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5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부산경남입니다. [편집자말]
흔히 부산을 야구의 도시라고 말한다. 물론 부산에서 최동원, 이대호, 추신수 등 훌륭한 야구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선동열, 이종범을 배출한 광주, 박찬호가 태어난 공주, 류현진이 나고 자란 인천 역시 야구의 도시가 돼야 한다(물론 가장 많은 야구팀이 있는 서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부산을 연고로 하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대단한 명문 구단이라 할 수도 없다. 실제로 롯데는 신생구단 히어로즈(2008년 1군 진입)와 NC 다이노스(2013년 1군 진입)를 제외하면 가장 오랜 기간(20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지 못한 팀이다. 4년 연속 최하위(2001~2004년)라는 불명예 기록을 가진 팀 역시 롯데다.

그럼에도 부산과 경남 시민들의 롯데 사랑은 유별나다. 실제로 롯데는 지난 5년 연속 홈경기 100만 관중을 돌파한 유일한 팀이다. 프로야구 단일시즌 역대 홈경기 최다관중 기록(138만18명, 2009년)을 보유하고 있는 팀 역시 부산의 롯데다.

롯데 자이언츠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산과 경남의 야구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라운드에서 투혼과 근성으로 팬들을 울리고 웃겼던 수 많은 전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전설들을 모아 팀을 만든다면 어떨까.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선수도 있고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도 있으며 심지어 고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롯데 야구의 역대 포지션별 베스트를 뽑아본다면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선수 이름 옆 괄호는 그 선수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기간).

롯데 자이언츠의 포지션별 레전드 베스트 부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든 전설의 별들을 뽑아봤다. 투수 최동원, 포수 강민호, 1루수 이대호, 2루수 박정태, 3루수 김용희, 유격수 정영기, 외야수 김응국 전준호 손아섭, 지명타자 호세, 감독 로이스터.

▲ 롯데 자이언츠의 포지션별 레전드 베스트 부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든 전설의 별들을 뽑아봤다. 투수 최동원, 포수 강민호, 1루수 이대호, 2루수 박정태, 3루수 김용희, 유격수 정영기, 외야수 김응국 전준호 손아섭, 지명타자 호세, 감독 로이스터. ⓒ 고정미


[투수 최동원(1983~1988)] 부산야구를 상징하는 '불세출의 무쇠팔'

전무후무한 100완투의 '황태자' 윤학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롯데를 우승시킨 '무서운 아이' 염종석, 약관의 나이에 프로야구 역대 한 시즌 최다 탈삼진에 도전했던 주형광까지. 롯데에는 좋은 투수들이 무척 많았지만 모두가 이 이름 앞에선 작아질 수밖에 없다. 바로 '전설의 무쇠팔' 최동원이다.

최동원을 이야기할 때는 역시 1984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강력한 구위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던 최동원은 프로 입단 2년째이던 1984년 롯데가 거둔 50승 중 절반이 넘는 27승을 홀로 책임지며 롯데의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그리고 최동원은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김시진과 김일융이라는 당대 최고의 원투펀치가 버티고 있던 삼성 라이온즈를 맞아 4번의 완투 경기를 펼치는 상상할 수도 없는 투혼을 발휘하며 혼자서 4승을 모두 따내는 기염을 토한다(정규리그 성적까지 더하면 그해 최동원이 거둔 승수는 1983년의 장명부를 뛰어넘는 31승이었다).

최동원은 1985년과 1986년에도 나란히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각각 20승, 19승을 따냈고, 어깨 부상으로 고전하던 1987년에는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과 연장 15회까지 가는 역사적인 완투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은퇴 후 해설위원과 코치로 활동하던 최동원은 지난 2011년 9월 14일 지병인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야구계 안팎에서는 최동원을 추모하기 위한 각종 기념사업들이 추진 중이다. 그 시절 최동원이 보여준 투혼을 빼고는 부산, 그리고 롯데의 야구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수 강민호(2004~현재)] 20대에 황금장갑만 3개 챙긴 전국구 포수

2008년 8월 22일, 베이징올림픽 야구 준결승을 앞두고 김경문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주전 포수 진갑용이 대만과의 예선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준결승 출전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김경문 감독은 '어쩔 수 없이' 경험이 미천한 만 23세의 어린 포수 강민호를 선발로 출전시켰다.

강민호는 처음 세 타석에서 연속 삼진을 당했지만 8회말 네 번째 타석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의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를 상대로 중견수 키를 넘기는 쐐기 1타점 2루타를 작렬했다. 그리고 강민호는 결승전에서도 9회 퇴장당하기 전까지 류현진을 차분히 리드하며 쿠바의 강타선을 2실점으로 묶었다.

