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스페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스틸컷

드라마스페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스틸컷 ⓒ KBS


암은 인간과 오랜 세월 함께 해왔다. 하지만 요즘처럼 암이라는 말이 시중에 범람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을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잠이 들 때까지 하루 동안 듣게 되는 '암'이라는 말의 횟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개인적으로 이를 헤아려본 적도 없지만 관련한 통계를 본 적도, 이런 흐름이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연구 결과가 있다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이쯤 되면 웬만한 한국인에게 암이라는 병은 일상화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중들의 눈높이나 일상적인 관심사에 민감한 TV 드라마 역시 암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지난 26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내가 가장 예뻤을 때>(극본 이현주, 연출 백상훈) 역시 암을 중심 소재로 한 드라마다. 암이 사랑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하는지를 이야기했다.

10년 전 암 판정을 받았지만 헌신적인 남편 의수(송영규 분)와 함께 투병하며 살아온 신애(전익령 분). 어느 무더운 여름 또다시 재발한 암 앞에서 신애는 치료를 받는 대신 여행을 다니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는 끝내 남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입원하던 날, 신애는 병실에서 다른 환자의 보호자로 와 있던 청년 정혁(이종석 분)을 만났다. 그는 남편과 달리 신애를 환자가 아닌 이성으로 대하며 거침없이 구애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성에 대한 설렘과 남편을 향한 의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신애. 하지만 심장을 제외하고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그녀는 이성보다 원초적인 본능을 따르기로 한다.

암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많다. <겨울 안개>(1989)와 <장밋빛 인생>(2005)은 암에 걸린 주부가 설상가상 남편의 외도라는 상황까지 맞으면서 고통을 겪는 비극적인 이야기였고, <여인의 향기>(2011)는 죽음을 앞에 둔 30대 독신녀가 이른바 '버킷 리스트'를 실행에 옮기다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들을 보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좋은 나라'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으면 됐다.

하지만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앞서 예로 든 드라마들과 결을 달리한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의 선택과 행로를 지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시청자를 난감한 상황에 빠뜨린다.

ⓒ KBS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애는 10년 동안 자신에게 헌신한 남편을 배신한다. 인간으로서 도리를 저버린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나빴을지언정,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과정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정혁을 만나기 전까지 신애는 남편 의수와의 관계에서 아내로서, 한 여자로서 자존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의수가 그녀를 온실의 화초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의수가 신애의 치료나 자신의 진로 등 온갖 대소사와 관련하여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고 감당하는 사이 신애는 '구경꾼'이 되어 자신의 무력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의수가 남편으로서 더 이상 잘할 수 없다는 인정 때문이기도 하고, 반면 자신은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다는 자괴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랬던 그녀는 죽음 앞에서 자신을 '환자'가 아닌 '여자'로 대하는 정혁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여기서 잠깐. 이런 그녀의 '불륜'을 비난하기에 앞서 다음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의수 옆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온 그녀는 과연 행복했을까? 인형이 아닌 한 여자이자 아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자존감을 느낄 수 없었던 삶이 온전히 행복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의수는? 그는 과연 신애를 여전히 사랑할까?

의수는 기본적으로 착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기계를 주렁주렁 매단 채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아내에게 그는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그래서 그래"라며 치료를 받자고 설득하는 남편이다.

의수는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신애가 바라는 것이 뭔지를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삼 년 구병에 불효 난다'는 옛말처럼 그가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사실 남녀 관계로서 두 사람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내 꿈이고 내 드라마야"라고 말하는 의수에게 "난 당신 짐이고 당신 현실이야. 사는 내내 미안했다고. 이제 그만 미안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신애의 '항변'이 상대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다.

여기서 누군가는 사랑이 없으면 정으로라도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신애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욕망의 우선순위 앞에서 그것이 무엇이 됐든 한 가지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애가 불륜녀에다 배은망덕한 여자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녀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적절한 행동으로 드러난 그녀의 죄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을 환자가 아닌 여자로서 사랑해주는 남자의 구애을 받아들인 그 선택까지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하다.

자신의 선택을 두고 "미친 년이든 죽일 년이든 그게 더 사는 거 같으니까. 곧 죽을 년보다는"이라고 절규하거나, "후횐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신애에게 그 선택이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 말이다.

ⓒ KBS


신애 역을 맡은 전익령은 만만치 않은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전익령은 암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마치 생존 말고는 다른 어떤 욕망도 허락되지 않은 사람처럼 무력하게 살다가, 자신의 사랑을 갈구하는 청년의 섬세한 손길에 설레고, 억눌러왔던 감정과 본능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인정하면서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찾는 신애의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오버하지 않고 잔잔한 내면 연기로 풀어냈다.

전익령은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서기를 결심한 신애의 얼굴을 보여준다. 여름 정취 물씬한 들길을 걷는 그녀는 슬픈 눈을 하고 있지만, 후회의 기색은 없어 보인다.

이 장면은 그녀가 진정 바랐던 것이 단순한 연애 감정이나 사랑이 아닌, 자신을 곧 죽을 환자로 규정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벗어나는 것, 즉 자존감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따라서 신애의 마지막 대사에 나오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란 자유롭고 자존감 충만한 일상의 아름다운 한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이 드라마의 메시지는 극 중반 나오는 정혁과 신애의 대화에 직접적으로 담겨 있다.

"아픈 여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예요?" "안 아픈 여자처럼요."

관계의 양상이 달라지면 사랑도 변하는 법이다. 신애가 암과 함께하며 얻었을 깨달음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때 전익령 이종석 송영규 단막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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