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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7일 제15대 대법원장으로 영예롭게 취임한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 두 달 만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정치권의 문제로만 바라봤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불꽃'이 사법부로 번졌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사법부... 시작은 역시나 <조선일보>

시작은 <조선일보>가 불을 지폈다. 한미FTA 비준동의안이 강행처리된 지난달 22일 인천지법 최은배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2기)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 22일, 난 이 날을 잊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를 본 <조선일보> 기자의 취재에 대해 최 부장판사는 "사랑방에게 친구에게 도란도란 한 말을 기사화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며 글을 삭제했으나, <조선일보>는 25일 기사와 사설을 통해 '판사의 정치편향'을 거론하며 문제 삼았다.

핵심은 "제대로 된 판사라면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법관은 실제로 공정하게 재판해야 하지만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게 싫다면 법복을 벗는 게 정상"이라며 최 부장판사를 겨냥했다.

그러자 대법원은 즉각 최 부장판사를 29일 열린 예정인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최은배 부장판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미 FTA 비준안이 날치기로 통과된 것에 대해 토론과 소통을 가치로 여기는 민주주의가, 민의의 전당에서 유린되는 모습을 보고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를 법관직을 수행하는 저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소회를 짧은 글로 올린 것"이라고 지난 22일 글을 올린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가 한 것에, 잘못된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판사는 어떤 사회적 현안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고, 그렇게 말을 하려면 법복을 벗으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충실히 행동하는 공직자(이번 통상관료)를 바라는 권력층과 가진 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라고 <조선일보>를 반박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에서는 용기 있는 말을 한 최 부장판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의 팔로워가 되자는 제안이 순식간에 퍼졌고, 25일 기준 30명에 불과했던 트위터 팔로워가 이틀 만에 2만2000명을 넘기더니 3일 현재 3만 명을 넘었다.

한미 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건 최 부장판사만이 아니었다. 창원지법 이정렬 부장판사도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황당한 소식...우째 이런 일이"라고 개탄했고, 23일에는 "날치기"라고 규정했다.

이 부장판사는 특히 지난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진보편향적인 사람은 판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라며 "그럼 보수편향적인 판사들도 모두 사퇴해라. 나도 깨끗하게 물러나 주겠다"고 보수진영의 '정치편향' 논란에 일침을 놨다.

최은배 부장판사 윤리위원회 회부, 불꽃에 기름 부은 격

대법원이 최은배 부장판사를 윤리위원회에 회부한 것은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본부장 전호일)는 28일 성명을 통해 "양승태 대법원장의 최은배 부장판사에 대한 윤리위 회부는 법원 내외의 다양한 의견과 의사소통하지 않고 공직자윤리 훼손 여부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겨를도 없이 결정한 너무나 급박하고 경솔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법원본부는 "지금 대법원이 해야 할 역할은 최 부장판사를 윤리위에 회부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법원으로서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중재신청자(외국투자자)가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도록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투자자국가제소제도(ISD)가 포함된 한미FTA에 대한 입장을 국민들 앞에 밝히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전호일 본부장은 윤리위가 열리던 29일 대법원 청사 정문 앞에서 출근 시간(8~9시)에 이를 비판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서울북부지법 변민선 판사(사법연수원 28기)는 28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조선일보 기사에 대한 짧은 소감'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은 법원공무원들뿐만 아니라 판사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윤리위 회부를 보고 많이 놀랐다는 변 판사는 "정작 윤리위원회에 회부할 사람은 최은배 부장판사가 아니라, (물론 공직자가 아니긴 하지만) 법관의 공정성을 의심하도록 유발하고, 법관 개인만 아니라 그 주변 친구들의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한 조선일보 기자 아닙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변 판사는 특히 "대법원이 여론 일각에서 문제제기를 했다고 하여 곧바로 관련 법관을 징계 또는 윤리위원회에 회부한 것은 사법부 독립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며 "이런 식으로 하면, 외부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법관이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나요?"라며 양승태 대법원장을 곤란하게 했다.

변민선 판사의 글이 게시되자 법원공무원들은 '절대 공감'을 표시하며, 대법원의 이번 윤리위원회 회부 결정에 대해 "너무나도 조급하고도 정치적인 결정", "사법부답지 못한 결정", "법원이 법관의 독립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수원지법 송승용 판사(사법연수원 29기)도 가세했다. 윤리위원회가 열리던 29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최은배 부장판사에게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징계 등 불이익한 처분이 내려진다면 많은 판사들은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상찮은 글을 올렸다.

서기호 판사 "최은배 부장판사 징계 판단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위원장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29일 대법원 청사에서 4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를 통해 "법관의 품위유지의무는 직무와 관련된 부분은 물론 사적인 부분에서도 요구된다"며 "법관의 개인적인 행동과 모습은 국민의 사법부 전체에 대한 신뢰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법관들에게 SNS 사용에 있어서도 보다 분별력 있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윤리위는 "따라서 법관은 직무 내외를 불문하고 의견 표명을 함에 있어 자기절제와 균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품위를 유지해야 하고, 법관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되거나 향후 공정한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를 야기 시킬 수 있는 외관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은배 부장판사에 대한 징계 등은 없었다.

