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포츠든 선수들의 첫 도전이 실패했을 때 새로운 기회의 장이 열려 있어야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한다. 이는 그동안 한국 스포츠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프로에 지명되지 않으면 선수의 길을 포기하고 살 길 찾아 떠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야구계에서 재도전이란 쉽지 않았다. 재도전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야구선수로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직업을 선택하곤 했다. 그러나 고양 원더스라는 독립 구단이 생긴 후 선수들은 희망을 본다고 말한다. 야구를 다시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기분이라고 선수들은 입을 모은다. 야구계의 풀뿌리 노릇을 하고 있는 고양 원더스에서 희망을 찾아봤다.

야구계에 새바람 불러온 고양원더스

 고양시에 있는 국가대표 야구 연습경기장에 주차된 고양원더스의 버스

고양시에 있는 국가대표 야구 연습경기장에 주차된 고양원더스의 버스 ⓒ 신형철


고양원더스는 한국야구 제1호 독립야구단이다. 독립야구단의 역할은 간단하다. 은퇴 후 다시 현역 선수에 도전하려는 노장 선수들, 프로구단에 선택 받지 못한 신인 선수들 등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려는 선수들에게 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고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일본·멕시코·미국 등 야구가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국가에서는 다수의 독립야구단이 존재한다. 독립야구단의 선수들은 자신의 직업을 잠시 접은 채 선수로의 꿈을 꾼다. 독립야구단의 존재는 2부 리그팀이 한 개 더 생긴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야구리그의 주 무대라고 할 수 있는 프로야구에서 밀려난 선수들에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는 반대로 프로야구의 안정감에 크게 기여한다. '이곳에서 쫒겨나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선수들에게 주는 안정감은 상당하다.

한편, 독립야구단은 주 리그의 훌륭한 시장이 되기도 한다. 프로야구 구단은 독립구단에서 실력이 향상된 선수들을 영입해 부족한 전력을 채운다. 독립야구단의 빠져 나간 선수들 자리는 고양 원더스에 입단을 원하는 새로운 선수들로 보충된다. 새로 보충된 선수들은 빠져 나간 선수들을 보며 희망을 키운다.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 고양 원더스 구단주 '허민'

야구인에게 최고의 명예인 일구상의 2012년 수상자는 위메이크 프라이스의 대표 허민이었다. 허민 대표는 과거 캔디바·던전앤파이터등 다수의 성공한 게임들을 제작해 게임 업계의 성공한 CEO가 된 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게임 업체를 매각하고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손에 넣은 허민 대표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전직 야구선수에게 야구를 배우며 게임 업체 대표로 있는 동안 채우지 못했던 음악과 야구에 대한 열정을 채웠다. 지난해 10월 방영된 < MBC 스페셜 - 김성근과 고양 원더스 >에 따르면 허민 대표가 자신의 인생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은 '명예보다는 배움에 대한 욕구'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란다.

허민 대표는 한국에 돌아온 후 최초의 독립구단인 고양 원더스를 창단했다. 창단 과정에서 보여준 추진력과 고양 원더스에 합류한 인물들은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두산베어스의 코치로 있던 김광수 코치, SK와이번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던 박상렬 코치를 영입했다. 마지막으로 SK와이번스에서 감독을 사퇴한 후 휴식중이던 '야인' 김성근 감독을 영입해 화려한 코칭스태프의 마침표를 찍었다.

팀을 선택하는 데 신중하기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을 영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 감독이 허민 구단주의 열정을 높게 샀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김 감독은 < MBC 스페셜 - 김성근과 고양 원더스 >과의 인터뷰를 통해 "진정 야구를 사랑하고 사심 없이 야구에 헌신하고 싶다는 허민 구단주의 말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허민 구단주는 매년 고양 원더스에 5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고 있다. 프로야구 2군팀의 평균 운영비를 웃도는 수치다. 하지만 허민 구단주는 < MBC 스페셜 - 김성근과 고양 원더스 >를 통해 "50억 원이 넘는 돈은 쏟아 부은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투자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시장가치 측면에서 보았을때 고양 원더스는 수익은 미미하고 지출은 방대한 수익구조에 낙제점을 줘야 하는 기업이다.

허민 구단주는 < MBC 스페셜 - 김성근과 고양 원더스 >에서 "고양 원더스에서 뛰면서 선수들이 얻는 희망이라는 결실은 이미 투자금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오갈 곳 없는 선수들을 받아 주는 고양원더스는 선수들이 프로구단으로 이적을 원할 시 이적료 없이 프로야구단으로 보내주는 조건이 계약서에 명시돼 있다. 창단 첫해인 지난해, 다섯 명의 선수가 프로야구팀에 스카우트 돼 이적했다. 고양 원더스에서는 5명의 이적한 선수에게 이적료를 청구하는 것 대신 이적 축하 격려금을 지급했다.

"프로 지명받지 못한 선수, 어둠의 길로 빠지기도"

 전직 대학 야구선수 김선광씨

전직 대학 야구선수 김선광씨 ⓒ 신형철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은 졸업 후 첫 번째 갈림길에 서요. 프로야구에 지명되느냐 대학에 진학하느냐를 놓고 선택하게 되죠. 사실 선택은 야구선수들이 아닌 프로야구 구단과 대학교 야구팀에서 하는 것이지만요.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 선수들은 대학 졸업 후 마지막 선택을 받게 됩니다. 프로야구팀의 지명이 졸업과 함께 기다리고 있죠.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아요. 보통 화류계나 폭력 조직에 들어가는 등 어둠의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죠."

