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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어디 먼 곳에 있는 다른 존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우리의 욕구가 이토록 강렬하다."
-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 중에서

소설 <죄악의 땅>으로 데뷔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 포르투갈 작가인 그는 젊은 시절엔 공산주의 활동을 펼쳤으며 오십이 넘어서 많은 작품 활동을 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눈먼자들의 도시>와 최근 영화 <에너미>로 재현돼 충격을 안겨준 <도플갱어>다.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들을 탐독하고자 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영화 속 주제인 '숨어있는 욕망이 깨어나 또 다른 무의식속의 나를 만나고, 욕망이 사라지면 의식적인 나를 만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도플갱어>의 주제는 선명하다. 즉, '외모 이외의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현실과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인간소외, 그리고 현대 개개인의 삶을 자각하게 한다'를 통해 무섭게 인간을 탐구했다. 다른 사람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그저 같은 외모를 가지고 흉내만 잘 낸다면 충분히 원래 주인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상황도 비극이다.

소설 속에서 인간 상실은 물질주의를 앞지르고 사회 문제의 일순위로 나온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유사한 위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긴장해야 했다. 소설 마지막에 안토니오 장례식이 끝나고 테르툴리아노와 똑같은 목소리의 또 다른 남자가 그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또 다른 인간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 인간도 비슷한 조건을 가진 이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결국 그의 모든 것을 가로채기 위해 속임수를 쓸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매일 나타나는 자신의 도플갱어들과 친구가 될 수 없는 사회를 말하고 있다. 그 속에서 협력은 불가능하고 경쟁은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외모만으로 절대 파악 불가능한 정체성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 '도플갱어'
▲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 '도플갱어'
ⓒ 해냄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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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도플갱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혼남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중학교 역사교사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삶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그를 보고 동료 교사가 영화 한 편을 추천해준다. 집에 돌아온 테르툴리아노는 아이들 숙제 검사, 영화보기, 저녁 먹기 등 여러 가지 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느 것을 고를까요'라는 노래를 부른다.

영화가 선택됐다. 재미있지도 않은 영화를 보던 테르툴리아노는 한 조연배우를 보고 놀란다. 조연배우는 테르툴리아노와 너무도 닮아 있다. 아니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목소리, 생김새, 키 모두가 같았다. 테르툴리아노가 빌려본 영화는 5년 전 영화이다. 그는 즉시 5년 전 사진을 꺼내 그 사람과 비교해 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약간 초췌한 얼굴형과 털의 모양까지 똑같았다. 그는 5년이 지난 지금의 조연배우가 자신과 같은 모습일 것이며 심지어 죽는 날짜까지 같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리고 조연배우에게 호기심을 가진다.

테르툴리아노는 그 영화를 만든 영화사의 모든 영화를 빌려 엔딩 크레딧에 적힌 역할과 이름을 적어가며 조연배우를 찾는다. 마침내 테르툴리아노는 극중 조연배우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조연배우의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건다. 그 중 한 곳으로부터 "전에도 당신이 찾는 사람과 같은 사람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테르툴리아노는 조연배우를 전화번호부에서도 찾을 수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여자친구 마리아 다 파즈의 이름을 빌려 영화사에 편지를 쓴다. 자신이 직접 쓰면 사회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노는 마리아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가끔 위안과 도움을 받는 인간관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사에 보낸 편지 내용에는 어떠한 영화에 어떠한 조연으로 나온 배우 사진과 집주소를 알고 싶다고 썼다. 그리고 며칠 후 답장을 받는다. 거기에는 조연배우의 서명도 있었다. 테르툴리아노는 그의 서명을 연습하며 흉내 낸다. 며칠 후 편지에 적힌 조연배우 안토니오 클라로의 집으로 전화를 건 테르툴리아노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여자는 안토니오의 아내 헬레나인데 자신의 남편인 안토니오가 전화로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재미있어 한다.

테르툴리아노는 자신은 남편이 아니고 목소리가 똑같은 팬이라고 소개한다. 이로 인해 헬레나는 그의 외모도 남편과 같을 것이라 느끼며 정신적 혼란을 겪는다. 며칠 후 테르툴리아노는 안토니오의 집에 다시 전화를 걸어 그와 통화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안토니오는 헬레나가 자신을 피하는 것이 테르툴리아노 때문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전화를 건성으로 대답하며 거칠게 끊었다. 안토니오는 전화를 끊고 테르툴리아노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생각한다.

나를 찾는 것인가, 대상화하고 싶은 것인가

며칠 후 안토니오는 다시 테르툴리아노에게 연락을 해 만나자고 한다. 테르툴리아노는 안토니오를 만나기 전 턱수염으로 변장을 하여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외곽에 있는 한 건물에서 서로 만난 후 처음에는 경악을 하고 다음에는 서로의 옷을 벗고 탐색을 한다. 서로가 태어난 시각을 통해 자신이 복제품인지 원본인지를 가리기도 하였다. 모든 관찰이 끝난 후 다시는 서로 만나지 말자는 말과 함께 각자의 집으로 간다.