서울북부지법 서기호 판사(사법연수원 29기)는 다음날인 30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대법원 윤리위 결정을 접하고서'라는 글을 통해 "판사라도 페이스북에서는 평범한 국민의 한사람일 뿐이고 사생활의 보호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며 "윤리위에서 최은배 부장판사에 대한 징계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밝혔다.

서 판사는 "사적 공간의 글을, 단지 판사라는 이유로 1면에 특종 기사화한 조선일보가 뒷통수를 맞은 셈이다. 사실 법관의 윤리보다 언론의 윤리 정립이 훨씬 더 시급하다"고 <조선일보>를 꼬집으며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매번 분별력, 품위, 신중히 등의 기준에 신경써야 한다면, 그래서 특정언론과 대법원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매우 위축되고 불편하고 찜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판사들과 법원공무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진 것을 우려한 듯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1일 법조경력자 26명에 대한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자신의 언동이나 하고자 하는 일이 혹시라도 법관의 염결성을 손상하지 않는지, 자신의 주위에 조금이라도 법관의 청렴성을 해하는 불순한 요소가 있지나 않은지 끊임없이 돌아보며 함부로 처신하는 자신을 꾸짖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서 외견상 신임법관들에게 재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법원을 강조했으나, 그 중심에는 사법부 '흠집내기'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가 하면, 특히 외부의 입방아에 올라 논란이 될 소지가 있는 법관의 '돌출행동' 및 이른바 '튀는 판결'에 대해 강한 어조로 주의를 줬다.

하지만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의 권고와 대법원장의 주의는 판사들을 멈추지 못했다.

김하늘 부장판사 "한미FTA 재협상 위한 TF, 대법원장에 청원"

하이라이트는 인천지법 김하늘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2기)가 찍었다. 김 부장판사는 1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한미FTA의 문제점을 법률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을 올리며 "한미FTA 협정은 불평등 조약이며, 법률적 최종 해석권한을 갖고 있는 사법부가 나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며 "재협상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대법원장에 청원하겠다"고 밝혀 주목받았다.

김 부장판사는 자신의 글에 공감하는 판사들이 100명을 넘으면 대법원장을 만나 청원하겠다고 밝혔는데, 불과 하루 만인 2일 100명을 훌쩍 넘었고, 이에 김 부장판사는 청원 작업에 착수했다.

게다가 이번 한미 FTA 비준동의안 문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최은배 부장판사와 이정렬 부장판사는 2일 아침 나란히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자신들의 입장을 역설해 눈길을 끌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말처럼 판사들은 좀처럼 자신의 입장을 외부에 밝히길 꺼려하는데, 방송까지 출연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한미FTA 협정문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풀이된다.

이정렬 부장판사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한미FTA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지며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 우리한테 아주 불리하고 불공평하다, 우리나라 사법주권이 침해됐다, 우리 사법권이 박탈됐다"고 주장했다.

이 부장판사는 특히 "판사란 직업이 어떤 행위가 법적 요건에 맞는가 아닌가 판단하는 직업인데, 이번에 통과된 협정비준안을 보면 실체적인 부분에 있어선 대한민국 주권인 사법권을 대한민국 법원이 아닌 외국 중재기관에 넘기는 것은 주권을 팔아서 나라를 팔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분개했다.

최은배 부장판사도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이번에 FTA에 대해서 판사들이 여러 가지 관심을 쏟았던 것은 사법주권에 관한 문제가 분명히 있고 이것은 우리 판사들이 생각해야 하고, '국민이 부여한 사법권에 관해서 우리가 못 하는 것 아니냐'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이 컸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오지 않았음에도 의견을 표현했고, 앞으로도 판사들은 사법 현안에 관해서 의견을 내놓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전국법원장들 판사들 입장 표명에 우려 "신중해 달라"

마침 이날 대법원 청사에서는 전국 고등법원장과 지방법원장 등 31명이 참여하는 전국법원장 회의가 열렸다. 차한성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법원장들은 판사들에게 신중해 달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판사들의 FTA 반대의견 표명에 대해 법원장들은 "법관들 상호간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중요하고 보장돼야 하나, 법관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의견이 외부로 노출될 때에는 법원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돼 결과적으로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킬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또 "법관의 의견은 비록 사견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클 수 있으므로 자신의 발언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양승태 대법원장도 거듭 법관의 신중한 자세만을 강조했다. 양 대법원장은 이날 취임 후 처음 열린 전국법원장 회의 인사말을 통해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는 옛말이 가르치듯 법관은 항상 조심하고 진중한 자세로 끊임없이 자신을 도야하며 성찰해야 할 것"이라고 법관의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국민이 기댈 수 있는 사법부의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진정 나라와 법원의 앞날을 위한다면 각자가 자신을 중심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법원 구도와 틀을 먼저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내는 대승적이고 지혜로운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 대법원장은 다만 "법원의 앞날을 설계함에 있어서는 특정 직위나 직급의 사람들만이 중심이 될 것이 아니라 모든 법원가족이 함께 참여해 머리를 맞대고 대다수가 머리를 끄덕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할 것"이라며 여지를 남겨 주목된다.

지금 사법부 내에서 벌여지고 있는 한미 FTA 사건은 대략 이렇다. 혹독한 신고식을 맞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번 주말을 거쳐 향후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지켜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양승태, #대법원장, #사법부, #한미 FTA , #최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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