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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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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아들과 4살 딸 아이가 요즘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함께 한글을 배웁니다. 아들은 매번 글자를 읽고 싶을 때마다 남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이제는 싫은가 봅니다. 딸아이는 글자를 보고 똑같이 그리는 게 재미있나 봅니다. 깍둑 공책을 한 권씩 사서 한글 자음을 써 주고 한 줄씩 똑같이 써 보라고 하고 읽어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두 녀석이 머리 맞대고 앉아서 낑낑대며 글자를 그리면서 하는 말이 자꾸 마음에 와서 부딪힙니다.

자음 하나를 순서에 맞게 잘 쓰고 나면 이렇게 말하죠.

"엄마. 나 성공했어!"

옆에서 내가 보고 있다가 말합니다.

"준열아, 순서가 그렇게가 아니고... 엄마가 다시 써 줄게. 이런 순서로 쓰는 거야."

이렇게 다시 고쳐주면, 아이는 자기가 쓴 글씨 위에 연필로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나서 한숨을 쉬며 "아이구. 실패했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두 아이는 계속 묻습니다.

"엄마. 이렇게 쓰는거 맞아? 나 잘 썼어?"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응. 그렇게 쓰는거야. 이 글자 잘 썼네" 하면서 글자 위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아이는 "엄마, 잘 쓴 글자는 위에다 다 동그라미 쳐 줘"라고 말합니다. 이제 혼자 써도 되겠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볼 일을 보고 있더니, 동생이 오빠한테 이런 말을 하네요.

"오빠. 나 벌써 다 썼다. 오빠보다 빠르다."

나에게 공책을 들고와 딸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나 통과야?"

아이들이 글자를 배우며 하는 말들을 떠올려봅니다.

성공·실패... 이런 단어가 아이들의 삶 속에 있다니

'성공!' '실패!' '빨리!' '통과!' 왜 이런 단어가 아이들 삶 속에 벌써 들어와 있는 걸까요? 6살, 4살 난 아이들은 자음 하나를 제대로 쓰면 성공한 삶이고, 순서를 틀리게 쓰면 실패한 삶인가요? 글자 하나를 남보다 빨리 쓰지 않으면 큰일나나요? 누군가 "잘썼어! 통과!"라고 해 줘야 삶이 다음으로 이어지나요?

학교라는 곳이,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매 순간을 성공과 실패로 가르고 경쟁과 평가로 경주마처럼 달리게 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어떻게! 벌써! 귀신처럼 알아버렸을까요?

정신이 바짝 듭니다. 아이들이 아장아장 걷고 웅얼웅얼 말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우리 아이를 남들보다 앞서 배우게 해서 뛰어나지는 못하더라도 뒤처지진 않게 해야 한다며 시작하는 여러 교육을 나는 그간 거부해왔습니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앉아있으면서 방문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왜 아이를 그냥 방치하세요, 그러시면 안 돼요"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집도 나들이, 생태수업, 텃밭수업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곳을 찾아 보냈습니다. 남들이 왜 애들 글자 안 가르치냐고 해도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늘 "내가 기쁘고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해, 내가 남보다 잘 하냐 안 하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키웠는데... 이게 뭔 일입니까. 아이들은 한글을 배우며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를 쓰고 있네요.

한글을 가르치며 내가 아이들에게 한 말 또는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준 태도를 다시 꼼꼼이 들여다 봅니다. 세종대왕이 문자가 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 빠르면 반 나절 오래 걸려도 며칠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한글을 가르치며 나 역시 그동안 많이 기다려 줬으니 우리 아들은 한 나절이면 한글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그치고 서두르며 가르친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내가 칭찬하면서 했던 말이 아이들에게는 순간 순간 성적표가 돼 두 녀석 사이에 경쟁을 부추긴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아이가 실수를 했을 때, 여유롭게 충분히 기다려줬는지도 돌아봅니다. 나는 머릿 속으로 열심히 거부하는 경쟁과 평가에 갖힌 삶. 그러나 내 몸과 마음에는 여전히 깊게 배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쓰지 않았나 다시 돌아봅니다.


태그:#한글 배우기, #한글 가르치기, #성공과 실패,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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