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현실성

영화 <돈의 맛>의 포스터 조금은 불편한

▲ 영화 <돈의 맛>의 포스터 조금은 불편한 ⓒ 휠므빠말

여기 속칭 '개족보'가 하나 있다. 엄마와 성관계를 맺은 연하남(최소 20살 이상 차이난다)을 이혼한 딸이 사랑하여 다시 관계를 맺고, 엄마의 남편은 아내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집안 한 구석에서 외국인 가정부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취급하지 않은 채 오직 돈 많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만 바라보며, 외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위와 같은 가족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핀잔을 줄 것이다. 대충 들어도 벌써부터 현실성이 부족한 가족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말이 되는 관계 설정인가?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건 위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엄연한 현실로서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돈의 맛>이라는 제목을 걸고 절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그럴싸한 현실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것은 바로 '돈' 때문이다. 사람들은 엄청난 돈이 바탕에 깔리면 위와 같은 '개족보'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돈이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는 도덕이고 나발이고 모든 걸 벗어 던진 천박한 사회.

딸과 사랑하는 영작 속칭 개족보

▲ 딸과 사랑하는 영작 속칭 개족보 ⓒ 휠므빠말


관객들은 돈 때문에 영화 <돈의 맛>을 하나의 현실로 인식한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면 한낱 헛소리로 치부될 이야기가, 돈을 매개로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의 그럴듯한 현실로 둔갑된다. 그것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믿음과 사회 0.001%의 특권층은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이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영화 중간 중간 삼성이나 장자연 등 그들의 모델이 되었던 현실 속 인물들의 이미지 등을 차용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작업일 뿐이다. 관객들은 이미 그 풍자와 상관없이 돈에 대한 개인적인 개념과 인식에 따라 영화에 스스로 현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영화 <돈의 맛>의 주인공은 결코 등장인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연기자가 아니다. 바로 영화를 사실의 연장선으로 만드는 돈인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부러운가? 부러우면 지는 거다

▲ 영화의 주인공 부러운가? 부러우면 지는 거다 ⓒ 휠므빠말


따라서 영화 <돈의 맛>에서 우리가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특권층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특권층의 모습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인식이다. 그 말도 안 되는 관계들마저 현실로 수용할 수 있는 관객들의 인식이야말로 영화 <돈의 맛>이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또 다른 질문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현실 같습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영화 <돈의 맛>이 이야기 하는 돈의 맛은 어떤 맛일까?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사람들은 이 영화를 덥석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돈의 맛, 그 씁쓸함에 대하여

영화는 돈의 맛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함에 앞서 관객들로 하여금 분명한 감정이입의 대상을 정해준다. 김강우가 연기한 주영작이 바로 그 인물로서 그 외의 인물은 어디까지나 주영작의 관찰 대상일 뿐 감정이입이 불가능한 존재다. 그들은 99.9%의 관객들이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아주 특소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주영작이 느끼는 돈의 맛에 집중한다. 그것이 바로 관객들이 느끼는 돈의 맛이며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돈의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돈의 맛에 빠지는 영작 탐욕스러운 눈빛

▲ 돈의 맛에 빠지는 영작 탐욕스러운 눈빛 ⓒ 휠므빠말


영화 초반부 주영작이 처음 접한 돈의 맛은 달콤함이다. 현실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으며, 백씨 가문은 백금옥(윤여정 분) 여사의 말대로 한낱 찌그래기 돈으로 공무원이나 기자 교수 등을 배려놓음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한다. 모든 것이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흘러가는 사회. 그 기저에는 돈에 대한 탐욕이 웅크리고 있다.

윤회장(백윤식 역)은 금고에서 엄청난 액수의 현금을 꺼내며 주영작에게 너도 몇 다발 가지고 가서 돈의 맛을 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영화의 관객에 대한 물음이자 조롱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과연 당신은 그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물론 주영작은 처음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이내 그 돈다발을 움켜지고 만다. 자신의 얼척없는 행동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윤회장의 돈의 맛 모욕적인 그 맛

▲ 윤회장의 돈의 맛 모욕적인 그 맛 ⓒ 휠므빠말

그러나 영화는 한편 그런 돈의 달콤함이 무엇을 희생으로 하고 있는지 또한 여실히 보여준다. 바로 자존감. 영화에서 돈의 반대어는 자존감이다. 자신의 능력보다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그 자존감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윤회장은 말한다. "돈, 원 없이 펑펑 썼지,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모욕!" 결국 그의 모욕이란 자존감을 버릴 때 느끼는 감정이다. 나의 자존감이 돈으로 치환되어 타자에게 금액 액수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

이쯤 되면 관객들은 영화가 서서히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가 자존감을 지키고 살고 있냐는 질문으로부터, 모욕을 참아가면서까지 돈을 벌고 있느냐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차마 No라고 외칠 수 없는 월급쟁이의 무력감. 과연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국내 유수의 기업에 취업하여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들도 궁극적으로는 재벌의 한낱 하인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직장 상사의 모진 꾸지람에 모욕감을 느껴도 돈은 그렇게 해서라도 벌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모욕감의 극치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다면 자존감을 버려야 한다

▲ 모욕감의 극치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다면 자존감을 버려야 한다 ⓒ 휠므빠말


감독은 이와 같은 좌절감도 모자랐는지 영화의 말미에 아예 쐐기를 하나 박아 넣는다. 주영작이 윤나미(김효진 역)와 함께 그의 동생 윤철(온주완 역)을 구치소로부터 빼내오는 장면을 통해 우리의 비극적인 현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윤철이 누나에게 묻는다. 주영작이 그들의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었던 사실은 알고 있는지. 이에 대해 흥분하여 급기야는 차를 세운 뒤 윤철을 끄집어내는 영작.

그러나 그 뒤 상황은 기대했던 바와 전혀 반대다. 주영작이 서민의 대표로서 윤철을 패고 관객들에게 대리만족도 제공할 만 하건만 감독은 잔인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재벌가의 아들 윤철이 오히려 괴상한 복싱 실력으로 주영작을 패는 것이다. 공부 잘 하는 놈이 싸움도 잘 한다는 이 비극적인 현실. 윤철은 말한다. "너희들은 안 돼. 그러니까. 그냥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고 살라"고.

아마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모욕적인 돈의 맛이 어떤 건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행복의 가치로 둔 이상, 우리는 항상 모욕적인 상황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돈을 가진 자들이 모든 면에서 우월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사회 전체 구성원이 돈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대. 영화 <돈의 맛>은 말한다. 우리가 돈의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예 기준 자체가 변해야 한다고. 돈이 행복의 척도가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말도 있지 않은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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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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