새로 지어야 한다. 물론 이름도 광복회관이 아니라 원래 명칭인 조양회관으로 써야 옳다.

방치된 조양공원과 이상화 생가

지금 망우공원에 있는 광복회관은 본래 조양(朝陽)회관이다. '조선의 빛'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독립을 염원했다. 조양회관은 1922년에 세워졌다. 달성공원 앞 옛날 원화여고 자리에 건립됐던 조양회관은 이육사를 비롯, 일제 강점기 대구·경북 청년들의 민족 정신 교육의 본부였다. 하지만 이 2층 건물은 1982년 전혀 엉뚱한 곳인 망우공원으로 옮겨졌다. 그후 이름까지 광복회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망우공원 광복회관 앞엔 조선국권회복단 창립 간부였던 서상일 흉상이 서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시민 대부분은 조선국권회복단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름까지 잃은 조양회관은 접근성 낮은 곳으로 옮겨져 그 빛을 잃어버렸다.

대구시 중구 계산동의 상화 고택은 대구 시민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상당한 답사자들이 찾아오는 명소다. 상화 고택은 이상화 시인이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낸 집이다. 그러나 서성로에 있는 이상화 '생가'의 보존 상황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민족시인 이상화가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계산동 집은 '상화 고택'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서성로의 생가(사진의 푸른 페인트칠 된 집)는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 상화 생가 민족시인 이상화가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계산동 집은 '상화 고택'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서성로의 생가(사진의 푸른 페인트칠 된 집)는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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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3.1운동의 진원지인 서문시장은 당시 지금의 대신동이 아니라 동산파출소 자리에서 시장북로의 오토바이 골목 일대였다. (사진 상단의 원내) 동산파출소가 있던 자리에는 이곳이 대구3.1운동 진원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대구 3.1운동의 진원지인 서문시장은 당시 지금의 대신동이 아니라 동산파출소 자리에서 시장북로의 오토바이 골목 일대였다. (사진 상단의 원내) 동산파출소가 있던 자리에는 이곳이 대구3.1운동 진원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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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실정을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대구 삼일 운동로'를 들 수 있다. 1919년 3월 8일 시작된 대구 만세운동은 서문시장에서 출발하여 대구경찰서(현재 중부경찰서 자리)와 종로를 행진했다. 그리고 대구부청(현재의 시청, 대구백화점 자리)으로 나아갔다. 일제의 기관총 세례를 못 이겨 해산됐지만 그 길에는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다.

하지만 지금 '대구 3.1운동로' 구역은 선교사주택 단지 일원에 제한된다. 시발지였던 당시 서문시장 자리(지금의 오토바이골목 입구)에는 엉성한 표지석 하나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의성군 비안면에 있는 '경북 3.1운동 시발지 기념공원'과 견줘 보면 참담한 수준이다.

물론 대구엔 잘 보존 중인 독립 운동 공간도 있다. 바로 대구 동구의 신암선열공원이다. 신암선열공원은 지역 독립 운동가들을 한 곳에 모셔 제향하는 전국 유일의 공간이다. 앞산에 세워진 이시영 기념탑과 대구사범학교(경북대 사대 전신), 대구상업학교(상원고 전신) 학생들의 독립 운동을 기려 세운 기념탑도 그 예다. 대구 3.8 독립만세운동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교정에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덧붙이는 글 | 시대순으로 대구경북 역사여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만, 8.15를 맞아 대구의 독립운동 유적 관리 실태를 살펴 보았습니다. 답사자들께서도 시간을 내어 본문에 소개된 곳들을 한번 찾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태그:#곽재우, #안일암, #조양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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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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