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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외국어 실력은 대단한 것 같다. 미국과 영국을 가서는 영어로 연설을 하고, 중국에 가서는 중국말로 연설을 하고, 프랑스에 가서는 불어로 연설을 하니, 그의 외국어 능력은 알아줄 만하다. 앞으로 일본을 가면 일본말로 연설을 하고, 독일을 가면 독일어로 연설을 하고, 러시아를 가면 러시아어로 연설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꽤나 흥미로운 사항이다.

진정 얼마나 국익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통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외국 나들이를 가장 많이 하는 대통령이 될 것 같다. 국내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국내 정치는 부통령이라고도 불리고 대원군으로도 불리는 비서실장 김기춘에게 맡기고) 외교 쪽으로 전심전력할 것 같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외국어 실력을 발휘할지(방문국의 언어로 연설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연습에 몰두할지) 정말 흥미로운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외국 나들이를 할 때마다 다양한 패션을 보여주니, 의상 쪽으로는 문외한인 나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국의 대통령이 외국에 가서 그 나라 언어로 공식 연설을 하고 또 대화를 한다는 것은 '실용주의'와 효율성 측면에서는 득이 될 수도 있다. 통역의 번거로움과 시간 손실을 해소할 수도 있고, 친밀성을 배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일부 자국 국민들에게는 모종의 뿌듯함 같은 것도 안겨줄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잃는 것'도 있다. 방문국의 언어로 공식 연설을 하는 순간 방문국의 언어는 최고 존중을 받는 셈이 되지만, 자국의 언어는 홀대 받는 꼴이 된다. 자국어가 있는데도, 한글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섬세한 언어로 꼽히는 자국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언어약소국임'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자존심을 포기하고 들어가는 꼴이다.

방문국의 언어로 연설을 했을 때 받게 되는 그 나라 사람들의 박수에는, 연설 내용과 관계되는 박수와는 별개로 대략 두 가지 성격이 함축된다. 방문국의 언어를 사용한 것에 대한 감사와 우호의 뜻이 우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방문국의 언어를 익히고 연습하느라 소모한 시간과 수고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보내는 뜻도 있을 것이다. 방문국을 최대한 존중하는 자세와 노력을 기특하게 여기는 그 칭찬과 격려의 박수 속에는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기쁨도 배어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 그들의 박수가 그런 성격으로만 머물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중에는 자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방문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의 국가 원수를 측은하게 보는 눈도 없지 않을 것이다.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자존심을 포기했거나 기본적으로 지니지 못한 태도로 여기면서 속으로는 경멸감을 가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외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방문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외국어 능력을 방문국과 자국의 국민들에게 약여하게 드러내는 것이 되니 개인적으로는 큰 과시와 성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사로운 신분이 아닌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처지에서는 언어 사용에도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이 결부된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 국가원수들을 보도를 통해 많이 보아왔다. 여러 국빈들이 "안녕하세요?", 또는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우리말 한마디씩을 하는 것도 더러 보았다. 그때마다 고마운 마음 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말로 연설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어느 외국의 국가원수가 우리말로 공식 연설을 한다면 고마운 마음보다는 그를 측은하게 여기고 경멸하는 마음이 더 클 거라는 생각을 일찍이 한 적도 있다.

1984년 5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순간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6일 한국 순교성인 103위 시성식을 거행하는 미사를 한국어로 집전했다.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1989년 10월 8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장엄미사 때는 강론 사이사이에 우리말을 한마디씩 사용하였는데, 그때마다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100만 신자들은 환호를 하기도 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우리말 미사 집전과 강론 사이사이의 우리말 사용은 훌륭한 언어를 가진 우리 민족에 대한 존중심의 표현이기도 할 터였다. 교황의 음성으로 우리말을 들으며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을 새롭게 느낀 신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세계 수장인 로마 교황과는 달리 외국의 국가원수가 한국에 와서 자국어를 버리고 한국어로 공식 연설을 한다면 고마운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뭔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를 조금은 측은하게 보는 사람도 많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우선 여성 지도자라는 면에서 박 대통령과 비교된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친근한 정치인이지만 옷을 제대로 못 입는 정치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독일의 유명한 패션디자이너로부터 "제발 신체 비율을 생각해서 옷을 입으라"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다.

그렇게 수더분한 성격의 메르켈 총리는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자존심이 특별하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하면서도 어느 나라를 가든 독일어로만 연설을 한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국어 사용에는 국가자존심이 결부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국격'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국가 최고 지도자가 외국에 나가 자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방문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을 포기하면서 '약소국'의 실체를 증명하는 셈이 된다.

국가를 대표하여 외국을 방문하는 최고 지도자에게는 모국어에 대한 '자존심의 의무'도 쥐어져 있음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런 자존심을 지닌 지도자를 외국인들이 더욱 경외의 눈빛으로 보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외국어 연설#메르켈 총리#교황 요한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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