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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인들이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박기돈 고택 담장 아래에 모였다.
 네팔인들이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박기돈 고택 담장 아래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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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일), 30도 넘는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팔인 12명이 걸어서 대구 도심 역사 여행에 나섰다.

이들은 대구공정여행A스토리(대표 김두현)가 준비한 '공정 대구 도심 도보 여행'에 참가하여 2시간 반 동안 경상감영공원에서 계산성당까지 걸었다.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 예술인과 네팔 현지에 4년간 거주한 경력이 있는 이경 A스토리 이사가 해설과 통역을 했다.

이들의 첫 출발지는 경상감영공원이었다. 공원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곳은 본래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공원 내에는 감영 건물이었던 선화당(대구시 유형문화재 1호)과 관찰사 관사였던 징청각(유형문화재 2호), 그리고 '절도사 이하 하마비', 여러 관리들의 선정비 등이  역사유적으로 남아 있다.

1601년부터 1910년까지 대구는 영남의 총본부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선 때는 1601년. 임진왜란 또는 7년전쟁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끝난 직후의 일이다. 경삼감영은 그때부터 1910년까지 310년 동안 줄곧 대구에 있었고, 253명의 관찰사가 근무했다.

정만진 해설가는 "어떤 책은 선화당을 지금의 대구시청, 징청각을 시장 관사 식으로 비유하지만, 잘못"이라면서, "당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준이 아니라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에 지금의 대구광역시를 포함한, 즉 영남 전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경상도 관찰사는 행정권만이 아니라, 영남 지역에 주둔하는 군대의 군사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주 높은 관직이었다. 그래서 선화당 앞에 '절도사(관찰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서 걸어오라'는 비석을 세워둘 만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7월 20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 네팔인 12명이 찜통 더위의 대구 한낮을 걸어서 여행했다. TBC-TV의 특집팀이 크리쉬나 소마이 씨에게 여행 소감을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7월 20일 오후 3시부터 5시 30분, 네팔인 12명이 찜통 더위의 대구 한낮을 걸어서 여행했다. TBC-TV의 특집팀이 크리쉬나 소마이 씨에게 여행 소감을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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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공원 모서리에는 대구근대역사관이 설립되어 있다. 건물 자체가 대구시 유형문화재 49호인 대구근대역사관은 2011년 10월 5일에 문을 열었다. 내부에는 근대의 태동, 구국의 정신, 근대의 문화, 교육도시 대구, 근대화의 산실 등 주제별, 시간별로 나뉘어진 대구의 근대사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네팔인들은 1층의 삼성, 박정희 관련 전시물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근대역사관과 중부경찰서가 마주보고 있는 작은 네거리는 1909년에 개설된 대구 최초의 십자로이다. 망국 당시 대구부사였던 친일파 박중양이 개설했다. 310년 역사와 전통이 서린 경삼감영 부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교차 도로를 박중양이 개설한 것은 일본인 상인들의 장사를 돕기 위한 조치였다.

친일파 대구부사 박중양, 왜인들 장사 도우려 교차로 개설

네팔 사람들은 이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걸었다. 네거리와 만경관극장 사이에 있는 와가가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한 월북 사학자 김석형의 생가이다. 한때 요정으로, 또 한정식집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빈 집으로 남아 있다.

만경관극장 앞에서 국채보상로 네거리를 건너면 염매시장까지 이어지는 종로 거리가 나타난다. 종로는 옛날에 종을 쳐서 통행의 시작과 마감을 알렸던 종루가 있던 길이라는 뜻이다. 현재 종로에 정루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대신 화교 유적을 많이 볼 수 있다.

화교가 운영하는 전통의 중국요리집 영생덕 앞에서 화교의 대구 이주사를 듣고 있는 네팔인들
 화교가 운영하는 전통의 중국요리집 영생덕 앞에서 화교의 대구 이주사를 듣고 있는 네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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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건축된, 식민지 시대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의 저택은 지금 화교협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화교협회 맞은편에는 화교소학교도 있다. 소학교 마당에는 장개석 좌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정문  건너편에는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요리집 영생덕이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종로가 끝나면서 염매시장과 닿는 작은 네거리가 바로 대구읍성의 정문 영남제일관이 있던 지점이다. 영남제일관은 친일파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파괴한 1906년에 함께 부서졌다. 영남제일관은 그 이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1980년에 동구 효목동 망우당공원의 금호강 절벽 위에 복원되었다.

