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전을 그대로 뒤진 상태에서 끝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래도 네덜란드의 압박 전술은 디펜딩 챔피언을 괴롭혔을까? 몇 가지 의문만 생길 수밖에 없는 순간에 판 페르시가 날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동점골 순간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는 하프 타임 분위기였지만 그 이후에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루이스 판 할 감독이 이끌고 있는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이 우리 시각으로 14일 새벽 4시 브라질 살바도르에 있는 아레나 폰테 노바에서 열린 FIFA 월드컵 브라질 2014 B그룹 스페인과의 맞수 대결에서 믿기 어려운 5-1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판 페르시, 날다

전반전 중반, 중앙원 부근에서 양 팀 선수들의 신경전이 약간 벌어졌다. 스페인 중원의 핵심인 세르히오 부스케츠를 향해 네덜란드에서 그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나이젤 데 용이 거친 몸싸움을 걸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네덜란드 선수들이 챔피언을 대하는 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최고의 패스 조직력을 자랑하는 상대 선수들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데 강한 압박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 가슴에 월드컵 트로피 문양을 달고 뛴 스페인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긴 것처럼 이번에도 당연히 이긴다는 생각을 하고 경기장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문지기 이케르 카시야스의 무실점 신기록까지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선수들은 조용히 그들의 드라마를 완성시키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당연히 압박 전술이었다.

경기 시작 26분만에 니콜라 리쫄리(이탈리아) 주심의 휘슬 소리가 길게 울렸다. 페널티킥 선언이었다. 스페인의 간판 골잡이 디에고 코스타가 유연하게 공을 몰고 수비수를 따돌리는 순간, 네덜란드 데 브라이의 걸기 반칙이 지적된 것이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주심에게 다가가서 디에고 코스타의 넘어지는 동작을 다이빙이라 주장했지만 정황상 더 물고늘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기회를 맞아 11미터 지점에 공을 내려놓은 스페인 미드필더 사비 알론소는 오른발 인사이드 킥을 정확하게 왼쪽 구석에 꽂아넣었다. 킥 직전에 아르연 로번이 동료 문지기 실러선에게 귓속말로 조언을 해서 그가 방향을 읽었지만 알론소의 킥 정확성과 스피드를 넘어설 정도는 못 되었다.

이대로 전반전이 끝날 듯한 분위기였지만 네덜란드의 기막힌 역습이 보기 드문 아름다운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44분, 왼쪽 옆줄 바로 앞에서 공을 잡은 블린트가 자로 잰 듯한 왼발 크로스를 넘겨주었고 이 공을 따라 뛰어간 골잡이 로빈 판 페르시는 몸을 날리며 머리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문지기 카시야스도 어쩔 수 없는 완벽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술 골이었다.

이 동점골 장면이 스페인 수비 라인의 빈틈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세르히오 라모스와 헤라르드 피케가 모두 라인을 상당히 끌어올려 수비하는 것을 네덜란드 선수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역습 패스를 실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센터백 둘은 오프 사이드 함정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커버 플레이 역할 분담에 이르기까지 눈빛만으로도 통해야 하는데 판 페르시에게 내준 동점골부터 그 호흡의 불일치가 눈에 두드러졌고, 라인 올리기를 즐기는 두 선수의 성향상 뒷공간의 빈틈이 크게 벌어지는 것은 감수해야 할 치명적 약점이었다.

아! 카시야스 어쩌나

전반전 종료 직전 드러난 스페인 수비 라인의 문제점이 53분에 터진 역전골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스페인 수비수들은 AFC 아약스가 자랑하는 왼발잡이 블린트가 자신들의 뒷공간을 노린다는 것을 금방 까먹은 것 같았다.

