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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주민들의 삶과 함께 흐르는 풋풋한 개천, 홍제천
 동네 주민들의 삶과 함께 흐르는 풋풋한 개천, 홍제천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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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에 요즘 내리는 장맛비는 다분히 소나기 또는 국지성 호우의 성격을 띈다. 예년처럼 며칠씩 연이어 비가 내리질 않고 천둥, 번개까지 동반한 굵은 장대비가 밤새 퍼붓다가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겋게 갠 하늘에 뭉게구름들이 유유히 떠다닌다.

덕분에 물이 불어나고 깨끗해진 동네 개천엔 모래톱까지 생겨나 개천의 원래 모습을 잠시나마 회복하기도 한다. 홍제천은 이웃 동네에 있는 개천이자 한강의 동생 지천이지만 굳이 찾아 가지 않는 개천이었다. 우리 동네의 불광천처럼 도심형 개천으로 개발을 하여 비슷비슷한 풍경이 별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어디나 비슷비슷한 신도시처럼 말이다.

그런 홍제천에 원래 이름인 '모래내'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과 역사의 유적들, 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 비밀의 계곡까지 이어져 있다는 소식에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인 날을 틈타 길을 나섰다. 길의 들머리는 개천과 이름도 비슷한 홍제역(수도권 전철 3호선).

천변길에서 만난 소박한 삶, 풋풋한 풍경     

언제가도 동네 주민들로 북적이는 인왕시장
 언제가도 동네 주민들로 북적이는 인왕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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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역은 전철역이지만 기차역 같은 기분이 드는 곳이다. 역 1번 출구 밖으로 나오면 갑자기 서울 도심 풍경이 어디 작은 소도시의 읍내 시장터 같은 풍경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가게, 노점, 리어카, 지나가는 주민들로 좁은 보행로가 꽉 찼다. 이런 북적북적한 분위기의 모체는 바로 '인왕시장'으로 가까이에 인왕산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시장이다.     

오래된 헌책방 '대양서점'과 자전거포도 아닌 '자전차점'이 있는가 하면 맥도널드와 편의점들도 시장 주변에 같이 있어 도시의 다채로운 모습을 품고 있다. 인왕시장 입구를 지나 효제약국 앞에 서면 횡단보도 건너에 홍제교가 보이고 그 밑으로 작은 산책로와 함께 천변길이 나타난다.   

홍제천은 종로구 구기동, 평창동에서 발원하여 홍제동, 남가좌동,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정겨운 우리말 이름 '모래내'는 세검정의 맑은 냇물이 흐르면서 모래가 많아지고 물이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비가 내리자 '모래내'의 모습으로 돌아간 홍제천
 비가 내리자 '모래내'의 모습으로 돌아간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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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은 두 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한강에서 마포구 성산동을 지나 서대문 구청까지의 도심형 개발 하천으로 양 편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는 물론 큰 인공폭포까지 갖춰져 있다. 홍제교부터 걷는 이 천변길은 말하자면 구(舊)홍제천이자 개천의 상류지역이다. 한쪽 편에 산책로만 있을 뿐 흔한 자전거도로도 없고 개천가 양편에 작고 낮은 집들이 올망졸망 들어서 있는 옛날 개천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천변길을 걷다가 트럭을 타고 온 생선장수 아저씨의 마이크 소리가 다 들려올 정도니.

하지만 그러기에 구(舊)홍제천의 천변길엔 사람들의 삶이 가까이 보이고, 원래 우리말 이름인 '모래내'에 가까운 정겨운 풍경들이 나타난다. 비가 내린 후 찾아간 게 잘한 것이 빗물이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흐르는 사천(砂川)의 모습을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도 된다. 모래내로 돌아간 개천이 누구보다 반가운건 역시 동네 주민들. 아이들이 맨 먼저 개천가로 내려가 모래톱에서 발을 담그며 오리들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조촐한 가게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홍제천가의 작은 시장
 조촐한 가게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홍제천가의 작은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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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걷다보니 작은 포방교 다리가 보이고 이름도 특이한 '포방터 시장'이 나타나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노점들과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작은 시장에 들어선 것은 순전히 그 이름 때문. 과일가게 아주머니도 문방구 아저씨도 잘 모르겠다는 '포방터 시장'의 이름 유래를 찾아 시장통 골목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마침내 칠기 그릇을 파는 가게 아저씨를 만나 알게 된 것은 가까이에 군의 포부대가 있어서 란다.  왠 군부대인가 했더니 홍제천의 상류지역은 옛부터 수도 방위의 중요한 지역으로 그런 사실은 얼마 후 만나는 홍지문과 탕춘대성에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냇가에서 만나는 역사의 유적들

홍제천 냇가를 지긋이 바라보며 명상중인 홍은동 보도각 백불(白佛)
 홍제천 냇가를 지긋이 바라보며 명상중인 홍은동 보도각 백불(白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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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가 절벽 밑으로 작은 절과 웬 누각이 눈길을 끈다. 옥천암 이라는 절인데 누각 안에 앉아 있는 건 놀랍게도 하얀 옷을 입은 부처상이다. 정식명칭은 홍은동 보도각 백불(白佛)로 서울 유형 문화재란다. 개천에 걸려 있는 보도교 다리를 건너 절 안으로 들어갔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왜군과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왜군이 서대문을 넘어 한양 도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여서 권율장군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옥천암을 요새로 삼아 배수진을 치고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야간 매복을 하였다.

