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는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창입니다. 오마이스타와 함께 대중문화를 비틀어도 보고, 정색해도 보려 합니다. '꼰대'는 되지 말자는 신념 하나로 넘어지면 또 '하악하악' 일어나서, 영화를 보고, 쓰며, TV도 보고, 음악도 듣고, 독립영화도 애호하고, 술도 애정하며, 사람도 사랑합니다. [편집자말]
24살 임메아리(윤진이)가 펑펑 울었다. 오빠의 친구에다 16살 차이나 나는 최윤(김민종)과의 사랑이 암초에 부딪쳐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박민숙(김정난)도 울었다. 바람둥이 남편 이정록(이종혁)의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의심이 극에 달한 스스로가 처연해서다.

종영까지 단 2회를 남긴 <신사의 품격>이 자체 최고 시청률(24.4%,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둘 채비를 하고 있다. 장동건의 전격 출연과 <파리의 연인>이래 최고의 콤비로 손꼽히며 작년 <시크릿 가든> 신드롬을 창조했던 신우철 PD, 김은숙 작가 콤비의 귀환으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작품치곤, 조금은 아쉬운 수치다.  

후반부로 치달으며 극의 중심인 김도진(장동건)․서이수(김하늘) 커플은 입장을 바꾼 짝사랑부터 도진의 아들 콜린의 등장까지 연애의 고비를 모두 넘기고 목하 연애 중이고, 임태산(김수로)-홍세라(윤세아) 커플 역시 결혼 문제는 일단 제쳐 둔 채로 사랑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앞선 장면에서 보듯, 17․18회의 중심이나 심리적 방점은 확실히 눈물을 책임진 최윤-임메아리, 박민숙-이정록 커플에 찍혀있었다.

그러니까 이 후반부야 말로 '로맨틱코미디 비틀기'에 전력을 쏟아 온 김은숙 작가가 도전한 <신사의 품격>의 형식적인 차별점이 도드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성판 <섹스 앤 더 시티>를 표방한 <신사의 품격>. 그러나 닮아 있는 것은 중심에 내세운 주인공(여성이 아닌 남성)의 숫자가 넷이라는 점에서만 닮아 있다. 

 <신사의 품격>의 네 주인공 김수로, 장동건, 김민종, 이종혁

<신사의 품격>의 네 주인공 김수로, 장동건, 김민종, 이종혁 ⓒ SBS


여전히 진화 중인 '스타' 김은숙 작가

부연하자면, <신사의 품격>은 삼각관계 혹은 4명의 남녀 주인공을 내세우는데 주력했던 김은숙 작가가 중심인물의 숫자를 4각 관계를 품은 8명으로 확장시켰다는데 외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임메아리나 박민숙의 눈물에까지 감정 이입의 여지를 주며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낸 김은숙 작가는 분명 장동건-김하늘 커플 외 주변 캐릭터들 역시 설득력 있게 그렸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인물 수의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김은숙 작가의 전작들을 살펴본다면 이러한 점진적인 진화는 분명 주목할 만하다.

데뷔작인 <태양의 남쪽>을 논외로 한다면, 김은숙 작가는 줄곧 로맨틱 코미디의 자장 안에서 삼각관계로 시작해 4인 커플을 그리는데 까지 나아갔다. 전형적인 재벌남과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그린 <파리의 연인>은 물론이요, 대통령의 딸을 등장시킨 <프라하의 연인>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김은숙 작가가 새로운 혹은 차별화된 시도를 하는 작품에서는 꼭 시청률 싸움에서 고전을 했고, 이후 차기작에서 친숙하고 대중친화적인 작품으로 되돌아간 후 다시금 주가를 올리는 방식으로 진화해 나아갔다는 점이다. 

김은숙 작가는 영화 <약속>의 인물들을 빌려왔던 동명의 작품이 주춤했을 때, 여배우와 매니저, PD와 드라마 작가 캐릭터들이 엇갈리는 4각 관계의 배경으로 방송가의 속내를 그렸던 <온에어>로 전작의 부진을 씻었다.

이후 평범한 여성 9급 공무원이 시의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시티홀> 역시 김은숙 작가 최초로 정치이야기를 도입한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의도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김은숙 작가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남녀 주인공의 영혼이 바뀌는 판타지란 당의정까지 입힌 <시크릿 가든>으로 최고 시청률 35.2%를 기록, 스타작가의 명성을 확인했다.