종로 일대에 화교들이 많이 활동한 데는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한약재 시장으로 이름을 올린 대구약령시도 한몫을 하였다. 1905년 이후 대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화교들은 서울, 평양과 더불어 당시 대구가 전국 3대 도시라는 점, 경부선 철도가 있는 점,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이 있는 점, 거대한 한약재 시장인 약전골목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대구를 멋진 장사터로 인식했던 것이다.

화교들이 대구에 많이 진출한 까닭은?

대구 사람들은 흔히 영남제일관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뻗어가는 길을 약전골목이라 부른다. 약을 파는 가게가 많은 골목이라는 뜻이다. 1658년 경상감영의 객사 옆에서 개장한 약령시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1908년이다. 일제에 의해 1941년 개장이 금지되었던 약령시는 1978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문을 연다.

약전골목에서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30호인 제일교회 구관도 볼거리이다. 1897년 초가집으로, 1898년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시작한 제일교회는 1908년 비로소 서양식 건축술을 가미한 건물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건물은 불에 탔고, 현재 약전골목에 남아 있는 유형문화재는 1933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래도 한강 이남 최초의 서양식 교회라는 역사성을 자랑한다. (이 유형문화재 건물을 '제일교회 구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일교회가 동산동 선교사주택 밀집지 아래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염매시장 입구의 떡전에서 네팔인들이 낯선 외국떡을 맛보여 즐거워하고 있다.
 염매시장 입구의 떡전에서 네팔인들이 낯선 외국떡을 맛보여 즐거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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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교회에서 약전골목을 건너면 상화고택으로 가게된다. 맨 먼저 나타나는 것은 서예가 박기돈 고택 담장에 그려진 명나라 장수 두사충 벽화이다. 두사충은 담장 너머로 어여쁜 아낙네를 훔쳐보고 있다. 아버지 두사충이 이웃집 과부를 사모하는 것을 눈치챈 아들이 애를 써서 부부의 인연으로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종료 이후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이다. 그가 대구에 머물게 된 것은 당시 명나라 군대의 본영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 북진하던 왜군 본영이 머문 곳도 대구였고, 그 이듬해 왜군을 대신하여 명군 본영이 머문 곳도 대구였다. 지금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두사충은 경상감영 자리에 집을 지었는데 이태 뒤 그 자리에 감영 건물 선화당과 관찰사 사택인 징청각이 들어서게 되자 계산동으로 이주했다. 지금 박기돈 고택 담장에 두사충 그림이 그려진 것은 그 때문이다. 두사충의 집터는 박기돈 고택과 마주보는, 벽화와 롯데백화점 중간 일대이다.

이상화 시인의 형인 이상정 독립군 장군의 고택 담장에 그려져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구 선생 벽화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것을 네팔인들을 아주 좋아했다.
 이상화 시인의 형인 이상정 독립군 장군의 고택 담장에 그려져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구 선생 벽화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것을 네팔인들을 아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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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돈 고택 옆집은 이상화의 형인 이상정 독립군 장군의 고택이다. 지금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 마을에서 생산한 '봉하 막걸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바보 주막>이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 한옥 주점은 "대구에서 야당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를 듣는 대구의 야당 성향 인사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집 안 담장 내벽에 그려진 고 노무현 대통령과 김구 선생 벽화는 네팔인들의 '신나는 포토존'이 되었다.

이상정 고택에서 오른쪽 굽이를 돌면 바로 상화 고택이다. 상화고택은 이상화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집으로, 민족시인 이상화를 탐구할 수 있는 작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정만진 해설가는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나 1943년 대구에서 타계한 진정한 '대구 사람'이다. 흔히들 그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절창을 남긴 시인으로만 알지만 사실은 생애 줄곧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고 해설했다. 이상화를 기려 1948년에 달성공원에 세워진 '상화 시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로 이름이 높다.

이상화 고택과 국채보상운동 서상돈 고택, 마주보고 있어

상화고택 맞은편 집은 서상돈 고택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나라빚 1300만  원을 갚아 자주국가의 위상을 바로세우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기부운동으로 평가받는 이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이 서상돈이다. 서상동 고택은 그를 기려 단장된 옛집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팔인들은 계산성당을 둘러보았다. 계산성당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주례가 "육영수 군과 박정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하고 모두 발언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정을 마친 네팔 여행객 중 한 명인 크리쉬나 소마이씨는 "대구의 역시 유적 여행은 처음이다.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면서 안내해준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오늘 하루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대구공정여행A스토리 김두현 대표가 상화고택의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열창하는 장면을 네팔인들이 촬영하고 있다.
 대구공정여행A스토리 김두현 대표가 상화고택의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열창하는 장면을 네팔인들이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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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네팔, #대구여행, #A스토리, #대구공정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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