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이제훈은 의외성이 기대되는 배우다. 만화 <몬스터>의 요한처럼 한없이 선해 보이지만, 그 안에 무궁무진한 악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의 이제훈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을 때면, 그 다면성 때문에 짜릿함을 느끼곤 했다.

SBS 드라마 <패션왕> 종영 후, 인터뷰를 위해 만난 이제훈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얼핏 발견했다. 어떤 질문에도 지나치게 잘 정돈된 모범 답안을 척척 내놓던 그가 한순간 미간 사이에 동요를 비쳤을 때, 그 의외성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패션왕>에서 그가 연기한 정재혁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재벌 2세인 재혁이 인정받고 싶은 존재인 아버지로부터 매번 강도 높은 폭행을 당하는 부자관계가 비현실적이거나 과장됐다고 말하자, 순간적으로 날선 눈빛이 된 이제훈은 "경험하지 않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재혁이 된 것처럼 말했다.

이어 "캐릭터로서 설득하는 것도 배우의 일"이라고 덧붙였다. 곧, 선하게만 생긴 이제훈에게 왜 <파수꾼>의 우정과 권력 사이에서 비틀거리다가 자살한 기태나 <고지전>의 전장에서 중대를 이끌어야 했던 소년 대위 일영, <패션왕>의 사랑 때문에 자신을 파괴할 정도의 집착을 보였던 재혁처럼 순간적으로 일그러질 수 있는 역할이 주어졌는지 조금 더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절절한 짝사랑 경험을 묻는 질문에 스무 살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고백해서 사귀기까지 했는데,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오래 사귀지 못하고 차였다. 그래서 짝사랑 같은 느낌으로 남았다"라고 수줍게 웃었을 때는 <건축학개론>의 승민 같았다.

"정재혁을 통해 이제훈이 낯설게 느껴지기를 바랐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지난 번 <패션왕> 제작발표회에서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공언했어요. 그런데 정재혁은 차갑다기보다, 찌질한 모습이 부각됐던 캐릭터 아니었나요?
"밉상이었죠. 워낙 가진 것이 많아서 거침없이 살았던 인생이기 때문에 남을 배려한다던지, 아껴주고 위해주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에요. 저는 정재혁을 통해서 배우 이제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를 바랐어요. 세 작품(<파수꾼><고지전><건축학개론>)을 연달아 했는데, 비슷한 이미지로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기보다 사이를 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캐릭터였거든요. 드라마는 호흡이 기니까, 이 친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는지 깊이 있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 결과적으로 정재혁은 성장보다, 한 여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 끝없이 치기를 부리면서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을 것 같은데?
"처음과 중후반의 모습이 굉장히 달라요. 드라마에서 캐릭터가 살아가는 모습과 변화가 있어야 저도 연기하는 데 의의가 있을 것 같아요. 정재혁이 조금씩 무너졌더라도, 이 사람의 끝이 아니고 살아가는 거잖아요. 강영걸(유아인 분)과의 대립을 통해 차갑고 이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가영(신세경 분) 때문에 일도 포기하고 사랑만 쫓아서 올인하는 모습은 정재혁이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이를 무너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깨달음도 있었기에 충분히 성장이라고 생각해요."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패션왕의 정재혁이 보여준 이미지를 재연해 보이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패션왕의 정재혁이 보여준 이미지를 재연해 보이고 있다. ⓒ 이정민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며 미소짓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며 미소짓고 있다. ⓒ 이정민


- 사실 <패션왕>을 보며 재혁이 때문에 창피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 앞에서 술에 만취한 모습으로 "이가영!"을 외치며 주정을 부리지 않나. 이제훈씨도 그런 재혁이 창피하지 않았어요?
"(웃음) 정재혁의 인생이 무너지고, 나락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모든 것이 다 있었지만,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이 창피할 수도 있죠. 그만큼 그 사람에게는 가영이라는 인물이 누구보다 고귀한 거예요. 멋있게 연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가진 연기 성향은 '그 사람의 밑바닥에 있는 진짜를 보여주고 싶다'는 거예요. 내면의 솔직한 모습이요."

