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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하나 기자)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0년 7월 어느 날 간송 전형필은 길거리를 바삐 오가는 거간의 동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한다.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출현한 것.

액수는 당시 큰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원이라고 했다.

"간송은 아무 소리 않고 돈 1만1천원을 내주며 '1천원은 수고비'요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원본이 간송의 손에 들어 오게 되고 지금 국보 70호로 지정돼 있다."(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1906년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위창 오세창을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고미술에 관심을 두게 됐고, 1930년대부터 전 재산을 털어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과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을 수집하고,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에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을 비롯해 고려청자, 조선 백자 등을 구입하며 우리 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막았다.

1936년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고려청자 수집가인 영국인 국제 변호사 존 개스비를 찾아가 '청자기린유개향로'(국호 제65호),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등을 찾아오기도 했다.

간송은 1938년 지금의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미술관 '보화각'을 세워 이렇게 모은 우리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연구·보전하는데 애썼다.

간송 타계(1962년) 후인 1970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간송의 소장품은 1971년부터 1년에 단 두 번 열리는 전시를 통해서만 외부에 공개됐었다.

간송미술관의 전시를 보려고 반나절 넘게 줄을 서는 것도 흔한 풍경이 됐다.

그렇게 꼭꼭 숨어 있던 간송 소장품이 빗장을 열고 나와 첫 나들이를 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오는 21일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내 디자인박물관에서 '간송문화: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전을 연다.

1950∼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열린 국가적인 차원의 해외 전시와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에 일부 유물을 대여한 적은 있지만 간송미술관이 주도하는 외부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는 1, 2부로 나뉘어 열리는데 오는 6월15일까지 열리는 1부 전시에서는 간송의 다양한 문화재 수집 일화를 중심으로 꾸몄다. 훈민정음 등 수집 내력이 정확히 밝혀진 작품 위주로 선보인다.

이중 8m18㎝ 길이에 달하는 대작인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은 그동안 간송미술관 전시에서 일부 공개된 적은 있지만 발문까지 전체 작품을 한번에 펼쳐서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풍속화 30점은 10점이 먼저 전시됐으며 10점 단위로 교체해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에서는 존 개스비에게 인수한 고려청자 컬렉션도 대거 공개된다.

간송의 장손인 전인건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은 18일 열린 간담회에서 "그동안 간송미술관이 오래돼 많은 분이 불편을 느끼셨을 텐데 현대적인 큰 장소에서 더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아름답고 우수한 문화재를 즐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2부 전시로 오는 7월2일∼9월28일 간송의 주요 소장품을 장르별로 나눠 공개하고 오는 2016년까지 다양한 기획전을 DDP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아울러 앞으로 보화각 보수·정비, 간송미술관 상설전시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신축, 도봉구 방학동 간송고택과 간송묘역 문화공원 조성 등을 해 나갈 계획이다.

다만 이번 전시 준비로 올해 간송미술관에서는 별도의 봄 전시는 열지 않는다.

전 사무국장은 "가을에 10여 년 전과 같은 학술적인 소규모 전시를 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간송의 소장품이 일반에게 한발 다가온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DDP라는 새롭고 현대적인 공간에 놓이다 보니 '귀함'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간송 애호가라면 전시를 보고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간담회에 배석한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성북동에 워낙 오래 있어서 전시하는 사람도 낯설지만 유물도 낯설어하는 것 같다"면서 "간송미술관에서 본 분들은 낯섦이 있을 수 있지만 호감으로 봐달라"고 당부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태그:#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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