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 상주하는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 분)는 무기밀거래 현장을 감시하던 중 소속, 국적, 이름 등 정보가 전혀 없고 지문마저 감지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요원, 일명 '고스트'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 정진수는 추적 끝에 그가 북한 정보기관에서 베를린에 파견한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기밀거래의 배후에는 표종성을 제거하고 베를린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또 다른 인물 동명수(류승범 분)에 의해 실행되고, 통역관으로 베를린에 온 표종성의 아내 연정희(전지현 분)는 동명수에 의해 반역자로 몰린다. 본인 역시 아내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표종성은 정진수와 동명수의 포위망이 좁혀들면서 양쪽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영화 <베를린>에서 표종성 역을 연기한 하정우

영화 <베를린>에서 표종성 역을 연기한 하정우 ⓒ 외유내강


"냉전시대가 끝나고 지금도 여전히 그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대의 비극이 남아 있는 그곳 베를린에서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그만큼 비밀스럽고 위험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표종성과 그를 쫓는 정진수, 동명수가 벌이는 추격전에서의 액션이 볼만하다.

자기만의 고유한 액션스타일을 집적해온 류승완 감독과 <부당거래>(2010), <짝패>(2006), <피도 눈물도 없이>(2002) 등에서 손발을 맞춰온 정두홍 무술감독이 보여주는, 공간마다의 특성이 고려된 액션의 합은 썩 괜찮은 편이다. 도입부의 무기밀거래현장 급습 장면과 특히 아파트 외벽 탈출 장면은 한국영화 액션에서의 신선한 시도라 할 만하며 전선에 얽혀 추락하는 설정에서의 과도한 회전이 아쉽긴 하지만 비교적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이루어냈다.

하정우의 연기는 역시 눈에 띄는데 균형있는 무게감으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반면 류승범은 다른 기준에서 도드라진다. 미워할 수 없는 비열함과 뺀질거림, 빼어난 양아치 연기의 자연스러움 등,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온 배우 류승범이 분한 인물 동명수 때문이다. 극 중에서 동명수라는 인물이 다소 과도하게 감정을 표출하고 의미에 비해 너무 많은 대사를 날리다 보니 극의 흐름에서 다소 엉뚱한 느낌을 준다. 동명수는 말 그대로 '냉혈한 포커페이스'가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장에 있던 그 빨갱이놈땜에 우리 요원 척추가..." 한석규가 분한 국정원 요원 정진수의 인물 설정은 어색하다. "나 팽시키는 것도 좋고, 니가 미국 공사하는 것도 좋은데, 현장에서 당한 우리 요원 평생 휠체어 타야 된댄다"고 쏘아붙이는 그는 동료들을 불편하게 하는 외곩수로 그려지는데 조직의 냉대를 한 몸에 떠안는 그가 쏟아내는 후배들을 챙기는 대사의 빈번함에 비해 당사자들인 그 후배들과의 교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추격과 총격을 거듭하는 정진수가 보여주는 액션과 어울리지 않게 잘 차려입은 그의 코트자락 만큼이나 정진수라는 인물은 그 설정이 어색하다. 표종성, 동명수의 점퍼차림과 대비되는 의도적 설정으로 보이나 사실감도 떨어져 보이고 불편해 보인다.

이렇듯 영화 <베를린>은 인물설정 등에서의 작지 않은 한계가, 제작비 100억원대의 규모와 비교적 잘 짜여진 액션, 류승완 감독 특유의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연출의 힘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인다.

어디서 본 듯한 <베를린>의 장면들

하지만 베를린의 가장 큰 성취인 액션도, 냉철하게 판단하면 10년된 '본' 시리즈의 그것을 넘지 못한다. <본 아이덴티티>(더그 리만 감독, 2002), <본 슈프리머시>(폴 그린그래스 감독, 2004), <본 얼티메이텀>(2007)으로 이어진 '본' 시리즈는,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본 레거시>(토니 길로이 감독, 2012)는 빼더라도 그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의 액션에 비해 한층 간결해진 동작을 주고 받는 액션의 합을 통해 영화적 사실감을 불어넣으며 잘 짜여진 핸드헬드 촬영을 통해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21세기 액션의 교범이라 할 만하다.

인파 속을 휘젓는 추격신, 건물외벽과 옥상을 타고 넘는 설정들, 지하철과 좁은 공간에서의 격투 등, 영화 <베를린> 장면들의 어디서 본 듯한 그 느낌들은 대부분 본 시리즈가 남긴 잔상임을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다. <베를린>의 정점이라 할 만한 갈대밭 장면조차 <본 아이덴티티>에서의 같은 설정이 떠오르는데, 사실 이 장면은 긴박감을 자아내는데 있어 10년 전 본의 그것에 비해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본 시리즈의 성공비결은 액션만이 아니었다. 본 시리즈가 도덕성 충만한 한 비밀요원의 반성문의 형식을 띈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찾기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기성 짙은 반성하는 척만 하는 가면에 불과했더라도, 현실세계에서 수십 년간 CIA가 자행했던 추악한 공작의 댓가로 너덜너덜해진 미 정보기관의 이미지 쇄신이라는 숨은 제작의도를 대중들에게 들키지 않고 전세계적 흥행을 일궈낼 수 있었다. (졸고, '제이슨 본의 비밀임무: C I A 꼬리자르기' 참고)

