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전 '격동의 한국'이 인천 동구 금곡동에 소재한 '사진공간 배다리'(관장 이상봉)에서 11월  20일부터 12월 11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주로 60년대 중반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베트남 파병, 당시의 청계천 변, 부산 하코방, 미군기지촌 등 격변의 시대를 담은 사진들이다.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특강
▲ 사진가와의 만남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특강
ⓒ 김승혜

관련사진보기


지난 23일 구와바라 시세이의 강연이 배다리 갤러리 주관으로 아벨전시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인천의 사진인 50여명과 공동전시를 하고 있는 안양의 A-One 갤러리 관장 이용하 교수, 김석배 원로사진가, 인천아시아 경기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신용석, 연변대학 류은규 교수, 아침을 여는 사람들 대표 신희식 등이 함께 하였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초대 고맙습니다. 저는 보도사진가이며 다큐작가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2시간 30분간에 걸쳐 자신의 사진 철학과 한국에서 담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참석한 사람들에게 전해 진한 감동을 주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도쿄 농대를 졸업 후 사진가가 되려고 도쿄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 공부를 하였다. 일본에서 수은 중독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을 주제로 사진계에 입문하였고 1964년부터 한국을 취재, 기록하기 시작하여 그가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일본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라고 불리우는 그는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이라는 신념으로 1960~1970년대 격변의 한국역사 현장을 담았다.

그의 고향 츠와노에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미술관'이 설립되어 미나마타·한국·베트남 등 그가 평생에 걸쳐 기록한 사진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02년 한국에서 동강사진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일본에서 사진전집을 냈고, 한국에서도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2008, 눈빛)이 출간되었다. 최근에는 이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미나마타 사진을 일본 니콘 살롱에서 전시하였고, 한국의 안양 A-One갤러리와 인천 사진공간 배다리에서의 전시와 특강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웃 나라에 관심을 갖다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1학년 자취방에서 한국인 학생과의 만남에서 부터였다'고 했다. 한국 학생이 부르는 아리랑과 한국 이야기 등을 통하여 한국을 알게 되었고 한국의 모습을 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이후 한국을 알기 위해 공부하면서 도항방법을 찾던 중 1960년 '태양'이라는 일본 잡지의 취재를 위해 기자의 신분으로 처음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은 전쟁 후라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가슴 아프게, 노란 셔츠의 사나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던 시절이었다.

처음 입국해서는 부산의 '하코방'과 근대화 이전의 농어촌 서민들의 궁핍한 삶, 일제 강점기가 남겨 놓은 잔재 등 '분단 한국'의 현실을 기록해 나갔다. 베트남전 파병과 이듬해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기 직전의 시위현장부터 무장군인들의 고려대 캠퍼스 진입, 진입군에 쫓기다 청계천 시궁창물에 빠진 시위대,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 등, 잇달아 전개되는 긴박한 상황들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돌이켜 보면, 사반세기에 걸친 한국 취재는 결코 용이하거나 편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굴욕에 찬 고행의 연속이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조그마한 메시지나마 전해 줄 수 있다면, 필자로서는 더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 <다큐멘터리 사진가> 사진집에서

"기록해야 할 역사를 그 시대의 유산으로서 남겨두지 못한 사진가는, 다만 그 시대를 살았을 뿐인 한 사람의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 구와바라 시세이의 <보도사진가> 중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 1965. 한일 회담 반대 시위대.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 사진공간 배다리 제공

관련사진보기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는 "한국 사진이 몇 만 컷 되는데 한국사람이 가장 손 꼽는 사진 중의 하나가 1965년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사진이며 특히 한국의 지식인층이 좋아한다"면서 작품과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또한 그동안 변모한 한국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등 애정을 드러내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자상하게 답을 해주며, 거장으로서의 진지함과 인간적인 모습을 함께 보여주었다.

한국 역사상 해외 첫 파병

월남 파병은 역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어서 철수된 후에도 이슈가 되었다. 그는 "1967년 베트남 사이공까지 들어가 72~73년 맹호부대 철수하는 모습까지 계속 찍었다. 맹호부대, 백마부대의 군인들이 맹렬하게 활약하는 것을 보고 월남인들은 한국인을 무서워하였고 '대한'이라 불렀다. 72년, 앙케고개 전투시 한국 맹호부대는 큰 작전을 펼쳤고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라며 당시 한국군의 상황을 설명을 곁들여 현장감 있게 설명하였다.

해외 첫 파병
▲ 1965. 베트남 파병국군 해외 첫 파병
ⓒ 사진공간 배다리 제공

관련사진보기


큰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 밀양이란 지명이 재미있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그 당시엔 전기도 안 들어왔는데 이제 이러한 풍경 보기 힘들 것이다.
▲ 밀양. 가장인 아버지가 독상을 받고 있는 유교적인 한국의 모습 큰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 밀양이란 지명이 재미있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그 당시엔 전기도 안 들어왔는데 이제 이러한 풍경 보기 힘들 것이다.
ⓒ 사진공간 배다리 제공

관련사진보기


열차편으로 포항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청룡부대 병사들.CBS기자와 함께 이 사진 찍고 바로 연행되었다.
▲ 1965.10 베트남 파병. 열차편으로 포항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청룡부대 병사들.CBS기자와 함께 이 사진 찍고 바로 연행되었다.
ⓒ 사진공간 배다리 제공

관련사진보기


청계천변을 찍다

"청계천변을 자주 찍었는데 갈 때마다 한국 친구가 가난한 모습을 찍어 일본에 발표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가난한 모습을 찍기 위해 간 것이 아니고 북한서 피난와 정착한 모습을 찍기 위해서 갔다."

