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 KBS


대학에서 만화를 전공하고 있는 규석(성준 분)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초조하다. 아르바이트가 많아져서 성적이 떨어졌고 등록금 혜택도 줄어 장학금을 받지 못한 탓이다. 온성 최씨 종친회에 찾아가 장학금을 신청했지만 깜깜무소식. 규석은 답답한 마음에 저축은행에 대출도 신청해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단란주점 사장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도 해보지만 여의치 않다.

한편 규석은 친구 상진(최태환 분)의 소개로 같은 학교 퀸카인 윤정(구은애 분)과 사귀게 되는데, 월세와 생활비 조달하기도 빠듯한 터라 그녀와의 데이트는 그의 주머니 사정을 더욱 곤란한 지경으로 몰고 간다. 과연 규석은 학비를 마련하고 그녀와의 연애를 지속할 수 있을까?

대학생들 통해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 적시

최규석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KBS 드라마스페셜 <습지생태보고서>(한상운 극본, 박현석 연출)는 오늘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아낸 드라마다.

주인공인 규석이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기까지 과정, 그리고 그와 '계급'이 다른 여학생 윤정과의 연애담이 중심 이야기 구조를 이루지만, 다양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개성 있는 인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2012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이슈와 다종 다기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예컨대, "가만히 있어도 완전한 이곳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냐 이 말이야, 내 말은. 이걸 돈 놓고 돈 먹는 투기판으로 만드냐 그거야"(4대강 사업), "너 뭐야, 깡패야? 불법 체류자였어?"(이주노동자 차별), "일등 해야지. 일등. 이등은 기억 못하는 세상이야."(일등 지상주의), "학생들에게 외모로 놀림 받던 초등학교 교사 자살. 헐. 요즘 초딩 쩐다"(외모 지상주의), "야. 피해. 얘 방사능 같은 놈이야."(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당대 여러 사회 문제들을 적시하고 있다.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 KBS


'자존심은 개나 주라고 해', '시련은 부자에게 가지 않아', '호박에 줄' 등 각 에피소드에 붙인 소제목들이 눈길을 끌고, 주인공인 규석이 상념에 빠질 때마다 등장하는 개구리(CG로 처리됐다)는 등장 그 자체로 잔재미를 준다.

성준, 정영기, 김창환, 이재원 등 주요 배역을 연기한 젊은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 앙상블도 볼만하다. 주인공인 규석 역의 성준은 지금까지 맡았던 그 어느 배역보다 생활에 밀착한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을 보여줬고, 배우 정인기를 연상케 하는 개성적인 마스크의 정영기는 쪼잔하지만 잔정이 있는 잔소리쟁이 현욱 역을 맛깔나게 소화해냈다.

세대 계급 간의 이질감, 악순환의 고리

<습지생태보고서>에서 눈여겨보게 되는 건 세대 간 그리고 계급 간 존재하는 이질감에 대한 묘사다. 드라마는 이를 통해 그들이 소통 가능한 상태에 있는 건지 묻고 있다. 먼저 세대 간 존재하는 이질감을 살펴보자.

단란주점 사장은 아르바이트생인 규석과 정서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에게 규석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기 때문이다. 시급을 줬으니 노는 꼴 절대 못 보고, 일손이 필요하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면서도, 그 일에 대해 미안해한다거나 고마워하지 않는다. 규석이 세 들어 사는 집주인 남자(이대연 분) 역시 단란주점 사장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다.

평소 규석이네들에게 온갖 잔소리를 해대면서도 지하에 들인 방에 비가 샌다는 말에 "싫으면 나가든가" 식의 반응만 보인다. 과 선배는 또 어떤가. 앞날이 창창한 후배들에게 "니들은 (만화를 그려서는) 남은 희망 전혀 없다"며 '성공'하려면 부잣집 여자를 무는 수밖에 없다고 김새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건 다 (니들 같은)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열심히 살라고 공허한 설교를 해댄다.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설교를 늘어놓는 건 규석의 종친회 이사장(서현철 분)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를 전공한다는 규석에게 그는 수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지 만화를 그리면 밥이 나오느냐고 시대착오적인 반문을 하는가 하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같은 집안사람인 규석과 규석의 고모 앞에서 다방 종업원의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주물러댄다.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 KBS