영화 <베를린>에서 진정 아쉬웠던 점은, 왜 본의 액션을 뛰어넘지 못했냐는 것이 아니다. 류승완 감독이 이루어낸 액션의 짜임새는 다소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분명 한국영화가 일군 의미있는 성취임에 분명하다. <베를린>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대치 중인 표종성과 정진수(한석규 분)

대치 중인 표종성과 정진수(한석규 분) ⓒ 외유내강


분단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소홀히 한 채, 한때 냉전의 상징이었던 도시 베를린을 배경으로, 낡은 냉전적 관점에서의 도식적인 남북 체제의 대결구도를 펼쳐 놓다보니 북한 체제에 대한 영화 속 묘사는 지극히 자극적이다. 영화에서 베를린 조직을 접수하려는 동명수의 배후에는 "김정남 편에 섰던 군부 실세 동중호"라는 인물이 그의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줄을 잘못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음모를 꾸민다는 설정이다.

또한 영화에서 북한은 전 지도자가 죽기 직전 40억 불의 비밀계좌를 남겼으며, 달러위조, 담배밀수를 일삼고, 또한 이를 덮으려 자국 통역관 연정희에게 현지 외무부 고위관리에 대한 접대를 지시하는, 한심한 나라로 그려진다. 정치적 부담을 고려했는지 영화의 말미에 비밀계좌는 전 지도자의 계좌가 아니라 동중호와 군관계자의 비밀계좌로 밝혀지는 설정을 쓰긴 했지만, 체제에 대한 비난은 노골적으로 쏟아진다.

본 시리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요인암살 등을 자행하는 자신이 몸담았던 비밀프로젝트에 대한 반성이라는 형식을 띄었다는데 있다. 물론 반성하는 척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 설정 덕에 본 시리즈는 더 이상 미국의 영웅이 지구를 위기에서 구하고 성조기를 나부끼는 설정으로는 흥행은커녕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렵게 된 21세기에, 반미여론이 비등해진 전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1조 원 넘는 천문학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할리우드영화가 자기안의 추악한 과거를 반성한다는 설정으로 말이다.

한국영화가 자기안의 추악한 과거를 반성하는 비밀요원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묘사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많은 영화가 그래왔듯 북한 비밀요원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여러모로 영화만들기는 쉬울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인공이 정진수가 아닌 북한 비밀요원 표종성이다 보니, 그가 몸담은 체제는 극중에서 더 비인간적이고 더 구시대적이어야 했던 것이다.

<베를린>은 결국 버림받은 표종성은 불쌍하고, 우리 체제는 어찌됐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을 은근히 과시한다. 유엔제재에 북한의 전면대결전 돌입 선언, 미국의 핵잠수함 투입 등 전쟁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영화의 설정은 진심으로 안타깝다. 또한 영화 속 주체들, 표종성과 정진수가 보여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버림받은 자들의 수동적, 조건반사적 몸부림은, 아무리 미약한 일대백의 싸움이라도 주체의 의지로 추악한 과거를 되돌리려던 본의 능동적 인물설정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체성 고민하는 국정원 요원이 주인공이었다면...

정권 임기 내내 민간인사찰에, 내한했던 유엔 의사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을 미행하다 발각돼 국제적 망신을 사고,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노트북을 훔쳐보다 호텔직원에게 걸려 경찰에 체포되고, 강남의 오피스텔과 미사리 카페촌에서 대북 심리전을 벌였다는 웃지 못할 대선개입까지 구시대적 악행을 21세기에도 그대로 보여주는 국정원에 대한 현실적 안타까움이 크다 보니, 영화 속 국정원 요원 한석규와 그 조직의 설정이 생뚱맞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흐리게 한다. 특히 국정원이 CIA 등의 방조 내지는 지원도 없이 상당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해 베를린 현지 정보기관과 치안체계를 뛰어넘어 독자적으로 도시를 휘젓고 대규모 총격전을 거듭 벌인다는 설정도 좀 어설퍼 보인다.

비슷한 사례 하나, 납치된 딸 찾으러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현지를 초토화시키고 다니는 장면이 거듭되는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테이큰>(피에르 모렐 감독, 2008)은, 괜찮은 액션 장면이 많았음에도(역시 '본' 시리즈의 아류처럼 보이는 액션이지만) 프랑스 정보기관과 치안력은 뭐하나 싶을 정도의 작위적 설정을 보여준 바 있다. 비교적 볼 만 했던 액션 외에 의미를 둘 만한 구석이 별 반 없었던 점이 영화 <베를린>과 <테이큰>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본 시리즈에서는 실제 방대한 전세계적 도감청체계와 해외조직망을 가동하고 있는 CIA의 공작이기에 영화적 사실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추악한 공작에 참가했던 정보기관 요원이 내부고발자로 몰려 조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뒤 도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본 시리즈의 설정을 한국적 상황에 제대로 차용했다면, 시대정신과 대중의 공감대를 제대로 반영한 훌륭한 작품으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정보기관의 치부를 까발리는 영화를 국내에서 제작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00억대 제작비를 쏟아부어 1000만 대박을 노리는, 껍데기만 대작인 영화보다는 1, 2백만이더라도 시대정신을 담는 작품성으로 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열광을 이끌어냈다면 감독으로서는 더 의미있는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부당거래>에서 보여줬던 류승완 감독의 배짱과 뚝심이 그리워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베를린 하정우 류승완 한석규 류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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