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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의 종교계를 대별하면 보수와 진보가 있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사회참여(민주화 운동 등)에 적극적인 경우에는 진보, 종교적인 활동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 보수라고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도 진정한 보수가 드물듯, 종교계도 '보수'라고 하면, 친여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권력지향적인 경향을 드러낼 뿐, 진정한 보수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분단의 상황은 특별히 사회주의에 의해 '민중의 아편'으로 지목된 기독교인들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설익은 사회주의와 설익은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은 인간해방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서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해악을 가져왔다. 더욱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을 이후, 한국 기독교는 부흥기로 접어든다.

여러모로 종교적인 치유가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남한에서는 공산화될 뻔한 조국을 구해 주고, 원조를 해주는 미국에서 들어온 종교, 그 중에서도 미국에서 들어온 근본주의 기독교는 우리나라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근본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성서해석의 문제 등에 반기를 든 이들을 교단에서 쫓아내고, 그로인해 1953년 장로교회는 분열되어 '한국기독교장로회(아래 기장)'가 출범하게 된다.

이후, 기장은 사회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사회적인 약자를 위한 선교활동 등과 사회민주화 문제, 통일문제 등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박해와 용공몰이 등으로 많은 핍박을 당하고, 유신체제 하에서는 학생과 교수들이 삭발투쟁을 감행하면서 기장의 사회참여와 민주화운동은 정점을 달린다. 문익환 목사의 통일운동 역시도 기장이라는 모태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그때, 보수교단에서 기장을 향해 하던 말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종교의 정치적 중립성, 그것이 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기장뿐 아니라 사회참여와 민주화운동에 매진을 하던 형제교회들을 향해 용공딱지를 붙이는 것도 모자라 사탄딱지를 붙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결국,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많이 두었던 교단은 양적인 성장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다. 반대로 오로지 양적성장에만 치중하던 교단은 대형교회가 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급격해졌으며, 그 사이 양적인 성장에 관심이 없었던 교회들도 그 대열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그 중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책임 있는 신앙인 보다는 위로 받는 신앙인, 사회구원 보다는 개인구원, 종교의 개인화 등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보수대형교회 목사들도 교계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열망들이 커져갔다. 그렇게 태동한 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아래 한기총)이다. 그들은 줄곧 이전에 한국개신교를 대표하던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는 일정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대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상반된 견해들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여적이고 권력 지향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학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 조직은 KNCC를 능가하는 조직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자칭 진보를 표방하던 교단이나 KNCC 등도 내홍을 겪는다. 그 내홍이라는 것은 규모만 작을 뿐, 그들 안에서 대형보수교회나 단체들이 가진 단점들, 그들이 비판하는 비민주적인 작태들이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자기를 철저하게 변혁하지 못하고 대사회적인 문제에만 치중하는 사이, 자신의 신앙적인 경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개신교단의 큰 흐름은 보수와 진보의 흐름이다. 그런데 대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때 어느 한 쪽은 정치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어느 한 쪽은 종교행위라고 면죄부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때, 그 종교행위는 비정치적인 것일까?

조금 쉬운 예를 들자면, 5공화국 시대에 전두환을 찬양하던 교회나 이명박 대통령 당시 4대강 사업을 찬양하던 교회, 지금 박정희를 찬양하는 교회들의 행동은 정치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나 행사에 골몰하는 이들이, 역사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부당성이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규명을 위한 행동을 하는 교회에, 지난 대선 국정원 불법선거개입사건 등에 대해서는 정치적이라고 맹비난하는 것이다. 그런 비판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그들의 친여 혹은 권력지향적인 행동 역시도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하는 교회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려되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현 정권을 지지하는 것뿐 아니라 '유신망령'을 되살리는 일도 함께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 종교내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 역시도 상실했다. 이젠,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교단조차도 빈껍데기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것은 종교행위가 아니다. 보수나 진보나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의 잣대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곧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제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억지 해석되고 있으며, 교인들은 무슨 재미있는 토크쇼를 보듯 예배를 드리는데 익숙해 있다.

또는, 말로는 민주화를 외치고 사랑은 외치지만 끊임없이 권력을 지향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불법과 불의가 정의인척 행세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보수냐, 진보냐?"는 무색해 졌다.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예수 정신'을 살아가야 할 터인데,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권력만 지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불성 사나운 것은 현재의 권력에 아부하는 종교행사를 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는 정치적인 행동이 아니라 '순수한 종교적인 행사'라고 우기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 일수록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종교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치적'이라고 맹비난한다.

종교인들이여,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면 비정치적인 행동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정치적이고 너무도 정치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종교적이라 하고, 당신들과 입장이 다른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만 정치적이라고 핏대를 올리지 말라. 예수도 정치범으로 죽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으로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들풀교회'담임목사입니다.



태그:#개신교,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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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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