규석이네들을 향해 너무 편하게 산다며 혀를 끌끌 차는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입장에만 충실하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 상대 입장을 헤아린다거나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공감능력 불량에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부족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런 식이라면 기성세대인 이들이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과 소통하거나 유대를 맺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성세대에 대한 다음 세대의 존경? 역시 생길 리 만무하다.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드라마가 바라보는 계급 간 이질감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습지생태보고서'의 분류법에 따라 이른바 '하위종'에 속하는 규석이네들은 가난을 달고 살아온 젊은이들이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동거하는 이들의 생활은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

매달 들어가는 월세와 생활비, 매학기 들어가는 학비 때문에 걱정이 마를 날 없는 이들은 날이 더워지자 방에서 대부분 속옷이나 파자마 차림을 하고 후줄근하게 지낸다. 낡은 선풍기 하나 달랑 있을 뿐인 그들의 방이 너무 덥고 습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이들은 학교에 비치돼 있는 냉온수기에서 식수를 조달하고, 생활 쓰레기를 모아 학교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 한다. 이들은 하루하루 사는 일이 악전고투에 가깝다.

반면 유산 계급에 속하는 상진과 윤정은 상대적으로 '쉽게' 살아가는 듯 보인다.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는 이들은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일도 '쉽게' 결정하고 실행하며, 친구에게 명품 수트를 빌려주는 일이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이트 상대에게 고가의 옷을 사주는 일마저 '쉽게' 한다. 거기다가 스타일 좋고 매너까지 좋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재력을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사는 일에 이용할 줄 아는 수완까지 지녔다.

이들을 바라보는 규석이네들의 시선이 이중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진이 빌려준 명품 수트를 두고 규석은 "이거 입는다고 내 본질이 달라지냐?"고 말하면서도, 그 수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는 "'뽀대'는 나네"라고 자조한다.

또 명문대 다니는 친구들을 두고 그들의 눈빛이나 말투에 배인 우월의식이 장난 아니라거나, 영어 못하면 말도 안 섞는다든가 하는 규석이네들이 나누는 '뒷담화'에서도 동경과 비난의 시선은 공존한다. 이른바 물질만능주의와 승자독식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일면이 반영된 결과다.

<습지생태보고서>,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경고

그래서 가난이 부끄러운 규석이네들은 이른바 '이종'(異種)들에게 가능하면 이를 숨기려 든다. 규석은 상진에게 단란주점 아르바이트 사실을 숨기며, 현욱은 여자 후배들 앞에서 가정식 랍스타 요리를 해먹었다며 우쭐거린다. 이들이 자신들의 가난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동병상련의 존재들뿐이다.

이들 사이에선 가난 때문에 고생한 얘기가 때론 무용담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보고 가난이 자랑이냐는 규석의 말에 녹용(이재원 분)은 이렇게 답한다.

"나중에 잘 되면 자랑 돼. 무조건 잘 돼라."

동병상련이란 결국 공감대가 넓음을 뜻하는 말이다. 셋이 살기에도 비좁은 공간에 규석과 친구들이 오갈 데 없는 녹용을 들인 건, 마치 과부가 홀아비 사정 안다는 옛말처럼, 그의 곤경을 차마 남의 일로 보고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돕고 살아야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걔 돈 없어서 학교 그만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러냐?" 등의 대사는 공고한 연대의식의 표현이다.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지난 3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장면 ⓒ KBS


하지만 규석과 상진, 규석과 윤정 사이에는 이런 연대의식이 들어설 틈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규석의 가난을 모르고 규석 역시 그들의 세계를 모른다. 하지만 서로 '이종'이라는 건 알아서, 가난이 부끄러운 규석은 그들에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그들 역시 규석을 온전히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결코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없다. 규석이 윤정과 데이트를 하면서도 마냥 행복해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그녀를 위해 돈을 쓰느라 그 달치 생활비와 월세 낼 돈이 없어진 규석이 현욱에게 인생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장면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내가 나쁜 짓 한 거냐? 남들 다 하는 연애 한번 해본 건데, 왜 이렇게 어렵냐?"

이처럼 가난은 온전한 연애마저 어렵게 만든다. 계층이 다른 두 남녀의 연애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바야흐로 단란주점 사장 말마따나 돈 없는 놈이 연애하면 팔자 좋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기 십상인 세상이 된 거다. 한국 사회 초혼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기서 자문해보자. 과연 세대 간 계층 간 이해도 존경도 없는 사회가 과연 잘 굴러갈까? 그리고 그 사회 구성원들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습지생태보고서>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대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결국 기성세대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극중 재호(김창환 분)가 내뱉는 다음의 대사는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경고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면서 자꾸 설교하지 마요. 아, 뭐 세상이 이런 게 다 우리 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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