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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엄청 마셨다."

얼마 전 중등임용1차 시험을 본 친구에게 시험을 잘 봤는지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예전부터 "임용고시는 길이 아니다, 플랜B를 생각 중이다"라고 말하던 친구였지만, 막상 "망했다"는 말을 들으니 안타까웠다. 친구는 그 후로도 한참 '플랜B'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 읊었고,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함께 한숨을 쉬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이름의 백수들이라면 누구나 불안과 초조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 당장 나 자신도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준비할 건 너무 많고 능력은 부족하다. '걱정할 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자'고 생각하지만 그런 다짐도 잠시, 금세 불안이 엄습한다.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맞나?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소설가 박민규의 첫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다시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낙오자들에게 띄우는 연가'를 자처하는 책을 읽으며 지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싶었다. 기대했던 만큼 난 위로받았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평범한 야구 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책표지.
ⓒ 한겨레출판
야구를 좋아하는 이라면 1982년을 프로야구 원년으로 기억할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를 비롯한 6개의 구단이 창단되며 프로야구가 출범한 그 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 무렵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이기만 하면 야구 이야기를 하던 시절.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주인공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조성훈을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함께 고향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들의 열렬한 응원에도 삼미 슈퍼스타즈는 만년 꼴찌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기별 최저 승률(0.125), 한 시즌 특정 팀 상대 전패, 시즌 팀 최다 연패(18연패) 등의 대기록을 남기고, 치지 않고 달리지 않는 '노히트 노런'으로 정점을 찍는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팬클럽을 떠나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해설자들에게까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이런 팀이 냉혹한 프로 야구의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조롱과 멸시만 받다 1985년 6월 2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삼미의 팬이었던 주인공은 이 과정을 보면서 '프로의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26p

삼미의 몰락을 지켜본 주인공은 삼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한다. 가끔 힘들 때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해의 여름을 기억하는 일은 체스판의 흑과 백을 구분하는 일만큼이나 선명하고 간편하다. 실제로 나는 공부를 하거나 쉬거나 둘 중의 한 가지만 했으니까. 가끔 힘이 들 때면, 수돗가의 미지근한 물에 얼굴을 적시며 삼미 슈퍼스타즈를 생각하고는 했다. 그게 다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33p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는 일류대에 입학하고, 어려움 없이 국내 최대의 대기업에 입사한다. 삼미와는 달리 프로의 세계에 무사히 안착한 것이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 창단식 삼미 슈퍼스타즈는 창단 이전부터 전문가들이 만장일치로 꼽는 꼴찌 후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예정되어있던 길을 고분고분 걷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998년 한국. 대기업에 들어간 주인공은 이혼까지 당하며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대규모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그는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탈락한다. 마치 삼미처럼···.

야구로 치자면, 1998년은 데드볼의 시기였다. 세상의 곳곳에서 데드볼을 맞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무렵-나는 이혼을 했고, 얼마 후 실직을 했다. 죽어도, 좋았고, 죽는 줄, 알았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15p

실의에 빠진 주인공 앞에 어린 시절 함께 삼미의 어린이 팬클럽이었던 친구 조성훈이 나타난다. 조성훈은 프로야구가 사람들을 냉정한 프로의 세계로 끌어들였으며,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런 흐름에 거역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라고 웅변한다.

요는 말이지. 어쩌다 프로가 되었나, 라는 것이야. 생각해봐, 우리는 원래 프로가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두 프로가 된 거야. 그 과정을 생각해보란 말이야. 물론 프로야구가 세상을 바꾸었단 얘기가 아냐. 요는, 프로야구를 통해 우리가 분명 속았다는 것이지.(중략)삼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리고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표해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이제 세상을 박해하는 것은 총과 칼이 아니야. 바로 프로지!-<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42-243p

마침내 의기투합한 둘은 삼미의 야구를 재현하기 위해 팬클럽을 만든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삼미의 야구를 추구하면서 주인공은 점차 낙천적으로 변한다. "이곳으로 빠지는 것이 삼미의 철학에 절대 부합하는 일"이라며 삼천포로 떠난 일주일의 전지훈련 이야기에서 그는 생각한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삼천포에서의 일주일은 언제나 생생하다. 남일대 해수욕장(국내 최소 규모)에서 우리는 캐치볼과 러닝을 하고, 밤이면 맥주를 마시며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합 비디오를 보거나, 웃고 떠들거나, 자거나 했다. 언제나 새 치약을 꾹 눌렀을 때와 같은 기분의 시간이 우리의 주변에 흘러넘쳤으므로, 우리의 시간은 그런 민트향이라든지, 박하향이라든지, 죽염 성분이 가미된 솔잎향으로 가득했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277p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삶이 너무나 아름답다"

▲ 삼미 슈퍼스타즈 마스코트 프로원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동물이 아닌 마스코트를 가진 팀이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안타깝게도 이 서평에 삼미의 야구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유쾌한 것인지를 담아낼 재간은 없다. 직접 읽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오랜만에 이 책을 읽으며 삼미의 야구에 비추어 내 인생을 돌아봤다.

돌이켜 보면 '새 치약을 꾹 눌렀을 때와 같은 기분의 시간'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 그리고 우리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어 필요 이상으로 빠른 공을 던지고,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빨리 취업해야 한다는, 남에게 무시당하기 싫으면 좋은 직장 얻으라는 주변의 말들에 떠밀려 억지로 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달리는 세계에 과연 인생이 존재할까.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직 어떤 야구를 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야구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요 이상으로 빠른 공을 던지거나 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그게 가장 어려운 야구일지라도 나만의 야구를 하고 싶다. 가급적 즐겁게 살고 싶다. "그저 달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의 삶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니까.  

따라 뛰지 않는 것. 속지 않는 것. 찬찬히 들여다보고, 행동하는 것. 피곤하게 살기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속지 않고 즐겁게 사는 일만이, 우리의 관건이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302p~303p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한겨레출판(2017)


태그:#삼미 슈퍼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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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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