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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빠~! 요즘 우리 집 TV같은 구닥다리 보는 집이 어디 있는 줄 알아요? 친구들 올까봐 겁나요. 아, 진짜 창피해요! 알아요? 요즘 스마트TV가 대세라는 거? 15년도 넘은 우리 집 TV와 차원부터 달라요. 우선 큼지막한 화면에 영화에 인터넷까지 얼마나 폼 나는지… "

"그런 게 어딨노? 지금 우리 집 TV가 어때서? 화면 나오는 것은 똑같네~ 뭐!"
"완전 다르거든~요. 아빠, 우리는 안~볼란다. 아빠나 많이 보세요!"
"얘들아. 마음가짐은 창피하지 않고 모양새만 창피하니? 화면이 작아서 그렇지, 아직은 볼만 하잖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대세라고 따라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게 없어…"

하지만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은 나도 어쩔 수 없나보다. 씩씩거리는 가족들의 항변에 잘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신형 TV의 유혹은 정말 나도 참기 힘들다. 15년 이상 써온 브라운관TV를 고수하느라 오늘도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며 참는 이 심정을 가족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 그뿐인가? 아날로그 방송도 올해 말이면 종료가 된다는데…. CF에서는 '2012년 12월 31일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 종료'라며 연일 떠드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고 가족들의 눈총 속에서 암울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TV로 스트레스를 받으니 평소와 달리 가전광고가 유난히 눈에 잘 띄고, 길을 가도 인터넷을 봐도 TV광고만 눈에 들어온다.

'올킬 디지털TV, 42인치 풀-HD LED, 선착순 300대 한정판매, 1월31일 10시'.  00사 배너광고
 '올킬 디지털TV, 42인치 풀-HD LED, 선착순 300대 한정판매, 1월31일 10시'. 00사 배너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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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방문한 사이트, '반값 TV'를 판다

그러던 1월의 어느 날, 우연히 방문한 00 사이트에 '올킬 디지털TV, 42인치 풀-HD LED, 선착순 300대 한정판매, 1월 31일 10시'라는 배너광고가 눈에 딱 들어온다. 당장 클릭하고 보니 50만 원대다. 아, 눈이 번쩍 뜨인다. 이건 바로 나같은 사람을 위한 배려 아니겠는가? 00, 너 정말 고맙다.

"42인치를 40만 원대에 내놓아 1분만에 300대가 팔린 기획 이후 다시 찾아온 최고의 기회"라고 꼬드기니 누군들 눈이 멀지 않으랴. 42인치 LED가 50만 원대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지난 1월 17일 49만 9000원짜리 42인치 TV 300대가 1분 만에 모두 팔렸지만, 당시 모델은 LED가 아닌 LCD였다. 나는 이미 눈이 휙 돌아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요즘 '디지털 방송' 운운하며 한참 떠들썩하지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결국 반값 TV 앞에 나도 그만 공범이 되고 말았다. 귀신에 씌었을까? 평소에 사이비종교인이 말을 걸어도 뒤도 안 돌아보고 갔었는데 이건 뭐 판단력이 점점 흐려진다.

동일한 제품을 가격비교 사이트를 통해 쇼핑몰에서 확인해 보니 80만 원대다. 만약 선착순으로 이 TV를 구입하고 운송비와 설치비까지 부담한다 해도 더 싼 가격이다. 더 찾아보고 알아볼 것도 없었다. 국산(W사)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결국 대세는 기울고 말았다.

국내 굴지의 제품은 아니었고 옵션비용(운반설치비 8만 원, USB단자추가 7만 원대)도 있었지만 가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급 대기업제품이 시중가로 120여만 원을 호가하니 그리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다 싶었다.

명색이 디지털 TV인데, 기능이나 디자인보다는 시대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게 목표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옵션비용을 포함하여 신용카드 12개월 무이자 할부로 결제한 금액이 75만 8천원. 어찌됐든 이 가격에 42인치 풀HD급 LED를 보내주시는 판매자는 과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가?

하지만 고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였다.

