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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앞세우고 학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7백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영정을 앞세우고 학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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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심의위원 회의를 통해 지난달 29일 고교 한국사 교과서 7종에 대한 수정명령을 내렸다. 특히 미래엔출판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 주제명 가운데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다니!'가 교과서 용어로 부적절하다며 다른 표현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심의위원을 밝히란 요청에 대해, 교육부는 이름 모를 '각계에서 추천받은 전문가'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경찰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이 왜 교과서 용어로 부적절한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 곱씹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변명이다. 교과서에서 지운다고 역사가 바뀌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또 기록한다. 진실의 묵직한 울림을 얄팍한 간계로 막을 수는 없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그 사진

당시에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단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말이 돼야 말이지.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축소와 은폐에만 급급한 정부에 분노했다. 그날도 연세대 학생들은 교내집회를 마치고 정문 밖을 막 나서던 참이었다. "독재 타도, 전두환 물러가라"란 구호를 몇 번 외치기도 전에 최루탄이 쏟아졌다.

후퇴하던 시위대에서 갑자기 한 학생이 맥없이 쓰러졌다. 뒷머리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쏟아졌고 몸은 심하게 떨렸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 하나가 다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네다섯 명이 더 달려와 쓰러진 학생을 부축해 세브란스 병원 쪽으로 옮겼다. 응급실로 실려 가는 중, 쓰러진 학생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 고통에 신음하며 내뱉었다.

"내일 시청에 가야 하는데…."

그날 기자들은 대부분 연세대 정문 맞은 편 철길 주변에 있었다. 다소 먼 거리지만 경찰과 연세대 정문, 그리고 학생들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몇 안 되는 외신기자가 다였다. 그러나 단 두 사람,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있는 기자가 있었다.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기자와 임시사원으로 있던 그의 동생 정국원 기자였다. 덕분에 그 순간은 기록될 수 있었다.

교내 집회를 마친 연세대 학생들이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한열 열사가 마스크를 하고 교문 앞에 나와 있다. 이 사진은 로이터에 임시 사원으로 근무하던 정태원 기자의 동생 정국원 기자가 찍은 것이다.
 교내 집회를 마친 연세대 학생들이 정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한열 열사가 마스크를 하고 교문 앞에 나와 있다. 이 사진은 로이터에 임시 사원으로 근무하던 정태원 기자의 동생 정국원 기자가 찍은 것이다.
ⓒ 정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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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열사를 부축해 옮기고 있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사이에 서 있는 이 두 학생은 연세대에서 열린 고문 종식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가 후 경찰과 충돌했던 5백여 명의 학생 시위대 소속이었다.
 한 학생이 전투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열사를 부축해 옮기고 있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사이에 서 있는 이 두 학생은 연세대에서 열린 고문 종식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가 후 경찰과 충돌했던 5백여 명의 학생 시위대 소속이었다.
ⓒ 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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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정권의 야만적인 행태를 그대로 보여줬다. 최루탄을 머리 위로 쏴 시위대를 해산하기보다는 신체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고의로 직격 발사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문제가 된 사격자세를 취한 장면도 정 기자의 사진에 담겼다.

이한열. 용광로의 쇳물처럼 뜨거웠던 청년은 그렇게 식어 우리 가슴 속에 강철이 돼 남았다.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다시 분연히 일어났다. 1987년 6월 10일. 그로부터 17일간, 전국에서 5백만 명 이상이 참가해 2145회의 시위가 열렸다. 그리고 35만발의 최루탄이 발사된 후에야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냈다.

<서울발 사진종합> 출판기념회에서 정태원 기자와 만나 담소를 나누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배은심 여사는 아들의 못 다 이룬 뜻을 이어가기 위해 남은 평생 민주와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서울발 사진종합> 출판기념회에서 정태원 기자와 만나 담소를 나누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배은심 여사는 아들의 못 다 이룬 뜻을 이어가기 위해 남은 평생 민주와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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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이 정태원 기자의 카메라에 담겼다. 모두 '현장에서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 차라리 카메라를 내려놓고 싶은 정도로 분노'하며 찍은 것들이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 아니라 바로 30~40년 전 바로 이 땅에서 벌어진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게 모인 소중한 사진들을 <서울발 사진종합>(눈빛출판사) 한 권에 묶었다.

3일 출판기념회에서 만나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정태원 기자는 대답했다. 고령(74세)의 나이에도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듯 눈빛이 살아났다. 저 눈에 민주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니. 숙연함이 밀려왔다.

