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지난 2008년 1월 31일 오전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앞에서 태안 기름유출 사고에 대해 '무한 책임' 질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지난 2008년 1월 31일 오전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앞에서 태안 기름유출 사고에 대해 '무한 책임' 질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최근 미국에 있는 한국 라면 수입업자가 중심이 되어 라면 제조 회사들에 대해 집단소송 움직임을 보인다는 기사를 접했다. 몇 개 라면 제조 회사들이 라면 가격을 담합한 사실이 적발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과징금을 부과받은 것을 근거로 미국에 있는 라면 소비자들이 피해를 구제받기 위한 집단소송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만약에 승소하게 된다면, 이를 추진한 변호사와 라면 소비자들은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무슨 우스꽝스런 광경인가? 라면을 소비하는 양으로 보자면 한국 내 소비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에 피해 금액 전체를 따진다고 해도 미국 소비자들의 피해에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라면을 소비하는 소비자는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반면 한국 내 있는 불쌍한 소비자는 먼 하늘만 쳐다 보는 격이다.

집단소송 제기 못하는 '불쌍한' 한국 피해자들

또 얼마 전엔 현대자동차가 미국에서 연비에 대해 과장광고를 했다는 이유로 미국 소비자단체의 거센 비판을 받은 일이 있었다. 현대자동차는 발 빠르게 소비자 단체와 합의를 하고 이 문제를 일단락시켰다. 반면 국내에선 현대자동차가 생산하는 기종인 산타페에서 설계상의 잘못으로 차량 뒷문 누수 현상이 발생해 소비자들이 아우성을 쳤음에도 현대차는 한동안 나몰라라 했다. 같은 기업인데도 왜 소비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다를까.

대한항공이 다른 항공사들과 담합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유럽 당국으로부터 엄청난 과징금을 부과 받은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후속 소송(follow-up suit)으로 대한항공을 상대로 소비자 집단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그 소송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집단소송법이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 진행을 하는 편이 소송 전략상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대한항공을 가장 많이 이용하면서도 집단소송의 원고로 참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민주주의에서 '다수'는 때때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투표에서 '다수'를 득표한 후보자는 선임이 되고, '다수'의 지지를 받은 안건이 채택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하나의 원칙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 그 중 하나가 '피해를 입은 다수'의 경우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수임에도 다수(多數)로서 힘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다수'의 피해자가 힘을 합하여 '소수'의 가해자에게 잘잘못을 다툴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소송절차법이다. 피해자가 다수더라도 굳이 잘잘못을 따지려면 '다수'란 옷을 벗고 일대일로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산업화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집단적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늘 상존한다. 가령, 잘못된 제품의 제조, 환경오염, 개인정보의 잘못된 관리, 상장회사의 분식회계 등 그 원인은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피해 금액이 너무 적어서 개별소송을 제기하기에는 경제적 실익이 없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는 정보의 질적, 양적 부족은 물론 교섭력 부족 등으로 스스로 사안을 명백히 하고 손해를 보상 받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일반 절차법으로서의 집단소송제도(Class Action)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만이 제정되어 2005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나마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아 사문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국회 차원에서 소비자 집단소송이나 환경 집단 소송에 관해 논의는 많이 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반대 여론에 부딪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집단소송은 기업에게 부담만 주는가

선진국과 비슷한 집단소송을 도입하자고 할 때마다 일각에선 '기업에게 너무 큰 부담이어서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불평만 늘어 놓는다. 이젠 경제 규모가 전 세계에서 열두세 번째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경제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소비자를 보호하고 환경 오염에 따른 피해자를 보호하자고 하면 갑자기 나약한 척 한다. 한 마디로 경제가 더 커질 때까지 참으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기업에게 부담만 되는 걸까? 그리고 진짜 세상에 없던 새로운 부담이 생기는 걸까? 집단소송이 도입된 선진국의 경우, 이로 인한 기업들의 부담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사회적 편익이 비용보다 크기 때문에 그 제도를 존치시키는 것이다. 집단소송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집단소송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발표되고 있는 비판적인 글들을 보면서 "그것 봐라, 우리나라에서 집단소송을 도입하지 않기를 잘했지"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 어떤 논문이나 글도 현재 존재하고 있는 집단소송을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제도의 합리성을 높이자는 논의가 일어날 뿐이다. 어떤 제도든지 시행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 단점이 발견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인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건설적 비판을 마치 그 제도의 근본이 잘못된 것인 마냥 전달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또한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서비스와 상품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 궁극적으로는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해자인 삼성중공업과 피해 주민 사이에서는 보상금액을 두고 분란이 계속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피해금액 산출에 이견이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삼성중공업 입장에서도 수많은 피해자들과 상대를 하려니 골치가 아프고 타협점을 찾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선진국에서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는 집단소송이 있다면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가해자도 피해자 대표원고와 협상을 진행하면 되는 편리함이 있다.

일반적인 집단소송 도입은 대등한 갑을 관계의 시작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에게 폭언하는 녹취음성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거센 비판이 불매운동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김웅 대표이사와 본부장 이상 간부들이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고개숙이고 있다.
▲ 고개숙인 남양유업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에게 폭언하는 녹취음성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거센 비판이 불매운동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김웅 대표이사와 본부장 이상 간부들이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고개숙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우리 사회는 '을'들의 절규로 한바탕 큰 소동을 치렀다. 너무 빨리 잊는 사회라서 그런지 우리나라 '갑을관계'는 별로 변한 것이 없는데, 많이 조용해진 것 같다. 갑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시도하기보다는 개별 사안별 또는 회사별로 조금 어르고 달래주는 식의 임시방편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화된 산업사회를 살고 있다. 가해자는 한 기업이거나 소수인 경우가 많지만 피해자는 때로는 수 만 명, 수 천 명에 이르는 경우도 흔히 발생한다. 흩어져 있는 피해자는 늘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으며 '갑'과 상대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경우는 흔하게 목격된다. 집단소송이 도입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 깊이 박혀 있는 갑을관계가 하루 아침에 청산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조금이나마 비빌 언덕이 생긴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지수 기자는 미국 변호사로 경제개혁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집단소송법, #갑을관계
댓글11

경제개혁연대는 소액주주 권익보호, 기업지배구조 개선, 정부의 재벌·금융정책 감시 등 1997년 이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활동을 보다 전문화하고 발전시키려는 경제전문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