그는 당시 이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이는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서울시 미술관에 10점 정도의 청계천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고. 담당 직원에게 옛날 모습을 기록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까지 4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청계천의 현재는 다리가 없어지고 건물도 깨끗하고 좋은 모습으로 변했다. 한국인 아내는 가끔 부끄러운 모습은 발표하지 말라고 하는데 자신은 자유로운 시선으로 사진을 찍었고 그러한 사진들은 이제 역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에 공개하는 이러한 사진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사진은 기록이고 역사다'라고 강조한다. 개나리와 진달래꽃 등 풍경 사진은 계절을 기다리면 해마다 찍을 수 있으나 가정에서 아이를 출산했다던가, 초등학교 입학 등의 일들은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고 두 번 다시 찍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록은 제 3자의 눈에서 보게 되고 생각해 보고 꼭 필요할 때 셔터를 눌러야 한다고 했다.

기록적인 면의 사진은 보여지는 것이 숙명이자 운명이라 보여진다. 보여지는 것의 측면에서 찍히는 사람의 표정과 감정이 풍부해 져야 함은 당연하며 이것이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의 특징인 것 같다.

다음은 관객과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1972년 유진스미스의 미나마타병에 걸린 욕조 속의 토모코 사진을 보고 '내가 졌다.' 겸손하게 패배했다고 하였는데 그 후에 다른 각도로 찍은 것을 보았다. 의도적인 연출이었을 텐데 왜 졌다고 하였는가? 가족사진을 찍으며 그 경지를 넘어선 것 아닌가?
"날카로운 눈이다. 유진스미스 사진은 라이프지를 통해 소개되었고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박력있는 사진이어서 '나는 졌다'고 하였다. 그 후 5년 뒤 20살 성인의 날. 나는 토모코가 옷을 입고 가족과 함께 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알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수치이며 견디기 힘든 일이라는 점에서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정서가 있다. 나는 유진스미스 만큼 잘 찍는다는 희망을 갖고 찍었다. 사람은 죽어도 사진은 살아남는다. 내 사진에는 항상 웃음이 있어 가족들이 좋아한다. 어린이 사진은 웃음이 중요하다."

- 포토저널리스트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첫 작업은 '미나마타'이고 두번째 작업이 '한국 격동의 시대'이다. 어디서나 기록은 하지만 정치적 슬로건을 외치지는 않는다. 다만, 당당하게 찍고 잡지에 싣고 발표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집으로 경찰이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경찰에 연행된 적은 있으나 한국정보부에서 어떤 운동이나 군사기밀에 관계된 일이 아닌 기록일 뿐, 그저 사진만 찍은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해주어서 식사도 하며 지냈다. 하지만 포토저널리스트로 50여년간 일해오면서 지금까지 지옥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다시 태어난다면 사진은 하지 않고 월급쟁이 하고 싶다."

- 인천과 안양의 소규모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 것에 대해 한 마디.
"'사진공간 배다리'와 안양의 'A-One' 갤러리의 합동 전시는 소규모 갤러리가 자신들의 특성을 살려 새로운 형태의 전시를 시도하는 것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이번 초청 건을 받아 들였다.  A-One 갤러리의 마틴 리 교수는 이미 도쿄의 니콘살롱에서 전시되는 고엽제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직접 보면서 마음으로부터 응원하고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의 갤러리에서 내 작품이 걸리게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한 인천의 '사진공간 배다리'는 최근 들어 지역의 사진인과 함께 다양한 사진 작업을 만들어 가는 작지만 큰 일을 하는 소박한 사진 전문 갤러리로 들었다. 그와 같은 곳에서 내 작품을 걸 수 있다는 것 또한 영광이며 두 군데의 갤러리에서 사진 전시를 허락하여 주신 마틴 리 교수와 이상봉 대표께 감사함을 전한다."

구와바라 시세이 (桑原史成, Kuwabara Shisei, 1936~)

약력
2006  사가미하라상 수상
2002  동강 사진상 수상, 강원도 영월군
1982  이나 노부오상 수상
1971  사진집 '미나마타 병(1960~1970)' 으로 일본사진협회 연도상 수상
1965  고단샤 사진상 수상
1962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
1960  도쿄 농업대학, 도쿄 사진 전문학교 졸업
1936  일본 시네마 현 츠와노 출생

사진전
2009  초대전 '내가 본 격동의 한국' 고은미술관, 부산
2008  초대전 ' 내가 본 격동의 한국' 한미사진미술관, 서울
2003  '임진강 - 내가 본 북한'긴자 니콘살롱, 도쿄
2002  '격동의 한국 1964~2001)' 프레스센터, 서울
1999  '치쿠호' 긴자니콘 살롱, 도쿄
1999  츠와노 현대 포토 갤러리
        (2004년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미술관' 으로 명칭 변경)
1998  구와바라 시세이 상설전 '베트남'
1997  구와바라 시세이 상설전, '러시아' '한국'
1994  개인전 '병든 대국 러시아' 긴자, 오사카 니콘살롱, 도쿄
1989  '한국-격동의 사반세기'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1982  다큐멘터리 2인전 '미나마타, 한국, 베트남' 긴자, 신주쿠,오사카 니콘살롱
1979  개인전 '베트남' 긴자 니콘살롱, 도쿄
1966  개인전 '한국 민족 분단의 비극' 후지포토살롱, 도쿄
1962  개인전 '미나마타' 후지포토살롱, 도쿄



태그:#구와바라 시세이, #사진가와의 만남, #사진공간 배다리, #관장 이상봉, #김승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