베이징올림픽 전까지 그저 전도유망한 젊은 포수였던 강민호는 올림픽 이후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강민호는 그해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견인하며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박경완-진갑용의 양강 구도에 '젊은 피' 강민호가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이후에도 강민호는 팔꿈치 뼛조각 제거수술로 50경기를 결장했던 2009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110경기 이상 출전하며 리그 정상급 포수로 군림했다. 강민호는 최근 5년간 세 번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는데, 롯데 역사상 황금장갑을 차지한 포수는 강민호가 유일하다.

강민호는 올 시즌이 끝나면 자유계약 선수가 된다. 공수를 겸비한 20대 포수가 시장에서 엄청난 구애를 받을 것은 분명하기에 내년 시즌에도 강민호가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보여준 활약만으로도 강민호는 롯데 역사상 최고의 포수가 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투수 최동원, 포수 강민호.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투수 최동원, 포수 강민호. ⓒ 연합뉴스-오마이뉴스


[1루수 이대호(2001~2011)] '소총부대' 롯데에 드디어 '거인'이 나타났다

롯데는 원년의 'KK포' 김용희와 김용철을 시작으로 '자갈치' 김민호, '호랑나비' 김응국, '마림포' 마해영과 임수혁, '검은 갈매기' 호세 등 좋은 타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하지만 정작 롯데 유니폼을 입고서 홈런왕을 차지한 선수는 '빅보이' 이대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실 이대호 역시 입단 초기에는 허점이 많은 타자였다. 타고난 힘은 단연 발군이지만 지나치게 커다란 몸집(194cm, 130kg) 때문에 체중을 감량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대호는 프로 데뷔 4년차부터 20홈런을 때리기 시작하며 거포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고 급기야 2006년 프로야구 통산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타율·홈런·타점 1위)을 달성하면서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서게 된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최초의 홈런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007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정민태를 상대로 사직구장 개장 이래 최초의 장외홈런(비거리 150m)을 때려냈고 2010년에는 9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타격 7관왕을 달성했다. 이대호는 롯데 소속의 타자로 시즌 MVP를 차지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2009년에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해운대>에 특별출연해 설경구와 연기대결(?)을 벌이기도 했다(당시 설경구는 부산에서 이대호가 차지하고 있는 절대적인 위치를 망각하고 사직구장 그물에 매달려 가르시아송을 부르는 만행을 저질러 1000만 관객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작년 시즌부터 일본의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대호는 이적 첫 해 타점왕에 오르는 등 일본에서도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런 활약이 계속 이어진다면 내년에는 롯데가 배출한 최고의 타자를 한국도 일본도 아닌 미국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2루수 박정태(1991~2004)] 롯데 야구의 색깔마저 바꾼 근성과 투혼의 악바리

"오늘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근성마저 없다면 거인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

이 투박하지만 진한 울림이 있는 구호는 '악바리' 박정태가 선수시절 후배 선수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실제로 박정태는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2루수이기도 했지만 롯데의 포기하지 않는 근성야구를 상징하던 선수였다.

박정태는 5번의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역대 최다)과 역대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2년 연속 올스타 MVP 등의 화려한 경력을 가진 선수다. 특히 야구 연습장에서 한 번쯤 따라해봤을 법한 특유의 '흔들타법'은 박정태의 트레이드마크다.

하지만 박정태라는 선수를 몇 개의 수상 경력과 기록 몇 줄로 평가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박정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치고 달리고 던지던 프로야구 최고의 악바리였기 때문이다.

박정태는 1993년 경기 도중 발목뼈가 부서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로서는 그라운드 복귀는커녕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될지를 걱정해야 할 만큼 커다란 부상이었다. 모두가 박정태의 선수생활은 이대로 끝나게 될 것이라 전망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정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뼈를 깎는 재활 과정을 마치고 그라운드에 복귀한 박정태는 이후에도 네 번이나 3할타율을 기록하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특히 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는 후배들의 근성을 끌어 올리며 대역전승을 견인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정태는 한 명의 선수가 팀 색깔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고 동료들에게 얼마나 큰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지금도 부산·경남의 수많은 어린 선수들은 '리틀 박정태'를 꿈꾸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평소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성격 좋기로 소문난 부산 출신의 지인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불같이 화를 내며 흥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 글쎄 누가 박정태를 욕하잖아. 박정태를 욕하는 건 부산 사람 전체를 욕하는 거거든."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1루수 이대호, 2루수 박정태, 3루수 김용희, 유격수 정영기.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1루수 이대호, 2루수 박정태, 3루수 김용희, 유격수 정영기. ⓒ 연합뉴스


