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 <직장의 신> 원작은 일본드라마 <파견의 품격>이다. '파견'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도 대학교 4학년 때 파견 일용직으로 하루를 일한 적이 있었다. 바로 드라마 보조출연자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중계 누리집에서 발견한 회사로 찾아갔더니 등록비 3만 원을 내면 열 번의 보조 출연 이후 돌려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등록비를 내고 보조출연자 회사에 등록했다. 이후로 다양한 출연 정보가 문자로 매일 날아왔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등록비를 받지 않는 회사가 더 많다고 한다).

나는 학교 수업이 없는 어느 토요일, 한 공중파 방송사의 일일극에 출연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결지인 여의도로 향했다. 한여름 오전 6시 반에 집합 후 버스에 실려 종일 끌려 다녔는데, 오후 6시쯤 끝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12시간 정도를 더위(푹푹 찌는 여름 날씨)와 지루함(필요한 장면에 투입되기를 무작정 기다리는 시간)에 시달렸다. 다음날 통장에 입금된 돈은 점심값을 포함하여 3만5000원이 조금 안됐다.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곧바로 또 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고, 학교 생활과 시간도 잘 안 맞아서 그 날 이후 또 한 적은 없었다.

그 여름날 나는, 함께 출연을 기다리는 이미 여러 번 보조 출연 경력이 있으신 분들에게 '이 바닥' 이야기를 듣게 됐다. 어떤 방송국 프로그램의 반장(각 드라마 보조출연자들을 인솔하는 관리자를 '반장'이라고 부른다)은 정말 쓰레기니 그 프로그램에는 출연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출연진 중에는 경력이 오래돼 가끔 대사를 맡는다는 분(이 분은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도, '몸빼 의상'을 몇 벌 갖고 다니시는 중년의 아주머니도, 뙤약볕에서 사극 촬영을 할 때 머리에 잔뜩 칠한 스프레이와 태양열이 화학 반응을 보여 두피가 벌겋게 익었다는 분도,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분도, 그냥 '보통 사람' 같은 남성 몇 분도 있었다. 이들 모두 하루 종일 출연할 때 나랑 비슷한 돈을 받거나 혹은 조금 더 받거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내 눈에는 검게 그을린 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촬영 스태프들도 들어왔다. 그중 스태프의 막내로 보이는 사람, 이름도 없이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가 쌍욕을 먹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야리야리한 그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시키는 모든 잡일을 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특히 길거리 차량을 통제하거나 촬영 장소를 지나가야 하는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그는 참 곤란해 보였다. 그의 양해에 신경질을 부리는, 혹은 아랑곳 하지 않는 차량이 촬영장을 지나가게 되면 그는 감독에게 쌍욕을 들어야 했는데 그 장면을 주시하고 있던 내게는 그 상황에서 제일 약자인 그에게 화풀이를 하는 감독도 시민도 너무 야속했다.

과연 그는 나보다 얼마나 많은 돈을 받을까, 나보다 더 받기는 하는걸까, 이렇게 먹고 살수는 있는 것일까, 그런데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가 수하들에 명령을 하는 자리에 올라선다면 그땐 과연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부릴까 하는 등의 의문도 생겼다.

배우들은 촬영 준비가 되면 와서 연기를 한 뒤 유유히 차를 타고 사라졌다. 20대에 꽤 알려진 한 여성 출연자를 봤는데 연예인 병에 걸린 건지, 아니면 그냥 수줍음이 많은 건지 사람들을 잘 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텔레비전에서 본 착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중년의 한 배우도 보조출연진과 눈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두 사람 다 그날만 그랬을 수도 있고, 내 입장에서만 바라본 그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편 본업이 가수인 한 신인 여배우는 앞의 두 배우와는 달리 이 사람 저 사람 인사를 하고 보조 출연진에도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경력 배우가 된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이 세상에 각시탈이 출현한다면 자유를 억압하는 무엇과, 어떻게 싸워 나갈 것인가.
▲ 드라마 <각시탈> 포스터 지금 이 세상에 각시탈이 출현한다면 자유를 억압하는 무엇과, 어떻게 싸워 나갈 것인가.
ⓒ KBS2