지난 11일, 최근 전역한 '전 대학 야구선수' 김선광(26·2012년 12월 전역)씨는 대학팀 소속 야구선수가 졸업 후 지명을 받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야구선수 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스포츠 선수를 준비하는 많은 선수들이 겪는 비슷한 시련이에요.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은 정규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아요. 저 같은 경우는 선수 시절 재활했던 경험을 살려서 재활 트레이너로 가닥을 잡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많은 선수들이 방황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씨는 정규수업을 받지 않고 야구에만 매진해야 하는 현 학원 스포츠 체계에는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고등학교·대학교를 졸업한 후 야구에 미련이 남은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재도전의 활로가 막혀있는 점 또한 문제라고 말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 중에 야구에 미련이 남은 선수들이 많아요. 그 선수들에게 다시 도전할 창구가 마련되지 못한 점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제가 졸업 할 때만 해도 막막했어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10구단 체제도 아니었고, 고양 원더스라는 팀도 없었으니까요."

독립야구단인 고양 원더스가 창단된 지금 뜻하지 않게 야구를 그만 둔 선수들은 고양 원더스를 통해 마지막 도전을 한다고 김씨는 말한다. 고교시절 초고교급 야구선수로 각광 받으며 메이저리그 팀인 텍사스 레인저스로 입단했던 남윤성(27)씨도 그중 하나다.

"윤성이형은 고교시절 정말 신처럼 보였어요. 다른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선수였죠. 부상과 불운이 겹치면서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방출됐지만, 윤성이형 같은 선수가 이대로 선수생활을 그만 두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고양 원더스 덕분에 윤성이형이 다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김성근·허민의 야구사랑, 본받을 게 많다"

겨울방학동안 투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여념이 없는 진흥고 투수 박진두(18)씨. 지난 12일 그는 기자와의 통화를 통해 "류현진·최정등 본 받을 점이 많은 선배 선수들도 많지만 고양 원더스의 감독 김성근과 구단주 허민은 야구 외적으로도 본 받을 점이 많은 인생의 멘토"라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님과 허민 구단주님의 야구사랑은 정말 본 받을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김 감독님처럼 야구라는 한 분야에 대해 그 만큼 애정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보면 아직 야구에 대한 내 생각이 얕다는 느낌도 들고요. 야구가 주 직업이 아님에도 자신의 사비를 털어 열정을 불태우는 허민 구단주님은 김 감독님과는 또 다른 자극을 주시죠.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바로 다가간다는 점은 허 구단주님이 주시는 교훈이에요. 두 분 모두 비슷한 성향은 아니시지만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열정 하나 만큼은 같은 것 같아요."

박진두씨는 김 감독·허 구단주 두 명을 보면서 자신도 야구선수가 된 후 야구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재능을 기부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두 분을 보면서 지금 내가 받은 혜택과 고마움 이상으로 야구계에 기부하고 싶은 생각을 해요. 야구선수로서 제가 성공할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서 하고 있는 이 야구라는 스포츠에 공헌을 하고 싶어요. 이 스포츠가 갖고 있는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돕는 것이죠."

고양 원더스 "우리의 목표는 선수들의 희망이 되는 것"

 고양시에 있는 국가대표 야구 연습경기장

고양시에 있는 국가대표 야구 연습경기장 ⓒ 신형철


지난 13일, 연일 몰아치는 한파로 밖에 돌아다니기도 힘든 날씨지만 고양 원더스 선수들과 프론트는 내년 시즌을 위한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고양 원더스의 홈 구장으로 사용 중인 고양시 국가대표 야구 연습경기장 근처에서 만난 고양원더스의 한 선수는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다음 시즌 한층 발전할 자신을 생각하며 훈련 중이라고 말했다.

"일본 전지 훈련에 모든 선수들이 참가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겨울에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저를 도와주시는 코치님들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큰 변화에요. 내년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죠."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고양원더스 프론트도 다음 시즌 준비로 바쁘다. 일본에서 전지훈련 중인 선수군과 국내에서 훈련중인 잔류군을 위해 준비할 게 많기 때문이다. 올해 봄에 치러질 국내선수 트라이 아웃과 해외선수 트라이 아웃도 프론트가 바쁜 이유 중 하나.

지난 11일 고양 원더스 측은 "최근 증가한 외국인 선수의 입단 요청으로 봄에 치러질 트라이 아웃에 신경을 더 쓰고 있다"며 "한국 선수든 외국인 선수든 최대한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선발하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를 믿고 훈련 중인 선수들을 보면, 비시즌 중이지만 업무를 게을리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선수들이 우리를 의지하며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저희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도 더 생기죠. 고양원더스가 야구계에 주는 변화는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원더스에 이어 제2, 제3의 독립구단이 만들어지는 게 고양 원더스의 입장이에요."

아마 야구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고양원더스가 만들어 낸 재도전의 희망은 야구계를 넘어서 국내 전반 체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1980년대 부터 이어져 온 스포츠 전반의 엘리트 주의는 낙오자에 대해 가혹했기 때문이다. 최근 다른 스포츠 종목도 체계적인 하부리그를 만드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즌 고양 원더스의 행보가 주목 받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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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원더스 김성근 독립구단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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