[3루수 김용희(1982~1989)] 원년 올스타전 만루홈런, 영원한 '미스터 올스타'

통산타율 .270에 통산홈런 61개. 홈런왕이나 타점왕 같은 개인 타이틀은커녕 3할타율을 기록한 적도, 20홈런 이상을 때려낸 적도 없다. 게다가 프로에서의 선수생활은 고작 8년. 분명 기록만 본다면 롯데의 레전드에 들어가기엔 다소 미미한 선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미스터 올스타' 김용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용희는 선수생명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았던 1982년, 2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로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에 열린 올스타전에서 김용희는 야구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당시 3차전까지 치러진 올스타전에서 2차전까지의 가장 유력한 MVP 후보는 2차전에서 3개의 홈런을 쏘아올린 팀 동료 김용철이었다.

하지만 김용희는 3차전에서 야구의 꽃,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꽃이라 할 수 있는 만루홈런을 작렬하면서 프로야구 최초의 올스타전 MVP, 미스터 올스타의 영예를 안았다. 참고로 올스타전 만루홈런은 원년의 김용희 이후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김용희는 2년 후 1984년 올스타전에서도 4타수 4안타를 몰아치며 프로야구 출범 후 3년 동안 두 번의 올스타전 MVP를 독식하게 된다. 전성기가 조금 지나 프로무대를 밟은, 어쩌면 그래서 조금은 불운한 선수생활을 보낸 김용희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롯데를 대표하는 거포로 기억되는 이유다.

[유격수 정영기(1983~1988)] 트레이드, 그에겐 좌절이 아닌 기회였다

가장 고민했던 포지션이다. 롯데에는 김재박-류중일-이종범-박진만-강정호 등으로 이어지는 프로야구 유격수 계보에 들어갈 정도로 특출했던 유격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격수 자리를 '해당자 없음'으로 비워 두는 것도 롯데의 유격수 자리를 거쳐간 선수들에 대한 예의는 아닌 듯하다.

롯데 최초의 유격수 골든 글러버 박계원은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시기가 극히 짧았고 잘생긴 얼굴로 많은 여성팬을 몰고 다닌 김민재는 롯데를 떠난 후에야 비로소 전성기가 찾아 왔다. 그렇다고 현재 팀 내에서도 주전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박기혁을 뽑을 수도 없었다.

1990년대 이후 마땅한 적임자가 없는 관계로 시대를 프로야구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선수보다는 코치로 더 익숙한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프로야구 선수간 트레이드 1호의 주인공 정영기다.

대전 신흥초등학교와 한밭중학교, 그리고 서울 충암고등학교 출신인 정영기는 MBC 청룡의 창단멤버였을 정도로 롯데와는 크게 인연이 없는 선수였다. 하지만 국가대표 유격수 김재박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MBC는 정영기를 롯데의 포수 차동열과 트레이드했다. 프로야구 역대 최초의 선수간 트레이드였다.

정영기는 이적 2년째이던 1984년부터 노쇠한 권두조 대신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해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고 이듬 해에는 자신의 선수 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면서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롯데의 2군 감독을 맡은 2008년에는 승률 .696의 뛰어난 성적으로 롯데를 남부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정영기는 트레이드가 소속팀에서 내쫓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성공 사례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외야수 김응국(1988~2003)] 꾸준해서 더 빛났던 '호랑나비'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외야수 김응국, 전준호, 손아섭.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외야수 김응국, 전준호, 손아섭. ⓒ 연합뉴스


이승엽, 이대호, 추신수, 그리고 최근의 김대우와 나성범까지. 이들은 모두 한국 야구를 빛나게 하는 스타라는 점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아마추어 시절에는 주로 투수로 활약하다가 프로입단 후 야수로 전향해 성공을 거둔 선수들이라는 점이다.

단지 가수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해 '호랑나비'라는 별명이 붙은 김응국 역시 투수로 프로에 입문했다가 타자로 전향해 대성공을 거둔 선수였다. 김응국은 1988년 프로입단 후 2년간 투수로 활약했지만 통산성적이 0승 0패 평균자책점 5.24에 불과했던 시시한 투수였다.

그렇게 투수로 한계를 보이던 1989년, 김응국은 코치의 권유로 마운드를 떠나 외야수 글러브와 방망이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 김응국에게 타자전향을 권유했던 롯데의 타격코치가 바로 롯데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편파해설의 달인' 이성득 해설위원이다.