관련사진보기

그로부터 1년이 조금 모자란 세월이 흘렀다. 보조출연자를 여럿 두고 있는 태양기획이라는 회사 소속으로 인기리에 2012년 종영한 KBS <각시탈>에 출연한 보조출연자 한 명이 버스 전복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방송국도 파견 업체측도 피해자의 사망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도 없이 사고 책임과 보상을 미루고 있다는 보도를 접할 때 나는 '나쁜 놈들...'이라고는 생각했으나 별 달리 취할 행동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계약의 사회에서는, 인간이 빠진 법은 방송국과 회사에 빠져 나갈 구멍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대부분의 일은 합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이 세상에 각시탈이 출현한다면 자유를 억압하는 무엇과, 어떻게 싸워 나갈 것인가.

나는 이 일이 있고 3개월 정도 후인 그해 7월 말, 여의도에 있는 한 온라인종합경제일간지에서 연예부 기자 인턴을 시작했다.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내가 6개월간 일하고 그만 둔 그 언론사가 있던 건물에 태양기획도 함께 있었던 터라 매일 그 건물로 출입할 때마다 출입구에 있었던 시위용 플래카드를 접했고 오전부터 창밖으로 들려오는 시위 음악을 들었기 때문이다(9월 각시탈 마지막회 방송 전에 피해자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하는 화면을 '띡' 띄웠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언론사에서 기자 인턴으로 내 밥벌이를 여전히 하면서, 내 밥벌이가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좌절감과 괴리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이른 아침 시위용 플래카드를 지나 출입문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지금 하는 식의 일을 하면서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미혼 여성에게는 꽤 괜찮은 수입 벌고 있자니,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그만뒀다. '세상이 정말 모래 위에 쌓은 성을 계속 유지 보수하면서 살아가는구나... 그냥 겨우 겨우 버티고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나는 일다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거든 하고, 그렇지 못한 처지라면 커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가 좋아하고 또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 만드는 기술을 배워 볼 궁리도 하고 있었다.

여튼, 지금은 그 플래카드는 그 장소에서 사라졌단다. 힘찬 음악 소리도 없다. 피해자의 사망 303일 만에 KBS 별관에는 보조출연자 대기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2012년 12월에는 태양기획 이강용 대표가 피해자 유가족을 상대로 명예훼손 고소와 영업방해에 따른 손해배상을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또 1년이 지났다. 올해 4월의 어느 일요일. 형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 앞에 차 한 대가 있었는데 그 차량을 누군가가 통제하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으로 차량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은 스태프였다. 아 그런데... 앞차 아주머니가 그 스태프에게 신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바로 2년 전에 내가 촬영장에서 또 다른 드라마처럼 지켜 본 그 스태프가, 그 답답한 장면이 지금 눈 앞에 부활한 것이었다.

'아아... 화를 내려거든 차라리 감독에게 내시라. 그럴 것도 아니라면 그냥 기다리시라. 당신이 지금 화내고 있는 대상은 적절하지 않다. 이 상황에서 가장 약자에게, 당신이 다른 곳에서 쌓아둔 감정을 화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신, 여러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가? 당신도 그렇게 손해 끼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시청하며 울고, 웃고, 심지어 배움을 얻는 그 드라마들이 모두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모르는가? 혹시 이제 알았는데도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점을 용납할 수 없다면 이제부터는 소유한 텔레비전을 모두 부수고 아무 프로그램도 시청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통제가 풀려 이동을 하면서, 차안에 있는 나는 실컷 욕 먹은 그의 얼굴을 미안하게도 보았다. 참았던 분노가 자꾸만 노출되는 그의 얼굴을.

그러고 보니 파견직 일(보조출연자)을 딱 하루 경험했을 때 내가 본 두 장면은 오늘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고, 나도 또다시 그 장면을 '드라마처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 아닌 우리가 사는, 인간이 빠진 세상에 '나는 인간이었으면'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인간도 인격도 돌아오게 만들고 싶은데 말이다.

언제쯤이면 나는 현실을 드라마처럼 보고 있지 않고 살아 가게 될까.


태그:#직장의 신, #파견의 품격, #각시탈, #보조출연자, #아르바이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출판 프리랜서. 저널 <삼> 만드는 사람.

이 기자의 최신기사스릴러적 현실, 발밑 폭로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