깊은 밤 드디어 왜군이 밀려왔고 그때 왜군들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장수(옥천암의 백불)가 나타났다. 조선의 장수로 생각한 왜군은 일제히 총을 쏘았는데 총알을 다 쓰도록 총을 쏘았는데도 장수는 쓰러질 줄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총알이 다 떨어진 왜군들은 당황하여 허겁지겁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때 권율장군의 군대가 일제히 반격하여 왜군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누각과 관음보살상이 홍제천과 잘 어우러져 있는 이곳부턴 지금까지 걸으며 보았던 동네속의 물줄기가 아닌 자연계곡의 힘차고 멋들어진 모습으로 바뀐다.

햇볕을 피해 잠시 쉬어가기 좋은 홍지문 안, 덕분에 조상들의 은덕을 본다.
 햇볕을 피해 잠시 쉬어가기 좋은 홍지문 안, 덕분에 조상들의 은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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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나타나는 큰 성문 밑에 들어가 햇볕을 피하며 잠시 쉬어갔다. 성문 옆 다섯 칸의 구멍이 있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홍제천 물이 콸콸~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이 문의 이름은 홍지문 (弘智門)으로 숙종 45년 (1719년)에 만든 탕춘대성의 출입문이다. 탕춘대성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하여 세운 성곽으로 서성(西城)이라고도 한다. 인왕산 정상의 서울 성곽에서부터 북쪽의 능선을 따라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된 산성으로 길이가 약 5㎞에 이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군사훈련과 수도방위를 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였으나 북한산성이 높아서 군량 운반이 어렵자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 일대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이 성을 축성하기로 했다. 원래 홍지문, 세검정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한산주(漢山州)로서 군사상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하니, 포방터 시장 이름의 유래가 수긍이 간다.  

자연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조상들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는 세검정
 자연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조상들의 취향을 가늠할 수 있는 세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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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홍제천 상류는 보기 드물고 인상적인 개천 풍경을 보여준다. 거친 바위들과 나무 많은 언덕, 옛사람들의 정자, 성벽, 수문, 물이 흐르는 계곡 같은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다. 날아갈 듯 너른 바위 위에 올라앉은 세검정 정자는 그 정점이다. 북한산과 인왕산, 북악의 산세가 겹칠 듯 맞대고 있다. 인조반정에서 이름의 유래를 찾는 세검정(洗劍亭)은 1941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하였단다.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인조반정이 있기 오래전부터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기던 명소답게 위치가 참 좋다. 정자 앞의 너럭바위들을 돌아 흐르는 물줄기가 유려하다. 겸재 정선이 멋진 그림으로 남길만하다. 하지만 도시 개발로 인해 차에 치여버릴 듯 쫓겨나 듯 도로변에 바짝 붙여진 세검정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인문학이 대접받는 시대지만 이런 역사적 유물을 대할때 마다 미학적 보존도 매우 중요함을 절감한다.

홍제천의 최상류, 백사실 계곡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함이 싹 가신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함이 싹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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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정자를 끼고 난 앙증맞게 좁은 산책로를 걸어가면 눕고 싶은 평상이 놓여있는 자하슈퍼가 나온다. 가게 이름에서 창의문의 다른 이름인 자하문이 연상된다. 개성의 경치 좋다는 곳 자하동을 본따 자하문이라 지었다는데 자하슈퍼도 동네 경치가 좋아 그런 이름을 붙였나보다. 동네의 유일한 편의점을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비밀의 정원을 품고 있는 백사실 계곡이 펼쳐진다.

언제와도 아늑하고 조용하여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 드는 백사실 계곡 어귀 숲길을 걷다가 바위에 써있는 '백석동천' 글귀와 마주쳤다. 백악(북악산) 아래에 있는 경치 좋은 동네라는 뜻으로 백사실 계곡은 국가지정 명승지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서 깊은 글귀도 반갑지만 계곡가에서 마주친 무당 개구리도 무척 반갑다. 몸은 진초록인데 풀썩풀썩 움직일 때마다 빨간 색깔의 배가 드러나 신기하기만 하다.

고요하고 아늑한 기분이 드는 백사실 계곡의 오래된 연못
 고요하고 아늑한 기분이 드는 백사실 계곡의 오래된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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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깊은 산중에 그 옛날 별장과 사랑채를 지었던 돌기둥과 정자 터가 남아있어 이채롭다. 현재 남아있는 주춧돌로 보아 1830년대에 600여 평의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연과 최고의 조화를 이루려 했던 조선시대 조상들의 풍류를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비가 내린 후 찾아가니 계곡의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위풍당당하게 흘러 그 소리에 속이 다 후련하고 발을 살짝 담그기만 해도 마사지 받는 것 같이 피로가 풀리고 시원한 기분이 든다. 은밀한 비밀정원 같은 연못에 이르면 이처럼 우렁차게 흐르는 계곡물보다 부끄럽다는 듯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백사실 계곡과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침내 홍제천의 최상류까지 왔다. 그리 긴 거리는 아니지만 참 다양한 풍광과 이야기가 있는 천변길이었다.


태그:#홍제천, #인왕시장, #포방터시장, #세검정, #백사실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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