'그 시간이면 사무실에 있을 시간인데…. 혹시라도 정전이라도 난다면? 손님이 찾아온다면? 인터넷이 갑자기 버벅거린다면? 혹시라도 이 기회를 놓친다면 쪽팔림은 둘째 치더라도 가족들의 원망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판매예정일 이틀을 앞두고 별의 별 걱정이 앞선다. 2년보다 더 길었던 이틀이었다. 회사에서도 차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그놈의 LED가 나를 따라다녔다.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를 유혹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살아야지.

'어차피 선착순이라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가장 빠른 속도로 접속시도를 하는 사람이 승리(?)할 확률이 높을 거야. 그렇다면 피시방으로 가야 하는건가? 아, 이를 어쩐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결국 운명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당일 아침, 출근한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컴퓨터를 켜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끈기와 정확한 시력 그리고 전날 밤 지식문답 코너를 통해 한 학습과 경험담을 바탕으로 터득한 시나리오에 따라 결국 나는 TV를 손에 넣고 말았다. 그 비법을 지금부터 지면으로 공개한다.

반값 TV를 손에 넣은 나만의 비법

결제를 마친 시간은 정확히 10시 1분이었다.
 결제를 마친 시간은 정확히 10시 1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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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표준 시간을 알 수 있는 웹 페이지나 프로그램을 미리 실행시켜둔다. 시간을 초단위로, 정확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웹 페이지를 띄워놓는다.

[09:50] 먼저 약 10분 전에 회원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해당상품 구매 창을 미리 띄워 놓는다.

[09:55] '해당상품은 현재 구매가 불가합니다'라는 화면이 뜨는 것을 확인한 후, F5버튼을 연습삼아 몇 번 눌러본다.

[09:57] 손가락 마디 관절을 꺾으며 우두둑~ 하는 뼈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 운동을 한다.

[09:58] 왼손과 오른손 양손을 각 컴퓨터의 마우스에 올려놓는다.

[10:00] 10시 정각이 되는 순간 심호흡을 짧게 하고 F5 버튼을 딱 한번만 누른다.

(몇 초 이내에 당락이 결정되므로 표준시가 아닌 다른 기기의 시간에 의지할 경우 신공이 통하지 않는다. 두번째나 세번째로 F5를 클릭할 경우 갑자기 브라우저 창에 반응이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안 나오는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성공보장이 어려워지지만 절대 성질 급하게 창을 닫아버리면 안 된다. 혹시 모르니 화면이 뜰때까지 기다려 본다.)

[10:01] 구매창이 나오면? 바로 이거다, 이게 뜨면 성공하는 거다. '해당상품은 현재 구매가 불가합니다' 화면이 뜰 경우 정해진 시간 이전이거나 이미 물 건너 간 경우다. 옵션선택 버튼이 나오더라도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 최대한 침착하게 선택하고 이후 결제창이 나오면 신용카드나 계좌번호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기입한다. 번호를 잘못 기재해 결제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구매자체가 취소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10:02] 결제를 마치고 TV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10시 2분에는 이미 준비수량의 판매가 끝나 구매가 불가능했다.
 10시 2분에는 이미 준비수량의 판매가 끝나 구매가 불가능했다.
ⓒ 00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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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여기까지다. 하아, 난 너무 뿌듯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기쁨은 다음달부터 신용카드 고지서로 고스란히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오늘 아침 오랜만에 제대로 된 기사를 보니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다. 아직까지는….

"00이 내놓은 42인치 LCD가 1분 만에 매진되며 화제가 된 데 이어 42인치 LED TV도 1분 만에 매진되며 흥행을 이어갔다. 00은 (1월) 31일 오전 10시부터 300대 한정으로 판매한 42인치 풀HD LED TV(59만9000원)가 개시 1분만에 모두 팔렸다고 밝혔다."

4차분까지 완전 매진된 00의 반값TV. 다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과연 잘하는 짓(?)인가?
 4차분까지 완전 매진된 00의 반값TV. 다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과연 잘하는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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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값TV, #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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