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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첫 연애, 그 1주년을 기념하는 날의 저녁은 어묵볶음, 무말랭이 무침, 깻잎장아찌와 된장찌개가 함께 나온 3500원짜리 백반이었다. 몇 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메뉴가 눈 앞에 선하다. 털어서 먼지만 나오는 대학생 커플이었던 우리는 카페에서도 늘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값이 제일 쌌으니까.

스물 둘의 여름, 구질구질했던 연애를 마무리짓고 난 후 늘 꿈꿨다. '서른 살 이후 어른의 로맨스는, 더이상 데이트 비용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탄탄한 재력을 갖춰 내숭 없는 쿨한 만남을 하리라!' 아직 옆구리도, 주머니도 허전하지만 가슴 속 판타지는 가득하다. 20대 후반의 여름을 맞이해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여고생에게 20대의 청춘 연애사업을 꿈꾸게 만들어준 MBC 시트콤 <논스톱>처럼, 다가올 30대의 로맨스를 꿈꾸게 만들어주는 두 드라마, SBS< 신사의 품격>(이하 신품)과 MBC <아이두 아이두>(이하 아이두) 때문이다.

"오해받기 싫음 진짜 자던가" 안방극장에서 이런 대사를 들을 줄이야

'알 것 다 아는' 40대 남성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SBS 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
 '알 것 다 아는' 40대 남성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SBS 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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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 잠든 척 엎드려있는 이수(김하늘)를 도진(장동건)이 호텔 방 안으로 안고 들어오자 이수가 말한다.

"우리 둘이 같이 잔 걸로 오해할거 아니에요!"

"오해받는게 싫으면 진짜 같이 자던가(도진)."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수위의 대사다. 하지만 <신품> 속 불혹의 네 남자 김도진, 임태산(김수로), 최윤(김민종), 이정록(이종혁)은 야한 농담과 성적 본능에 관한 이야기까지 대담하고 능글맞게 표현하고 있다. 비키니를 입은 이수의 사진을 훔쳐보던 도진의 모습이나 이수가 목욕가운을 벗고 속옷을 입는 과정을 도진이 상상하는 장면은, 2005년 안방극장을 향해 "오래 굶었다(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고 말하던 김삼순양의 표현 수위를 넘어선 셈이다. 그럼에도 "민망하다"는 시청자 반응이 빗발치지 않는 까닭은, '알 것 다 아는' 중년 남성들의 연애담이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성(性)과 연애 담론이 자유롭게 오가는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내의 돈과 능력에 기대어 결혼에 인생을 걸어버린 남자, 정록도 눈여겨볼 만하다. 기존 한국 연애 드라마는 '사랑'이란 정답으로 모든 사건과 고난을 해결하고 이야기를 종결지었다. 그 과정에서 신데렐라 스토리와 각종 비극적 플롯이 모두 뒤섞인 막장 드라마가 탄생했다. 하지만 정록처럼 자신의 안위, 삶의 질이나 사회적인 위치 등을 사랑과 저울질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지루한 답변만 가득한 시험지에서 새로운 정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줬다. 게다가 '신데렐라를 꿈꾸는' 그는 남자다.

골드미스 황지안의 일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아이두 아이두>의 한 장면
 골드미스 황지안의 일과 사랑을 그리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아이두 아이두>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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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아이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공들여 쌓은 자신의 이력에 흠이 될까 남자를 마다하고, 아기를 지울지 고민하는 주인공 황지안(김선아)을 보여주는 <아이두>는 사랑 만능주의로 일관되었던 지난날의 로맨스 드라마들과 분명 다르다. 또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위기 탈출에 성공하던 기존 드라마의 '신데렐라형, 민폐형 여주인공'들과 달리 지안은 혼자 힘으로 빛난다. 학력도 경력도 빽도 돈도 없는 '무능력한 민폐형 캐릭터' 박태강(이장우)를 구하는 '백마 탄 여왕님'이다. 남자가 여자를 구해주는 전형적인 패턴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두>는 또 임신, 낙태, 폐경 같은 이슈와 함께 30대 이상 여성들의 성과 사랑 이야기를 솔직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이두>가 지금껏 국내 드라마에서 다루기 힘들었던 민감한 소재를 대놓고 건드리고 있다는 점은 <신품>에서 솔직한 성적 농담이 자주 나오는 것과 더불어 '세상이 변했다'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 아닐까.

해피엔딩말고  우리가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진짜 연애'를 보여줘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신품>의 경우, 국내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던 미국 HBO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섹스 앤 더 시티>가 여섯 개의 시즌 드라마와 영화 두 편으로 만들어지며 높은 인기를 누렸던 이유는 간단하다. '30·40대의 현실에 바탕을 둔 판타지'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캐리, 사만다, 미란다, 샬롯 네 명이 저마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모습 등은 20대에 꿈꿨던 '어른의 연애',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신품> 속 신사 넷의 재력, 외모, 배경 등은 2012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40대와 거리가 멀다. 현실은 없고 판타지만 있는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다. 아무리 허구라 해도, 조금의 동질감도 느껴지지 않고 설득력마저 떨어지는 드라마 속 인물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 어렵다. 잘 나가는 건축가로 능력 있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간편한(?) 만남을 이어가는 도진의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더욱 사랑받기 위해서는, 40대여서 할 수 있는 사랑을 설득력있게 보여줘야 한다. 짝사랑 때문에 자동차 추돌사고를 내는 '40대 소년'이 아니라 경험과 연륜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어른'의 모습말이다.

<아이두> 속 골드미스 지안의 경우, 이제껏 몰라왔던 감정을 살려내야 할 시점이다. 약 40년을 일에 묻혀 살아오며 연애세포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던 그녀는 박태강과 조은성 두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 이 달달한 연애감정은 물론 '구두 만드는 사람'에서 '아이 가진 사람'이 된 지안은 애틋한 모성애까지 시청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나아가 "보이지도 않는 애 때문에 마음대로 화도 내지 말라구요?"라는 그녀의 혼란과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보여줘야 할 때다.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갈 길이 멀다. 연애라는 '어른들의 동화'를 써나가되, 뻔하지 않게, 더 아찔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내놓아야 한다. 20·30대가 꿈꾸는 사랑은 왕자와 공주의 해피엔딩이 아니다. 일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어른들의 동화', 지안과 도진의 사랑에 '언젠가 내게도...'라며 가슴 뛸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태그:#신사의 품격, #아이두 아이두, #장동건, #김선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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