김응국은 1991년 3할 타율과 올스타전 MVP를 차지하며 '투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냈고 1992년에는 타율 .319 10홈런 79타점 29도루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롯데를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김응국은 3할을 넘나드는 정교한 타격과 20개 이상의 도루, 그리고 통산 2위(61개)에 해당하는 발군의 3루타 생산능력을 선보이며 롯데 타선을 지켰다. 특히 현역 시절 기록한 3개의 장내홈런은 여전히 프로야구 역대 최다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응국은 타자로 활약한 15년 동안 단 한 번도 타이틀 홀더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199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7년 동안 3할 타율을 넘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응국의 통산타율은 .293에 이른다. 그가 얼마나 꾸준한 타자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외야수 전준호(1991~1996)] '대도'가 떠난 후 롯데의 추운 겨울이 찾아 왔다

2000경기-2000안타. 프로야구 역대 최다 도루(550개), 최다 3루타(100개). 이 위대한 숫자들은 김일권-이순철의 뒤를 잇던 '대도' 전준호가 세운 기록들이다. 프로야구 19년 경력의 전준호는 입단 6년 만에 타의에 의해 부산을 떠나 인천과 수원, 그리고 서울에서만 13년을 뛰었다.

하지만 단 6년 동안 부산에서 보여준 전준호의 존재감이 워낙 대단했기에, 그리고 경남 창원 출신으로 마산고를 나온 경남의 아들이기에, 부산과 경남, 그리고 롯데의 야구팬들은 전준호라는 선수를 차마 '남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180cm, 72kg의 비교적 마른 체형이던 전준호는 선천적으로 약한 파워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빠른 발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전준호는 극단적으로 배트를 짧게 잡고 장타보다는 출루에 중점을 뒀으며 과감한 주루플레이로 상대 수비를 괴롭혔다.

그 결과 전준호는 롯데의 1번타자로 도약하며 1992년 3할의 타율과 90개의 득점으로 롯데의 돌격대장으로 맹활약, 팀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전준호는 1993년에도 '바람의 아들' 이종범과 대도경쟁을 벌이며 생애 첫 도루왕을 차지했고 이종범이 군복무를 하던 1995년 생애 두 번째 도루왕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며 롯데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하지만 투수왕국을 꿈꾸던 롯데는 1997 시즌을 앞두고 '국가대표 에이스' 문동환을 데려 오기 위해 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로 팔아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전준호는 현대 이적 후에도 무려 네 개의 우승반지를 추가로 얻었지만 롯데는 전준호 이적 후 8년 동안 무려 6번이나 꼴찌에 머물게 됐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전준호의 이적과 롯데의 침몰 시기. 이것이 과연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외야수 손아섭(2007~현재)] 부족한 재능을 노력으로 극복해낸 차세대 전설

2007년 신인 드래프트 당시 현대를 제외한 7개 구단은 연고지역에서 각각 2명의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다. 마운드 보강이 최대 화두였던 롯데는 당연히 청소년 대표이자 경남고의 원투펀치였던 이상화와 이재곤을 지명했다. 2차 1라운드 지명 선수 역시 롯데의 선택은 공주고 투수 이웅한이었다.

순번은 돌고 돌아 4순위 지명 때 롯데는 드디어 부산고 외야수 손광민의 이름을 불렀다. 그로부터 약 7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저 격투기 스타 추성훈을 닮은 외모로만 유명했던 손광민은 이대호의 뒤를 잇는 롯데의 새로운 스타 손아섭이 됐다.

비록 서는 타석도 다르고 포지션도 다르지만 손아섭에게서는 '롯데 야구의 심장' 박정태의 향기가 난다. 점수 차이에 상관없이 공격을 할 때나 수비를 할 때나 최선을 다해 그라운드를 누비는 악바리 근성은 기본이고 동료 선수들의 분발을 이끌어 내는 리더십도 대단히 뛰어나다.

또한 손아섭은 자신의 약점을 끊임없이 찾아내 극복하는 노력형 선수다. 좌익수에서 우익수로 포지션을 바꾼 2011년 7개의 실책을 저지른 손아섭은 겨우내 피나는 수비연습으로 2012년 실책을 절반 이하(3개)로 줄였고 적극적인 베이스러닝을 통해 올 시즌 28경기 만에 작년과 같은 도루숫자(10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손아섭은 아직 만 25세에 불과한 어린 선수다. 아직 군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선수들에 비해 유혹에 흔들릴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젊다는 것은 그만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유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한국 프로야구에도 메이저리그처럼 젊은 선수들의 장기계약을 허용한다면 손아섭은 롯데가 가장 먼저 묶어둬야 할 0순위 선수다.

