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대교가 테러범에 의해 폭파된 모습.

마포대교가 테러범에 의해 폭파된 모습. ⓒ 롯데인터테인먼트


더운 여름날, 숨 막힐 만한 속도감으로 쉴 새 없이 관객을 밀어붙이는 영화가 대한민국 영화계를 강타했다. 스토리의 전개는 관객들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다. 바로 김병우 감독의 <더 테러 라이브>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한국 영화계는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명제를 줄기차게 증명해 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실과 무리하게 접목된 정치적 메시지를 꺼내 놓으며 대중들의 '분노'와 '사명감'을 엮어 마케팅하는 방식을 쓰지 않으면서도, 영화 본연의 의도를 멋지게 구현해 내며 입체적인 해석마저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영화

사실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거대 담론으로 뭉뚱그려 치환해 대중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포맷에서 크게 벗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디테일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과 사과 한 마디 없는 사회 고위층들의 모습 등에서 현실의 여러 가지 사건이 포개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말에서는 뜨거운 가슴으로 뭉쳐진 개탄과 허무주의의 코드까지 읽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완성도 넘치는 재미를 준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영화 자체의 함량과 상관없이, 그 영화가 현실과 맞물려 사회에서 소비되는 양상이 다양한 감상과 피드백을 방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난해 대선 이후 휘몰아친 <레미제라블>의 열풍과 같이 어떤 '절대악'을 설정해 놓고, 그에 대한 분노가 이끄는 낭만에 빠져드는 식으로만 소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고 박진감이 넘친다. 확실히, 그렇게만 소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영화다.

그런 방식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더러 영화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막아 더 나은 사회성을 담은 영화를 이끌어내는 선순환의 동력으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라도 이런 류의 영화 앞에서는, 더욱 침착해질 필요가 있다.

억울한 사회, 대중들의 욕망

영화의 내용이 전개되는 공간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방송국과 마포대교 정도가 다다. 그 제한된 공간에서, 라디오로 물러난 유명 앵커 윤영화(하정우 분)는 테러범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빌미로 자신의 삶을 회복하려다가, 그 삶 전체가 테러사건에 휘말려 재규정되는 과정을 겪는다. 테러범은 2년 전 마포대교 보수 공사 도중 불의의 사고로 숨진 일용직 노동자 박노규의 아들이다. 그는 죽음에 맞닥뜨려서도 위로받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숨겨진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의 원한과 아우성을 안고,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삶의 위치에서 힘겹게 버티어 가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TV에 나오는, 이른바 '높은 곳에 계신' 위정자들의 삶은 '다른 나라'의 풍경쯤으로 읽힌다. 그들은 지금까지 본인들의 삶을 위로해 줄 수 있을 만한 정책이나 제도를 경험한 바가 없다. 성장 이데올로기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한국 사회의 편향성 탓이다. 박노규를 다리로 내몰았던 사건 또한, 그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외국의 높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 때문이었다. 신문지상에는 그런 자리들이 보통 '경제효과'로 치환되어 설명된다. 하지만, 그것만큼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수치도 없다. 과연 그 '경제효과'라는 것이 언제 국민들에게 1/N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는가 말이다.

우리 사회가 경험한 87년의 민주화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 이룩한 두 번의 민주정부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권위주의 세력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신자유주의의 품에 안겨 버렸다. 우리 사회는 단 한 번도 박노규와 같은 이들을 위로해 주는 구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박노규들이 양산되었고, 지금도 그들은 우리의 곁에서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실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흥행이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들이 대체로 재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런 영화들의 영화적 완성도의 부족을 지적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확실히 <더 테러 라이브>는 이러한 고착화된 프레임에서 가볍게 스틱을 당겨 날아올라 새 지평을 열었다.

이 영화의 소비 방식을 생각한다

현실 정치 상황을 이 영화에 대입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어떤 달콤한 위안마저 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소비를 거기서 그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마지막에 그려지는 윤영화의 극단적 선택에서 분노에 대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데서 그치기보다는, 테러범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 그에게 사과하며 그의 손을 잡아 주는 윤영화의 모습에서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과, 겉보기의 삶은 안정적이지만 꿈을 억눌린 채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를 꿈꿔 보는 것은 어떨까.

간만에 분노와 정의감을 파는 마케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정치영화를 본 느낌이다. 분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공감과 동시에 뜨거운 눈물,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한 포맷에 세밀하게 구성된 기획을 덧붙인 영화였다.

사회성을 담은 영화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기준은 일반 영화의 기준과 같다. 영화 외적인 요소로 인해, 허술한 영화를 좋다고 말하는 것도 어색한 일이고, 좋은 영화를 허술하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영화가 담은 사회적 의미의 적합성과 영화적 완성도. 앞으로 <더 테러 라이브>와 같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정치영화 및 사회고발영화가 계속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테러 라이브 하정우 사회고발영화 윤영화 박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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