로맨틱 코미디 혹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어떻게 변주하고 비틀 것이냐. 김은숙 작가는 자신이 매달려온 이 화두에 대해 작년 2월 발간된 <월간 방송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상투적인 것들이 나에겐 다 비트는 대미가 있는 것들로 쓰인다. 상투적인 것에서 살짝만 더 가면 재미있는 지점이 나온다"며 "또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계속 쓸 자신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장동건급 외모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신데렐라'의 성공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신사의 품격>은 분명 신데렐라 스토리를 탈피한 로맨스물이다. 대신 김은숙 작가는 중심인물을 8명까지 확장하는 녹록치 않은 길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개성있(어 보이)는 4명의 남성 캐릭터는 물론이요, 임메아리와 박민숙과 같은 크지 않은 캐릭터들까지도 감정을 이입한 여지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는 여유야말로 작가의 필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의 품격>이 표방한 주제는 <섹스 앤 더 시티>와는 대척점에 선 41살 동갑내기 남성들의 세계와 사랑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신사의 품격>이 무려 장동건이 브라운관에 컴백했음에도 <시크릿 가든>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는 형식보단 이 주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서울 논현동의 한 예식장에서 열린 SBS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 제작발표회에서 김은숙 작가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논현동의 한 예식장에서 열린 SBS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 제작발표회에서 김은숙 작가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정민


취향과 향수로 완성된 41살 피터팬들

잘나가는 건축가, 변호사, 그리고 빌딩을 몇 채나 소유한 부인 덕에 먹고 사는 커피숍과 바의 주인. 일에도 성공했고, 남부러울 것 없는 이 남자들에게 유일한 고민은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 생활이다.

<신사의 품격>은 이들이 여타 다른 중년들과 다를 것 없는 41살이라 강변한다. 매회 오프닝에 등장하는 짧은 에피소드들은 그러한 의도를 정확히 반영한다. 이들은 주윤발과 홍콩영화 등 1980년대 대중문화를 잊지 못하고, PC 방에서는 스타크래프트에 빠져있으며, 당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고 슬리퍼를 신는다. 이들의 놀이와 취향은,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니까 해묵은 토픽.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 차에 관계없이 대중들에게 모두 동일하게 수용되는 대중문화의 획일적인 작동방식 말이다. 또 다른 대중문화의 작가들은 '추억'이란 코드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신사의 품격>의 전략도 다르지 않다. 이 남자들은 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바로 그 감성에서 전혀 때가 묻지 않고 그대로 박제되어 버린 일종의 '피터팬' 같아 보일 지경이다. 도진이 23살 때 태어난 아들 콜린에게 대하는 행동은 중년이란 나이에 대한 알라비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짧게 책임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하다 서이수와의 달달한 연애로 직진하는 '쿨한' 혹은 여전히 나이 먹고 싶지 않는 정서 말이다(여기에 더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나이들의 우정'이다).

사실 이건 도진 캐릭터의 성격으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신사의 품격>의 핵심은 박민숙의 대사 속에 숨어있다. 사고를 친 서이수의 고등학생 제자를 구원해주며 "방금 네가 본 게 앞으로 네가 나올 세상이고, 돈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할 이유야"라는 대사 속에 숨겨진 진실(하지만 박민숙이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에 대해선 알 도리가 없다). 과연 문제아인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이 고등학생에게 훗날 도진과 친구들과 같은 '품격'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신사의 품격>의 중심, 장동건

<신사의 품격>의 중심, 장동건 ⓒ 화앤담픽쳐스


김은숙 작가님, '신데렐라 스토리'로 복귀하는 걸로

<섹스 앤 더 시티>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화려한 뉴욕커들의 사생활 속에 담긴 현실적 상황과 대사 그리고 보편적인 감수성이었다. <신사의 품격>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들이 네 남자가 짖고 까부는 이 오프닝 시퀀스들인 이유도 여기 있다.

장르적인 로맨스에 갇힌 인물들에게 현실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90년대 하이틴 드라마의 스타들인 장동건․김민종이 연기한 캐릭터들이 나이를 먹어 보이지 않는 건 비단 외모 뿐만이 아니다. 김도진은 "사랑이 왜 이렇게 전쟁같냐"고 읊조린다. 하지만 제작진도, 시청자도 41살 김도진과 친구들의 로맨스가 그 어떤 대한민국의 동년배들의 현실과 심지어 여타 드라마보다 달콤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을까. 

'부자의 품격'을 기본 전제로 깔아 놓은 <신사의 품격>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르를 비틀고 '신데렐라 스토리'란 전형성을 영민하게 이용한 <시크릿 가든>과 비교해 절반의 성공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반짝반짝한) 캐릭터의 성격과 전형적인 로맨스와 멜로의 설정만으로 시청률 30%가 넘는 폭넓은 공감대를 얻어내기는 버거워 보이니까.

그러하여 김은숙 작가님, 차기작은 다시 '신데렐라 스토리'로 복귀하는 걸로.

신사의 품격 김은숙 작가 장동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