[지명타자 호세(1999, 2001, 2006~2007)] 차원이 달랐던 '검은 갈매기'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지명타자 호세, 감독 로이스터.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베스트. 지명타자 호세, 감독 로이스터. ⓒ 연합뉴스


최근엔 100경기 이상 출장 기록을 자랑하는 풀타임 빅리거 더스틴 니퍼트나 메이저리그의 손꼽히는 유망주 출신의 아담 윌크 등 화려한 경력의 외국인 선수가 한국땅을 밟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지만 외국인 선수 제도 초기에는 메이저리그 출신의 외국인 선수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실제로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타이론 우즈는 메이저리그 경력이 전무하다).

따라서 지난 199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올스타 무대까지 밟았던 '거물' 펠릭스 호세의 롯데 입성은 부산뿐 아니라 전 야구팬들의 관심거리였다. 소문대로 호세의 실력은 역시 '빅리그급'이었다.

호세는 1999년 타율 .327 36홈런 122타점을 기록하며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지명타자로 활약한 2001년에는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의 5할대 출루율(.503)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호세는 뛰어난 실력을 더욱 빛나게 할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호세는 1999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홈런을 친 후 관중이 던진 물병에 급소를 맞고 흥분해 관중석을 향해 방망이를 던졌다. 그리고 2001년 9월 18일 삼성전에서는 배영수의 얼굴을 가격하는 대형사고를 치며 잔여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그해 MVP급 성적을 올린 호세가 골든글러브조차 받지 못한 것은 이 사건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롯데는 뛰어난 실력 때문에 2006년 40대가 된 호세를 다시 불렀지만 SK 와이번스전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등 불혹의 나이에도 끝내 문제아 이미지를 씻지 못했다. 만약 호세가 좀 더 건실한 선수였다면 그가 2007년 5월 10일에 기록한 역대 최고형 홈런(만 42세 8일)은 훨씬 가치 있는 기록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감독 로이스터(2007~2010)] '8888577'의 암흑기를 끝낸 '검은 히딩크'

프로야구가 단 8개의 팀으로 민망한 양대리그를 운영했던 2000년, 롯데는 8개 구단 중 5위의 성적을 거두고도 매직리그 2위 팀의 자격으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그해를 마지막으로 프로야구의 양대리그 제도는 폐지됐고 단일리그로 돌아간 이후 롯데는 깊은 암흑기에 빠지고 만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롯데에는 4명의 감독이 거쳐 갔지만 성적은 '8888577'(7시즌간 기록한 순위를 이어쓴 것). 이는 훗날 LG 트윈스가 '6668587667'(2003~2012년)이라는 새 기록을 쓸 때까지 프로야구 역대 단일팀 최다 년도 포스트시즌 탈락 기록이었다.

FA를 한꺼번에 두 명이나 영입해도(2003년, 정수근-이상목) 손민한이 다승왕을 차지해도(2005년) 이대호가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해도(2006) 롯데의 암흑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백약이 무효해지자 롯데 구단은 2008 시즌을 앞두고 프로야구 최초로 외국인 감독 제리 로이스터를 영입했다.

하지만 로이스터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명장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메이저리그 감독 경력이라고는 53승 94패의 낯뜨거운 성적으로 해임당했던 밀워키 블루어스에서의 1년이 전부였다. 위기에 빠진 거인호를 구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온 새 선장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모두의 의심 속에 시즌을 맞이한 로이스터 감독은 4명의 감독이 7년 동안 해내지 못한 롯데의 가을야구에 대한 갈망을 단 한 시즌 만에 해결했다. 특히 로이스터 감독이 추구하던 두려움 없는 야구는 뒷심이 약하기로 유명했던 롯데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실제로 롯데는 로이스터 감독 부임 후 날씨가 더워지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타는 구단으로 변모했다.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연속으로 가을 잔치를 경험한 롯데는 로이스터 감독과의 재계약을 앞두고 마찰이 있었다. 롯데는 처음 로이스터 감독을 영입할 때처럼 2년 정도의 계약 기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로이스터 감독은 3년 이상, 최대 5년 정도의 다년 계약을 원했던 것이다.

결국 롯데는 로이스터 감독과 단 1년의 단기 재계약을 체결했고 롯데가 3년 연속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자 미련 없이 재계약을 포기했다. 로이스터와 결별한지 3년, 아직은 롯데의 선택이 맞았다고도 틀렸다고도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로이스터의 "노 피어(두려워하지 마라)" 정신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던 롯데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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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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