테르툴리아노는 집으로 가기 전 어머니의 집에 들러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 속에 자신이 끼어 있어도 구분할 수 있겠냐는 둥 위대한 카산드라의 예언이 무시되어 생긴 결과가 어떻다는 둥 여러 이야기를 한다. 그러던 중 나를 숨기고 상대를 만나기 위해 변장도 하고 골머리 앓으며 애쓰던 자신을 생각한다. 그 순간 진부하던 그의 일상은 소중해지기 시작했고 자신의 여자친구 마리아에게도 더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의 무력감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일상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중 안토니오는 문뜩 테르툴리아노가 자신을 찾기 위해 영화사에 보낸 편지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편지가 테르툴리아노의 여자친구 마리아의 이름으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토니오는 요새 찍는 영화가 없고 삶이 무료하여 모든 신경을 그녀에게 쏟기 시작한다. 마리아를 미행하며 꽤 괜찮은 여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안토니오는 테르툴리아노를 찾아가 자신의 아내 헬레나를 겁먹게 하여 가정을 파탄 내겠다는 이유로 자신도 마리아 앞에 찾아가겠다고 협박을 한다. 단 또 다른 조건으로 그녀와 한 번 잠자리를 가지게 해주면 이 일을 무마하고 정말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일상의 무료함은 비극을 부른다

테르툴리아노는 마리아에게 사실을 알리기보다는 그의 범죄를 한 번 눈감기로 한다.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자신의 신분증과 차키 등 모든 것을 하루 빌려준다. 안토니오도 다음날 찾아오겠다며 자신의 신분증과 집열쇠 등을 테르툴리아노의 집에 두고 간다. 그날 저녁 테르툴리아노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안토니오의 집에 찾아가 자신을 안토니오로 착각한 헬레나와 잠자리를 가진다.

테르툴리아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안토니오의 집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헬레나의 눈치가 보여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갔지만 안토니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노는 마리아의 회사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녀가 어제 사고로 죽었음을 듣는다. 다음날 신문에 마리아와 그의 약혼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떴다. 사고의 실상은 이렇다. 마리아가 안토니오를 테르툴리아노로 착각하고 하룻밤을 지냈는데 다음날 아침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 자국을 보고 그를 의심한다. 안토니오는 곧 모든 사실을 알게 될거라며 그녀를 달랬지만 이미 히스테리가 터진 마리아가 귀찮아 결국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한다. 둘이 차를 타고 가던 중 몸싸움이 벌어졌고 차가 중심을 잃고 중앙선을 넘어 트럭과 충돌한 것이다. 결국, 일상의 무료함이 비극을 불렀다.

테르툴리아노는 혼란에 휩싸인다.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은 안토니오가 아닌 그였다. 그는 직업, 주위 친척, 자신의 집과 모든 것을 다시는 얻을 수 없게 됐다. 문뜩 어머니가 걱정된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자신과 단 둘이 있을때 만 자신을 아들로 여겨주라며 당부한다. 그리고 헬레나의 집으로 간 테르툴리아노는 실상을 설명하며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헬레나는 그에게 자신의 남편으로 남아주길 바랬다. 시간이 지나면 서로 사랑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고 또 안토니오의 가족들과는 연기를 함으로서 서서히 조율해 가기로 했다.

이제 테르툴리아노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 헬레나 그리고 자신뿐이었다. 안토니오의 장례를 마치고 테르툴리아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상대의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상대는 테르툴리아노와 만나기로 한다. 테르툴리아노는 또 다른 판박이가 나타남을 직감하고 적대감을 느끼며 총을 챙겨 그 사람을 만나러 떠난다. 자신의 신분증과 물건들은 집에 놓고 가지만 이전에 익혀두었던 안토니오의 싸인은 없애버린다. 그와 그의 도플갱어를 구별해 줄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하던 자신의 정체감이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흔들린다

자신의 자리에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상대를 적으로 인식한다. 소설 <도플갱어>는 이번에 영화 <에너미>로 재편됐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며, 이 한 사람은 욕망에 의해 분열되고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특히 여성을 상징하는 거미가 나타나는데, 거미는 또한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여성을 탐함으로써 욕망이 사라졌다가 다시 새로운 욕망을 찾길 원할 때 거미는 욕망의 대상에 붙어 나타난다. 그리고 블루베리를 싫어하는 한 자아와 블루베리를 좋아하도록 노력하는 한 자아의 존재는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은 자신의 불평을 다른 자아로 충족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상에서는 심리학적으로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평소 다른 이들이 볼 때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 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 자아로 인해 몇 번씩 통제되곤 한다. 현실의 눈과 진정 자신이 원하는 욕망 사이에서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볼 수 있다.

반면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나오지만 한 사람의 두 자아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그저 무서울 정도로 서로 똑같은 인격일 뿐이다. 처음에 똑같은 두 남자는 호기심에 서로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자신에게 턱수염을 보내고 가정을 위태롭게 만든 테르툴리아노를 골려주고, 그의 매력적인 여자친구 마리아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욕망에 그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서로의 물건과 옷, 차 등을 바꾼다. 서로 다른 정신을 가진 몸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물건이 바뀜으로 사람의 지위와 정체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남자는 서로의 여자를 바꾸어 만나지만 여자들은 그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인간상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 순간 속에서 갈등과 혼란을 받는 사람이다. 안토니오는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남자의 물건들을 이용해 그 남자의 것들을 취하고 즐겼다. 반면 테르툴리아노는 그를 구별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안토니오의 아내를 보고 혼란스러워한다.

테르툴리아노에게 세상 유일한 존재인 '나'라는 정체성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직업과 인간관계에서도 찾지 못했는데 그의 복제품이라고 여길 정도로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자, 그 사람이 그의 자리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박힐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 순간 차라리 그 사람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무기력하던 자신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고 빛을 발하고 있음을 느낀다. 더 심할 경우 그의 가족들마저 그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면 진짜 그를 구별하지 못하고 그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도플갱어를 사회 속에서 가장 큰 적으로 인식한다.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해냄(2006)


태그:#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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