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대한민국 멜로 드라마의 남성 주인공들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용감했다. 물론 그들 또한 대부분은 여자 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없이 차갑거나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에 눈이 멀어 돌변하며 어느덧 자신의 길을 가겠다며 당당하고 멋있어지곤 했다. 이 과정에서 사랑보단 성공이 먼저인 외골수의 부모나 표독스러운 악녀는 필수요소였다. 모든 시련과 역경을 거친 뒤 드라마의 끝은 언제나 '둘이 행복하게 잘 살게 되었더라' 이런 식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수현 작가 <천일의 약속>은 애초부터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비극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천일의 약속>의 히로인인 서연(수애 분)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똑소리' 나게 잘 자란 전형적인 캔디형 인물이다. 게다가 이미 약혼녀가 있었던 지형(김래원 분)이 만사 제쳐두고 서연에게 홀라당 빠지게 할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천일의 약속>에서 지형(김래원 분)은 몰래 사귄 연인 서연(수애 분)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약혼녀 향기(정유미 분)에게 파혼을 통보한다.

<천일의 약속>에서 지형(김래원 분)은 몰래 사귄 연인 서연(수애 분)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약혼녀 향기(정유미 분)에게 파혼을 통보한다. ⓒ SBS


고아에 아파트 대출금으로 허덕이고 있지만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으로서 남의 남자를 차지할 정도로 당당하던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기억상실증이다. 서연의 나이 겨우 서른 남짓. 그녀는 물론이고 동생과 사촌오빠(이상우 분) 그리고 이미 헤어진 남자 지형에게조차 청천벽력과 같은 악재이다.

서연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형은 갑자기 서연에게 한없이 착한 남자로 다가서고자 한다.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곧 죽을 지도 모르는 서연의 곁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마음에도 없었던 향기(정유미 분)와 파혼을 선언하겠단다. 서연에게 착한 남자가 되면 향기에게는 한없이 나쁜 남자가 되는 셈이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오직 지형 밖에 모르고 "오빠 사랑해"를 "엄마"라는 단어보다 많이 불렀던 향기는 "널 사랑하지 않아" 라는 지형의 한마디에 쇼크를 받는다.

진작부터 지형이 자신의 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향기 엄마(이미숙 분)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심지어 화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지형에게 배신당한 '팔불출' 딸에게 손찌검까지 하기 이른다. 지형과 향기의 결혼으로 사돈으로 맺어지기 이전에도 오랜 친구로 병원장과 병원 이사장으로 지내온 양 측 집안의 충격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아예 지형의 아버지(임채무 분)은 사랑 때문에 결혼 일주일 앞두고 파혼을 선택한 지형에게 가장의 권한을 이용하여 "사랑타령 그만하라" 라고까지 당부하였다.

애초부터 지형은 향기를 사랑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친구 재민(이상우 분)의 집에 갔다가 한눈에 반한 서연을 만나면서부터 지형의 가슴 속에는 오직 서연뿐이었다. 하지만 지형은 부모 잘 만나 남부러울 것이 없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대신에 결혼 상대마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부모의 권한으로 정해지는 운명을 받아들여야했다. 게다가 지형의 약혼녀인 향기는 전형적인 부잣집 딸로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가씨로 곱게 자랐다. 서연을 선택하기 위해 향기를 버리자니 지형은 집안에서 축출된다는 두려움보단 아무것도 모른 채 오직 지형이 하자는 대로만 하는 '오빠 바라기' 향기가 눈에 밟힌다.

 <천일의 약속>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서연(수애 분)과 그녀를 위해 약혼녀와의 파혼을 선택한 지형(김래원 분)

<천일의 약속>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서연(수애 분)과 그녀를 위해 약혼녀와의 파혼을 선택한 지형(김래원 분) ⓒ SBS


분명 <천일의 약속>은 지형과 서연의 신분적 제약과 불치병을 극복하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멜로 드라마이다. 하지만 서른도 안된 나이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여주인공 서연 못지않게, 지형에게 비참하게 버림받게 되는 향기 또한 시청자들로부터 강한 동정표를 받고 았다. 이렇게 두 여자를 동시에 불쌍하게 만들어버리는 지형은 자연스럽게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형의 우유부단이 모두에게 상처주고 결국 파국을 맞게 하였으니까 말이다.

지형의 입장에선 이것이 일종의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서연이 알츠하이머에 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자신이 아닌 집안을 위한 결혼 상대인 향기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물론 지형 아버지의 엄중한 충고대로 세상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마냥 사랑타령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저히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특히 한국에서의 결혼은 개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 간의 결속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있는 집안 자식'이 자신의 사랑만을 위해 '평범한 상대'를 택하는 경우는 대부분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다. 오히려 사랑이 아닌 현실을 택하려 하는 지형의 모습이 더 설득력있다.

<천일의 약속>은 서른을 갓 앞둔 시점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서연도, 지형에게 예고도 없이 차인 향기도, 그리고 그렇게 두 여자에게 모진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지형까지도 안쓰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달리는 지형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나면서도 딱히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하다. '막상 저 입장이 되면 어떨까', '모든 기득권을 다 거부하고 처음부터 용기 있게 현실이 아닌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분통 터지는 지형의 행동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서연과 향기를 더욱 동정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해타산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청춘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이 지점이 김수현 작가의 노림수가 아닌가 한다.

천일의 약속 김래원 수애 김수현 작가 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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