"이제는 연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

- 어쩌면 착하게 생긴 이제훈에게서 다면적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영화 <파수꾼>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님은 선하기만 할 것 같은 제 모습에서 '순간의 눈빛'을 읽었다고 했어요. 거기에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내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가능성을 엿봐준 것 같아요. 작품을 거치면서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다져졌다고 해야 하나. 매 작품마다 마찬가지겠지만, 시나리오를 준 감독님들은 작은 가능성을 봐주고 맡겨주신 것 같아요. 가능성에 대한 도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죠."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영걸 역의 유아인씨는 이제훈씨가 정답이 있는 연기를 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정답은 없어요.(웃음)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어떤 모습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대본상의 텍스트를 가지고 가지만, 현장의 분위기나 작은 소품 하나로도 너무나 쉽게 상황이 바뀌죠.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들 안에서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때 놀랍더라고요. 이런 과정은 제가 연기를 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부분이에요."

- 대학교까지 자퇴하고 연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마냥 응원을 해주시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 배우의 길을 지지해주셨나요?
"학교에 새로 들어갔을 때요. 내가 연기라는 것에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모습, 정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드린 게 학교를 다시 들어간 것이었거든요. 그때가 25살이었어요. 그때부터 부모님도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라'라고 해주셨죠. 작은 단편영화, 뮤지컬을 했을 때도 항상 제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안심 시켜드리고 싶었어요. 이제 배우로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사랑 받으니까 좋아하시죠."

- 이제훈이라는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갖고 연기하는 배우인가요?
"예전에는 마냥 연기가 하고 싶었고,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을 것 같았어요.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알려지고 나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크게 들더라고요. 배우는 끊임없이 캐릭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만약 한계가 보인다든지, 부족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면 연기를 시작한 것보다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집중해서 매진해야 될 것 같아요. 연기라는 게 인생의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제는 연기를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됐어요."

"연기하는 이제훈이 없으니, 갑자기 '멍'한 느낌"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패션왕의 정재혁이 보여준 이미지를 재연해 보이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패션왕의 정재혁이 보여준 이미지를 재연해 보이고 있다. ⓒ 이정민


- <패션왕>도 끝났으니, 이제 좀 쉬어야죠.
"영화 세 작품을 연달아 끝내고, 곧 새 영화도 개봉하는데 인터뷰를 하거나 홍보할 새도 없어서 아쉬웠어요. 이제 <패션왕>도 끝나고, 캐릭터로서 연기하는 이제훈의 모습이 없으니까 '멍'하더라고요. 다시 촬영장에 나가야할 것 같고. 긴장했던 순간들이 겹겹이 밀도 있었던 세월이 풀어지니까 여유롭기도 하지만요. 요즘은 잠도 많이 자고, 많이 먹고, 친구들도 좀 만나고 있어요.

영화 보는 게 평상시 유일한 낙이었어요. 극장도 자주 가려고 하고 책도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항상 시나리오 보고 대본 외우느라고, 소설이나 시집에 몰두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이제 촬영이 없으니까 책도 좀 읽어야죠."

- 배우로서 단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가 궁금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영화 <점쟁이들>이 흥행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는 모험일 수 있는 작품이에요. 한국영화에 이런 장르가 있나 싶을 정도로 독특해서 사람들 반응도 궁금한데, 유쾌하고 재밌는 작품으로 다가갈 거라는 확신은 들어요. 한편으로는 걱정도 있죠. 갑자기 달라지는 제 모습에 어떻게 반응을 할지.

장기적으로는,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통해 여러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연기를 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존경하고 따라하고 싶은 배우들을 돌이켜보니, 다들 그 배우 안에서 창조해낸 캐릭터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친구가 나오면 작품이 궁금해지고, 믿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SBS드라마 <패션왕>에서 정재혁 역의 배우 이제훈이 4일 오후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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