"당시에 나는 클로즈업을 중시했습니다. 때문에 시위 현장에선 학생들쪽을 고수했지요. 모든 내용이 사진 속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정태원 기자는 평생 사진을 찍었다. 1967년 미군 기관지 '성조'의 외신기자로 시작해 1994년 '로이터 통신사' 한국지국 사진부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부장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상을 지키기보다 현장에 나갔다.

부마항쟁과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

1979년 10월, 부산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들끓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으로 맞선다. 그러자 정 기자는 계엄사 공보책임자의 "조심하세요!"란 걱정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듣고도 부산으로 향했다. 사정은 좋지 않았다. 계엄군은 지나가는 젊은이들에게 이유 없이 매질을 했다. 그러면서 계엄군은 구타현장을 시민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카메라에 찍히지 않기 위해 막았다. 낮에는 자갈치시장과 부산시청 앞을 누비고 밤새 홍콩과 동경으로 사진을 전송하며 부마항쟁을 기록했다.

부마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자 강경책을 쓰고 나섰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부마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자 강경책을 쓰고 나섰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 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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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젊은 남녀를 보면 대여섯 명의 계엄군이 둘러싸서 M-16 개머리판으로 무조건 구타했다. 이때 기자들이 촬영하려 몰려들면 계엄군은 발을 걸거나 손으로 렌즈를 막으며 몸으로 밀어붙였다. 심지어 넘어진 기자와 장비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기자들도 하나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주어야 했다. 취재 방해를 받으면 그 장면을 촬영하고 계엄군에게 구타당하면 구타 장면을 촬영해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주었다.(<서울발 사진종합> '작가의 말'에서)

그는 1980년 5월엔 광주에 있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목격한 장면은 대로변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손자가 계엄군에게 사살 당했다고 했다. 당시 국내 언론사는 철저한 보도가 통제돼 있었다. 그러나 망월동 묘지에 관을 실은 행렬이 연일 이어지자 현실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취재에 돌입했다. 정 기사는 당시 "계엄군 두 명이 발 한 쪽씩 잡고 끌고 내려와 사망자의 머리가 계단에 통통 튀던 끔찍한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한 어머니가 6년 전 광주항쟁에서 살해당한 아들의 묘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그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의 친척들을 포함한 5백여 명 정도의 많은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광주시 북동쪽에 위치한 망월도 묘역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가했다.
 한 어머니가 6년 전 광주항쟁에서 살해당한 아들의 묘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그 당시 살해당한 사람들의 친척들을 포함한 5백여 명 정도의 많은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광주시 북동쪽에 위치한 망월도 묘역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가했다.
ⓒ 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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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카메라 두 대를 번갈아 가면서 촬영하다가 컬러 카메라로 촬영하기 위해서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는 순간, 관광호텔 옥상에서 전남일보사를 내려다보던 저격수가 나를 시민군으로 오인을 했는지 조준 발사한 실탄이 내 머리 뒤 벽에 맞으면서 콘크리트 파편이 뒷머리 쪽을 때렸다.(<서울발 사진종합> '작가의 말'에서)

그도 사람인데 어찌 두렵지 않았으랴. 사진은 딱 그 '순간'을 담는다. 전후맥락이 없는 '찰나'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글보다도, 어떤 영상보다도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왜곡이 없이 실체 그대로란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런 사진의 습성을 잘 알았던 정태원 기자는 항상 현장에 스며들었다. 어디에서 찍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박진감이 넘치는 앵글을 고수했다. 덕택에 우리는 살아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대장정의 현장에 있었던 것은 사진기자로서 행운이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전 세계에 알려 국제적인 여론을 형성해 우리의 민주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면 다행이다. 사진기자에서 은퇴한 나는 요즘도 종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의 환청을 듣는다. 시위대의 함성소리 그리고 작열하는 최루탄, 총소리와 비명 소리…. 오늘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자유 속에는 젊은 나이에 숨져간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다. 사진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각인해 주어서 무엇보다 다행이다.(<서울발 사진종합>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탄생한 사진들이 <서울발 사진종합>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간절히 부탁컨대, 이 사진들 부디 가슴으로 읽으시라. 그리고 꼭 마음에 뜨겁게 새기시라. 그 먹먹함, 그냥 두시라.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고 이한열 열사가 동아리방에 남긴 메모)

약 5백여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던 전투경찰이 학생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다. 학생들은 집회 후 교정 밖으로 나가 행진한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약 5백여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던 전투경찰이 학생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다. 학생들은 집회 후 교정 밖으로 나가 행진한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 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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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울발 사진종합>, 정태원 지음, 눈빛 펴냄, 2013.12, 4만원



서울발 사진종합 -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대장정

정태원 지음, 눈빛(2013)


태그:#서울발 사진종합, #정태원, #눈빛출판사, #이한열,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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