네 차례의 역습 패스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지며 블린트의 왼발 띄워주기가 스페인 골문 앞으로 날아들었다. 이 순간 아르연 로번의 왼발은 그 어느 것보다도 섬세한 붓끝이 된 듯 보였다. 높게 날아온 공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세워두는 볼 트래핑 기술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부드러운 터치로 자랑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더 볼 것 없는 '골' 바로 그것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챔피언의 몰락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압박과 탈압박이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반복되는 순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 연결로 역습을 완성시키는가 하는 것에서 네덜란드는 스페인보다 적어도 한 수 위였다.

왼쪽 측면 프리킥 세트 피스 공격으로 추가골(65분, 스네이더르 도움-데 브라이 헤더)을 넣은 네덜란드는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명언처럼 거침없이 스페인의 골문을 두드렸다. 이렇게 강팀의 조건을 챔피언에게 각인시킨 것이어서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미 무실점 기록이 무의미해진 스페인 문지기 이케르 카시야스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72분, 세르히오 라모스의 백 패스를 받은 카시야스는 왼발 트래핑이 너무 길게 달아나버려 판 페르시에게 쐐기골을 헌납해야 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에게 승부차기로 다섯 골을 내주며 4강 진출권을 놓쳐서 침울했던 당시의 표정이 떠오를 정도였다.

카시야스의 굴욕은 이 장면만으로도 모자라 80분에 아르연 로번에게 다섯 번째 골을 내줄 때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네덜란드의 압박 전술이 만들어낸 기막힌 역습 골이었다. 스페인의 오른쪽 공격이 이어질 때 효율적으로 그 주위를 틀어막으며 공을 빼낸 네덜란드는 스네이더르의 결정적인 찔러주기가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여기서 아르연 로번은 세르히오 라모스를 상대로 스피드와 드리블 실력으로 압도했다. 그리고 전설의 카시야스를 엉금엉금 기어다니게 만들었다. 문지기들이 가장 경험하고 싶지 않은 장면 바로 그것이었기에 승패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이제 스페인은 오른쪽 가슴에 달린 지난 대회 우승 트로피를 잊고 칠레를 잡아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게 되었다. 스페인 대표 선수들 상당수(피케, 이니에스타, 챠비 에르난데스, 세르히오 부스케츠, 호르디 알바,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얄궂게도 FC 바르셀로나의 동료 알렉시스 산체스(칠레 공격수)를 밀어내야 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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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FIFA 월드컵 2014 B그룹 결과(14일 새벽 4시, 아레나 폰테 노바, 살바도르)

★ 네덜란드 5-1 스페인 [득점 : 판 페르시(44분,도움-블린트), 아르연 로번(53분,도움-블린트), 데 브라이(65분,도움-스네이더르), 판 페르시(72분), 아르연 로번(80분,도움-스네이더르) / 사비 알론소(27분,PK)]

◎ 네덜란드 선수들
FW : 스네이더르, 판 페르시(79분↔렌스), 아르연 로번
MF : 블린트, 데 용, 데 구즈만(62분↔바이날덤), 얀마트
DF : 마르틴스 인디, 데 브라이(77분↔펠트만), 론 블라르
GK : 실러선

◎ 스페인 선수들
FW : 이니에스타, 디에고 코스타(62분↔페르난도 토레스), 다비드 실바(78분↔파브레가스)
MF : 사비 알론소(62분↔페드로 로드리게스), 세르히오 부스케츠, 챠비 에르난데스
DF : 호르디 알바, 세르히오 라모스, 헤라르드 피케, 아스필리쿠에타
GK : 이케르 카시야스

- 관중 : 48,173명
- 경고 : 데 구즈만(25분), 데 브라이(41분), 이케르 카시야스(65분), 판 페르시(66분)

◇ B그룹 1라운드 순위표
네덜란드 3점 1승 5득점 1실점 +4
칠레 3점 1승 3득점 1실점 +2
호주 0점 1패 1득점 3실점 -2
스페인 0점 1패 1득점 5실점 -4
축구 월드컵 아르연 로번 네덜란드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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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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